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엽서수필 5

(97)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16. 강가 견칫돌처럼 - 만호학행비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16. 강가 견칫돌처럼 - 만호학행비 이영백 강가 견칫돌처럼 튼튼히 쌓아 할아버지 모실 선산을 1957년 샀다. 북망산에 유택을 만들었다. 집성촌 마동에서 시래동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여기 현재가 있고,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있기에 공의 표문지어 남기고자 한다. 공의 조상이 시래동에 대대로 세거한지 200년이 지났어도 이제 비갈 함은 비록 만시이고 사행경력과 행적이 은미하나 세계(世系)를 서술하여 천추자손에게 시금석이 되고자 함이다. 공의 휘는 응조요, 자는 여복(汝福)이며 호는 만호로 성은 이씨이다. 본관은 차성(車城)으로 신라 말에 탄생하여 고려조에 공이 있어 공조전서 벽상공신 보국상대장군으로 록이 상서사에 이르고 차성군으로 봉한 이위(李渭)를 시조로..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15. 어느 강 지류에 앉아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15. 어느 강 지류에 앉아 이영백 차성이씨 호군공파(파조 諱善基公)는 집성촌이 예전 “용동(龍洞)”에서 “마동(馬洞)”이다. 형산강 남천 상류인 시래천 선상지에 있다. 신라의 역사는 꿈같이 흘러갔건만 동악 옛터에는 돌 한 덩어리 초목 한 떨기마다 조상의 온기가 배어 있고 이곳에 축복받은 자손들이 누대로 그 전통과 그 문화를 이어 내려 온 우리로서 어찌 잊어버리고 있으랴. 차성이씨 다섯 집이 있어 원주는 부사공파조요, 영헌은 판관공파조요, 선기는 호군공파조요, 계동은 교리공파조요, 형주는 정랑공파조이다. 공의 고조는 자 흥운이고 성룡으로 입향조이며, 증조 자 효윤 삼록이요, 조부 자 자현이며 수가선대부 여창이요, 부는 자 내언 수통정대부 영원이다. 공은 형..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14. 강의 지류처럼 - 분파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14. 강의 지류처럼 - 분파 이영백 토함산(吐含山, 745m)은 경주지방에서 높은 산이고, 단석산(斷石山, 827m)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그곳은 차성이씨 씨족의 뿌리가 있다. 호군공파 집성촌이 마동인데, 본래 지명이 “용동(龍洞)”이었다. “살인사건 등이 일어나고 너무 격하니 동 이름을 용동에서 마동(馬洞)으로 바꿔라”고 하여 바뀌었다. 후에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말을 기뤘다. 차성이란 본관을 받고, 처음에는 기장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기장이 폐현까지 당하면서 차성 본관을 가진 가문이 밀양으로, 강원도 횡성 등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불국사지역 시래동 개남산 아래에 터를 잡아 살면서 “자손들이 팔 비장, 육 문둥이가 나타난..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13. 뿌리를 찾아서 - 차성이씨 편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13. 뿌리를 찾아서 - 차성이씨 편 이영백 강에 발원지가 있듯 인간에도 뿌리가 있다. 차성이씨는 삼한시대 “갑화양곡(甲火良谷)”에서 “현(縣)”이 되고, 신라에 통합되면서 경덕왕(757)의 현대지명화 개칭으로 「일명 차성(車城), 군명 기장(機張)」이 되었다. 차성지명은 대만의 고웅시 동평현 차성향(鄕)에서 왔는지 의문이 생긴다. 신라시대 지명에 사연 없는 것이 없다. 추측컨대 “갑화양곡”이후 지명으로 오랫동안 차성과 혼용한 것이다. 그러기에 신라에서는 그 흔적을 남기고자 일명으로 부기한 것 같다. 1,200년 전 지명을 잘 모르고 살 뿐이다. “차성”본관을 득한 흔적은 오늘날에 뚜렷이 고증적 문헌자료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평생 이곳의 지명을 끄..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12. 사행천에서 갑화양곡, 차성 찾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12. 사행천에서 甲火良谷 ㆍ 車城 찾다 이영백 민초는 흐르는 물 따라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수면 위로도, 수면 밑 모래바닥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가문의 뿌리는 멀리 있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차성(車城)”이 본관이다. 흔한 성(姓)임에도 불구하고 희본이다. 초교 3학년 때 아버지 손잡고 월이 시조탄강지를 찾아갔다. 비조(鼻祖)가 태어난 곳을 “광림대(光臨臺)”라 하였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람으로 태어난 곳이다. 어린 날에는 그런 것이 참 이상하였다. 월성이씨와 나는 그들의 본관과는 다르다. 분적종 차성이가(李哥)이다. 누가 정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기에 본관이 된 것이다. 왜 이렇게 정하여진 것을 아무도 몰라서 본관 찾아 평..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제2부 강가 살다 11. 둑 위 외딴집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제2부 강가 살다 11. 둑 위 외딴집 이영백 시래 마을 천변에 어설픈 오두막 한 채가 있다. 시래 천변집이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는데 아버지, 딸, 아들 등 셋이 함께 찾아들었다. 살 집이 없어서 아버지는 그 오두막집에 살도록 허락하였다. 노인의 성은 황 씨였다. 도시에서 우편배달부를 하였다고 키 큰 노인을 “황 체부”라 불렀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사연을 가지고 있다. 딸 하나, 아들 하나뿐인지 더 이상의 내막을 묻지 않아 잘 모른다. 아들이 나보다 한 살 아래라 우리 집 꼴머슴으로 채용해 준 것이다. 밥은 우리 집에서 먹고, 나와 같이 종일 소 먹이고, 나무하고, 잠은 저네 집으로 돌아가서 잔다. 꼴머슴 이름은 “삭뿌리(朔不)”라 하였..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10. 시래철도교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10. 시래철도교 이영백 큰형 집 큰방에 “시래철도교 공사완공”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경부선 남성현(南省峴)터널을 곡괭이로 팠다하고, 큰형은 1936년 부산-울산-불국사역-경주역의 개통을 위해 어렸어도 시래철도교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철교(鐵橋)란 첫째, 철을 주재료로 만든 다리라는 “강교(鋼橋)”라 하고, 둘째, 철도교(鐵道橋)는 “철도 선로가 놓인 다리”의 철도교를 말한다. 고향에는 형산강 남천 상류 시래천이 흐르고, 옹기종기 천변 따라 집들이 모여 산다. 논벌이 조각보처럼 자연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들판인 분지다. 그곳에는 조상들이 대대로 눌러 붙어 농사지어 먹고 살았다. 철길 하나 넘으면 관광지 사하촌(寺下村)으로 관광객들 돈으..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9. 강을 따라 온 모래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9. 강을 따라 온 모래 이영백 강변에는 금모래ㆍ은모래로 이룬 백사장이 있다. 어린 날 우리를 유혹하는 장소이다. 누가 그렇게 모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서 저절로 모래바닥에 퍼질고 앉아서 왼손을 모래더미로 묻어 작은 흙집을 짓고 있다. “깐~채야! 깐~채야! 헌집 줄게, 새 집 다오!”단체로 합창을 한다. 모두가 신나한다. 강가 모래는 오늘날 돈이 되었다. 비가 온다. 세상 자연 어디에도 비가 온다. 높은 산, 낮은 산 어디에도 비가 내린다. 낙엽 거두어간 숲 속에도 비가 내린다. 내린 비로 산 흙에 물을 머금는다. 오는 비가 세차게 내리면서 산골짜기로 물이 모인다. 졸졸졸 흐른다. 산골짜기에 도랑물이 되어 석벽을 무너뜨린다. 바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