본문 바로가기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61)신라 무열왕릉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61. 신라(新羅) 무열왕릉(武烈王陵)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신라(新羅) 통일의 기초를 이룬 신라의 영주(英主) 29대 무열왕(武烈王)의 무덤은 경주시 서남으로 약 3km 대구로 가는 길가에 있는데, 그 능(陵)의 주위는 약 100m, 높이는 약 13m나 되는 광대한 것이다. 그보다 그 앞에 서 있는 비석은 신라의 예술(藝術)을 자랑하는 걸작으로 왕릉을 축조한 당시는 비신(碑身)이 있었으나 그 후에 분실되고 이수(螭首)만 남아 있는데, 넓이 1.5m, 높이 1.3m, 두께 32cm이며, 중간 전액(篆額)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쓴 것은 김 인문(金仁問)의 필적(筆蹟)이라고 한다.

 귀부(龜趺)는 넓이 2.5m, 길이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3.3m, 높이는 다리로부터 비신(碑身)까지 0.8m인데 특히 머리와 네 다리의 사실적인 수법이며, 이마와 턱 밑에 조각한 보상화문(寶相花文)이 우미한 것이며, 등에 새긴 귀갑문(龜甲文)과 그 주변의 비운(飛雲)은 당(唐)나라의 정수(精髓)를 전한 것이라고 한다.

 신라(新羅)의 유물(遺物) 중에 실로 일작(逸作)의 하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를 보면 동왕 7년 8월 2일에 큰 주연을 베풀고 장사(壯士)를 위로 시킬 때 소정방(蘇定方)이 여러 장수와 당상(堂上)에 앉아서 백제(百濟)의 의자왕(義慈王)과 그 아들 융(隆)을 당하(堂下)에 앉히고 의자왕(義慈王)으로 하여금 술을 치게 하였으므로 백제(百濟)의 좌평(佐平) 등 모든 백제(百濟) 신하(臣下)가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성격과 아울러 위업을 이룬 왕(王)이며 응당 그와 같은 호화(豪華)도 있음직한 일이다.

 

참고 자료

○ 신라(新羅) 29대 무열왕(武烈王)

 아버지는 이찬 용춘이요,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이다. 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또한, 김유신의 둘째 동생인 문희와 결혼을 함으로써 경주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 됨으로써 120년 동안 신라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신라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현재 빗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듯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보기 드문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머릿돌 앞면 중앙에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로 이 비의 주인공을 밝혀 주고 있다.

 태종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잠들어 있는 2기의 고분이 더 있다. 하나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 인문(金仁問)의 묘요, 또 하나는 무열왕의 9대손인 김 양의 묘다. 무열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무왕과 친 형제인 김인문이다. 󰃁

(푸른 숲. 2013.01.19.)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