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
8. 대기만성 앞에서
이영백
늘 푸짐하게 담길 그릇을 그렸다. 그래야만이 큰 섬에 많은 곡식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늘 현실은 작은 그릇에 담긴 보잘 것 없는 음식뿐이었다. 내가 가질 큰 그릇은 언제 만나 볼 수 있을 것인가?
내 생애 73년은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삶이 어려웠다. 비록 학동기를 끝내고 고생하면서 청년기를 얻어 삶을 살아 보았다. 학동(學童)을 가르치면 행복하고 만족할 줄 알았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뭔가 미늘에 걸려서 내 뜻을 펼치기에 너무 작은 초등학교라는 마당뿐이었다.
외국영화에서 보면 젊은이가 대기업을 창업하고, 생활의 기기들을 제작하고 자동차를 만들었다. 또 우주를 나는 비행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학문의 밑바탕도 되었을 것이고, 재정적 운용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재정 기반도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았던 지난날의 그 시대는 힘없는 날개로 파닥이면서 작은 허파로 겨우 숨만 할딱거리는 그런 삶의 시대였다. 사회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도 발달하지 못했다. 하물며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던 보릿고개 시대였다.
요즘처럼 청년창업을 아이디어만 가지고 나서서 뒷받침이 되었더라면 하는 한 많은 후회를 여기다 뱉어 놓을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여러 기반들이 너무나 빈약하였기에 아예 상상도 못하고 산 것이 현실이었다. 하물며 이러한 거시경제의 이해와 현실을 돌파하려고 했을 때에는 너무 늦은 인생황혼의 2막을 거쳐 사그라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바라던 삶이 모두 한 박자 느린 것으로 진행될 뿐이었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특히나 좁은 국토에서 소규모였기에 발전이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험하고 창의적 기반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하고자 하면 큰 그릇이 없었을 것이다. 삶의 윤택에서 다음의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작은 그릇에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여! 넓고 큰 그릇을 차지하여라. 그리고 그곳에 비록 늦었을지라도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늦었다고 할 때 그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두려워 말라! 구하라! 그러면 큰 그릇을 얻을 것이다.
(20210304. 목)
'엽서수필 3 > 미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엽서수필 3) 미늘 10. 죽음 앞에서 (0) | 2021.03.07 |
---|---|
(엽서수필 3) 미늘 9. 이야기 앞에서 (0) | 2021.03.06 |
(엽서수필 3) 미늘 7. 소망 앞에서 (0) | 2021.03.02 |
(엽서수필 3) 미늘 6. 꿇다에 맞서다 (0) | 2021.02.28 |
(엽서수필 3) 미늘 5. 진실의 앞에서 (0) | 2021.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