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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29. 산그늘

29. 산그늘

이영백

내가 태어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께 생전에 내가 어떻게 태어났느냐고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의 운이 7이요, 기가 3일 것이다. 그만큼 운 좋게 내가 태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모두가 삼신할머니의 큰 그늘에서 태어났다. 산그늘에서 음덕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늘은 무섭다. 고조가 무후(無後)여서 증조부가 양으로 왔다. 증조는 할아버지를 독자로 낳고, 그 할아버지는 사남매 얻은 것도 결과적으로 삼신할머니 큰 그늘아래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딸 다섯, 아들 다섯으로 대가족을 만들었다. 많은 권식(眷食)이 있어서 행복하였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다. 대가족이 좋다.
 그늘은 일반적인 그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그늘도 있겠지만 자연적으로 생기는 그늘이 더 많다. 바로 산그늘이다. 산그늘은 고래로부터 태양이 있으면 생기는 자연적 그늘이다. 산그늘은 낮과 밤의 경계선이다. 산그늘이 생기면 어둠을 몰고 와서 차츰 밤을 만든다. 산그늘이 사라지고 밤에 많은 사연을 만든다. 아침 여명의 시작으로 낮이 된다.
 나는 산그늘을 좋아한다. 산그늘이 없으면 낮밤 경계선이 없어서 아버지께서 무한으로 일만 하셔서 귀가하지 못할 것이다. 종일 뜨겁던 태양도 서산으로 넘어가면 서쪽 높은 마석산(磨石山) 산그늘이 내려온다. 처음에는 더디 오다가 순간에 마을을 덮어 버린다. 나를 덮어 버린다. 그것이 산그늘의 위력이다. 바로 산그늘로 인하여 밤낮 경계 짓는 것이 명확해진다.
 산그늘 내리면 우리 집에 일이 너무 바빠진다. 내가 하는 일도 많아진다. 큰 외양간 바닥에 끄나풀을 깔아야하고 큰 가마솥에 쇠죽을 끓여내야 한다. 마당에는 황소들을, 외양간에는 암소와 송아지들을 모은다. 가장 산그늘을 무서워하는 것은 가금류(家禽類) 중에 닭으로 바닥에 두지 않는다. 밤에 오소리나 삵들이 잡아먹기에 지붕 밑에 닭장을 대나무 통으로 여럿 매달아서 키운다. 해거름에 벌써 닭들이 제 집으로 들어가라고 닭장 문을 열어 둔다. 횃대 난간을 걸쳐 두면 스스로 제 통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닭장 문을 통마다 걸어 잠가 준다. 어린 날 나의 일과 중 큰일이었다.
 산그늘이 내리면 사람들이 방을 찾아든다. 밤낮의 경계선에서 잘 훈련되어 집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저녁을 해결하면 바로 잠들지 않는다. 산그늘 내린 후 밤에는 저마다 밤일 찾는다. 산그늘 내린 밤에는 짚공예를 한다. 남정네는 세끼 꼬며, 가마니 친다. 여성들은 바느질, 길쌈한다.
(20200430.부처님 오신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