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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60)화랑도장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60. 화랑도장(花郞道場)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신라(新羅)는 반도통일(半島統一)의 목표로 우선 청년들의 교양훈련(敎養訓練) 방면에 힘썼다.

 귀족의 자제로서 나이가 열다섯 살 이상이 된 자 중에서 의지(意志)가 굳고 몸이 튼튼하며 영리한 자를 뽑아 특별히 설치한 도장(道場)에서 문무도(文武道)를 수득(修得)시켰으므로 우수(優秀)한 화랑(花郞)들이 배출(輩出)되어 나라를 위하여 활약(活躍)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화랑의 도장(道場)은 서울(=경주)부근에 있으나 모두 진애(塵埃)를 떠난 속기(俗氣)없는 고산 심곡(高山深谷)에 있었다 하며, 지금 그 위치가 짐작되는 곳은 3개소인데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유지(遺址)는 경주시 서면 모량리(西面 牟粱里) 금척릉(金尺陵)의 남쪽에 있는 높은 봉(峯)이다.

 이 산에서 김 유신장군(金庾信將軍)은 삼국을 평정하기 전에 산신(山神)으로부터 보검(寶劍)을 받아 수련을 거듭하였다고 전하는데, 하루는 천신(天神)께 삼국 통일(三國統一)을 맹서(盟誓)하고 큰 바위를 향하여 말하되,

“내가 능히 뜻대로 삼국을 통일(統一)할 수 있다면 내 보검(寶劍)으로 이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리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보검으로 내리 친즉 바위가 무 베듯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김 유신장군(金庾信將軍)은 더욱 용기를 내어 그 부근에 있던 바위들도 모두 칼로 내리쳐 수천 개의 조각돌을 만들어 쌓아 올려놓고 용기(勇氣) 백배(百倍)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단석산(斷石山)은 이러한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 지맥암(持麥岩) : 주사암에서 북으로 높은 바위가 절벽같이 솟아 있는데, 올라가면 먼 산과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것이 마치 학(鶴)을 타고 은하(銀河)에 올라 하계(下界)를 굽어보는 심정이다. 옛일을 새롭게 하여 준다. 그 서편으로 지맥암(持麥岩)이 있는데 이것 역시 사방이 깎은 듯 절벽으로 올라가기가 매우 어렵지만은 그 위는 광평(廣平)하여 백여 명의 연석을 베풀 만하다.

 옛날 김 유신장군(金庾信將軍)이 바위 위에서 밀로써 술을 빚어 부하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바위에는 당시의 흔적인 듯 병마(兵馬)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 화랑암(花郞岩) : 모량역(牟梁驛)에서 모량동 서쪽을 돌아 장천지(長泉池)를 지나서 물을 따라 약 4km가면 원흥사(元興寺)가 나타난다.

 여기서 좌우로 보면 절벽(絶壁)같이 솟아 있는 높은 봉이 화랑암(花郞岩)이다.

 화랑(花郞)이란 사내다운 청년을 골라서 노래와 춤과 글과 무예(武藝)를 가르치고 인재(人材)를 길러 벼슬을 시켰으므로 그 학교가 곧 도장(道場)이며, 선발(選拔)에 당선된 학도(學徒)를 화랑이라 부른다. 화랑암(花郞岩)은 교문(校門)과 같이 도장 입구(入口)를 표시한 바위이다. 그러므로 이 바위부터는 어머니라 하더라도 여자(女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 급제암(及第岩) : 급제암(及第岩)은 화랑암으로 내려가는 골짜기에 있는데, 길이 약 6m, 넓이 약 4m, 높이 약 1m 가량 되는 광평(廣平)한 큰 바위다.

 신라(新羅)의 청소년이 전장(戰場)에 나아가 용감하게 싸운 이면(裏面)에는 신라 어머니들의 한없는 훈도(訓導)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급제암(及第岩)에는 때때로 어머니들이 찾아와 자식을 위하여 격려(激勵)와 훈계(訓戒)를 하시던 곳이라 한다.

○ 마장계(馬場溪)와 북대(北臺) : 마장계(馬場溪)는 급제암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단석산(斷石山)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도중 3개소의 집터가 있다. 처음 것은 단석암지(斷石庵址)라 한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면 경주 시가지(市街地)와 영일만(迎日灣)의 바다가 눈앞에 보이고, 그 정변(頂邊)의 광장은 북대(北臺)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마장(馬場)이요, 사장(射場)이었다.

 이곳에서 약 4km를 가면 원흥사(元興寺)가 있다.

○ 남근암(男根岩)과 상인암(上人岩) : 남근암(男根岩)은 북대(北臺)의 동쪽 밑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척(尺)이나 되는 기둥 바위다. 김 유신장군(金庾信將軍)이 이곳에서 검술(劍術)을 닦을 제 내리쳤다는 이야기와 남성적(男性的)으로 솟아 있는 관계로 남근암(男根岩)이라 한다.

 북대(北臺)로부터 서북방 약 2km 가면 넓이가 수십 명 앉을 수 있는 상인암(上人岩)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큰 동굴도 역시 도장이었다 한다. 굴 속 삼면에는 십구(十軀)의 불상과 인물상(人物像), 그리고 남암(南岩)에는 19자씩 25행 약 470여 자의 명문(銘文)이 깎은 바위벽에 새겨져 있다. 󰃁

(푸른 숲. 2013.01.18.)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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