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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미늘

(엽서수필 3) 미늘 89. 여자정보고등학교 유치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9. 여자정보고등학교 유치하다

이영백

 

 삼대가 무학이면 까막눈 집안이 되고 만다. 사람이면 배워야할 것이다. 일찍 아버지 무학이면서도 큰형과 나를 서당에 가게 한 것으로 나에게는 특별히 선택된 경우다. 아버지 답이 명쾌하였다. 큰형과 내가 두 띠 차이니 세대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바통 받을 사람이 나이었다고. 그러나 갑자기 집안에서 학교를 유치한다니 기가 찼다. 서당 다녔는데 느닷없었다.

 시골 고장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유치하려고 한다. 사립중학교 부지를 둘러보러 다닌다고 소문이 났다. 그것도 그럴듯하게 부산에서 돈을 번 모 선박회사 이회장이라니 맞을 것이다. 조금 있으니 공립중학교가 들어온다고 하여 사립학교는 저절로 포기하고 말았다.

 셋째형 고종처남이 번질나게 우리 집 사랑채에 들락거렸다. 우리 집ㆍ작은 집 밭 8천여 평에다 여상(女商)을 유치한다고 하였다. 그 분은 내가 강의록 공부할 때 영어를 배운 일이 있었다. 우리 밭에 학교 짓는다. 어렴풋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모양이다. 묘답 다섯 마지기 논에 벼 심고 있는데 진출입 길 낸다고 논둑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구정동사람 밭뙈기 매수설득이 안 되어 그만 포기하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학교 짓는 일을 그만 잊고 지냈다. 갑자기 학교부지로 부상한 곳이 조양 못 옆 감나무골 갈매 밭뙈기로 누군가가 결정하였다. 아랫마을 토지 주들을 설득하여 달라고 나에게 부탁이 들어왔다. 그것은 아랫마을 경로당에 한문배운 기회가 있었기에 적격이라고 하였다.

 나섰다. 동네에는 전기도 안 들어 왔고, 아랫마을에 큰 도로도 없던 시대였다. 경로당에 호당 한 분씩 모임회의에 참가를 요청하였다. 돼지고기 구입과 통 말술을 예약하고, 김치 안주도 준비하였다. 가득 모이었다. 고장발전을 위해 마치 선거 유세하듯 준비하여 연설하였다.

 주안점은 논 값 평당 이백오십 원 할 때, 밭 값을 오백 원으로 띄었다. 설명이 잘 되었던지 한 집 빼고 모두 동의하였다. 1971년 동도교육재단이 설립되고, 이후 건물 짓고 1975년에 “경주여상업고등학교”가 개교했다.

 고향 들리면 곧은 아스팔트며, 전신주가 들어온 것은 까까머리 고교생이 한 말을 어른들이 믿고 베풀어 준 관용이다. 시골에 고등학교가 들어왔다.

(20210724. 토. 유두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