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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58)옥적과 만파식적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58. 옥적(玉笛)과 만파식적(萬波息笛)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국립경주박물관 금관고(金冠庫) 안에 있는 옥적(玉笛)은 처음에 천존고(天尊庫)에 비장(秘藏)되어 있었으나 근세조선에 들어 와 동경관(東京館) 화재로 인하여 나대(羅代)의 진기(珍器)가 거의 소실(燒失)되었을 때 이 옥적도 같이 없어졌다. 그 뒤에 이 옥적을 모조하였더니 화제당한 후 140년을 지난 근조(近朝) 숙종(肅宗) 8년 동경관 뜰 속에서 경주사람 김 승학(金承鶴)이 발견하여 간직한 것을 그가 죽은 뒤 14년 그 때의 부윤 이 인징(李麟徵)이 빼앗았다. 불우한 이 옥적은 근조(近朝) 말에 또 다시 분실(紛失)되었으나, 1909년 가을 당시의 통감(統監) 일본인 증미(曾彌)가 순시할 때 에 신탄창고(薪炭倉庫) 안에서 발견하여 다음해 1910년에 서울 박물관에 보관시켰다가 1923년 국립경주박물관 금관고가 낙성되면서 다시 찾아왔다.

 이 옥적은 전설(傳說)이 있다.

 신라(新羅) 제31대 신문왕(神文王) 2년에 가까운 동해안(東海岸)의 해관(海官) 박 숙청(朴夙淸)으로부터 보고가 들어 왔다.

“동해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산이 나타나서 감은사(感恩寺)로 향하여 떠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여 보고합니다.”

이 보고를 받은 왕은 일관(日官) 김 춘질(金春質)을 시켜 점(占)을 치게 하였더니,

“이는 결코 좋지 못한 전조(前兆)가 아니옵고 해룡(海龍)이 나라를 지키는 모물을 받치고자 하는 것이오니 만약 왕께서 해안으로 행차하시면 반드시 얻기 어려운 귀한 보물을 얻어 시겠나이다.”

고 여쭈었다.

 이에 신문왕은 크게 기뻐하며 급히 토함산(吐含山)을 넘어 “이견대(利見臺)”에 올라 그 작은 산(山)을 바라보고 사환(使喚)을 보내어 그 산을 조사시켰던 바,

“산 모양은 귀두와 같고 꼭대기에는 대가 나 있습니다. 그러 하온 데 이상한 것은 낮에는 두 그루이오나 밤이 되면 한 그루가 되옵니다.”

이러한 복명(復命)이었다.

 왕(王)은 그 실상을 보려고 감은사(感恩寺)에 거동하여 그 곳에 머무르시었는데 그 이튿날 오시(午時)에 두 대가 합하여 한 그루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면서 7일째 되는 5월 17일에야 겨우 그치게 되었다.

 왕(王)은 배를 타고 그 작은 산에 올라갔더니 한 용(龍)이 나타나기에 왕이,

“이 산에 대는 갈라졌다 합쳐졌다 하니 대체 무슨 까닭인고?”

용이 삼가 아뢰되,

“이는 한 손을 치면 소리가 없어도 두 손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대도 합한 연후에야 소리가 나나이다. 왕께서는 소리로서 천하를 다스릴 서조(瑞兆)이오니 이 대로써 피리를 만들어 부시오면 천하가 화평(和平)하리다.”

 왕(王)은 해룡(海龍)의 말대로 그 대를 베어 올라오는 도중에 기림사(祗林寺) 서계변(西溪邊)에서 점심을 드실 때 태자(太子) 이공(理恭)과 효소왕(孝昭王)이 쫓아와 하사(賀辭)를 올리고 흑 옥대(黑玉帶)를 살펴보더니 한 개 한 개의 옥이 모두 용(龍)이므로 왕께 그 사연을 아뢰고 옥(玉) 한 개를 뜯어 시냇물에 던졌더니 이상하게도 용으로 화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그 자리가 깊은 못이 되었으므로 이곳을 용연(龍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그곳에서 맑은 물이 깊이 흐르고 한 여름이 오면 많은 사람이 찾아 간다. 기림사(祗林寺)에서 북으로 한참 올라간다. 또한 이와 같은 사연이 깊은 대로서 피리를 만들어 경주 천존고(天尊庫)에 비장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창고에 자웅(雌雄) 한 쌍의 옥적(玉笛)이 전하였다고 하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척유구촌(尺有九寸)이라 하였으니, 이는 웅적(雄笛)을 가리킨 듯하다. 그리고 『지봉유설(芝峯類說)』이란 책에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왕건(王建)은 신라 옥적을 송도(松都, 지금의 開城)로 옮기었으나 죽령(竹嶺)을 넘은 즉 이 옥적에서는 청량(淸亮)한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왕(王)은 이것은 “신물(神物)”이라 하여 다시 경주(慶州)로 보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甘浦邑 羅亭里)에 있는 “만파정(萬波亭)”은 백사청송(白沙淸松)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수려한 해안에 서 있는 데, 이는 이러한 고사(故事)에 의하여 세웠다.

이 옥적(玉笛)의 특징을 소개 한다.

 신라 땅 이외에서는 소리가 아니 난다는 것과 반드시 한 사람만이 불수 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딴 사람이 불게 된다는 것 등등이다.󰃁

(푸른 숲. 2013.01.16.)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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