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옹 우물
이영백
인간이면 물을 마시고 산다. 병아리는 용케도 전 낮은 접시의 물을 톡~ 한 번 찍어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본다. 산 노루는 간밤에 어디서 잤는지 모르지만 산속 깊은 옹달샘을 찾아와서 세수는커녕 물만 먹고 간다.
경주에는 샘이 많았다. 신라시조가 태어난 “나정(蘿井)”이요, 김유신장군이 가노를 시켜 물마시고서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한“재매정(財買井)”이 있다. 또한 쪽샘은 황오리 반고정샘, 백율사의 우물과 함께 경주 3대 우물로도 유명하다. 현재까지도 이 쪽샘마을에는 200여개의 우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우물이 많기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내가 살았던 조그만 마을에서는 작은 우물이 여럿 있었다. 처음 살았던 마을은 철길 밑에 학자수가 있는 우물이었다. 두 번째 집에서는 작은 우물이어서 날이 가물면 자주 마르던 곳이었고, 세 번째 집에서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퍼 올려 마셔도 마르지 않는 유명한 우물로 지금까지도 있다.
네 번째 이사한 후 우물 파는 일이 큰일이었다. 새보머리에서 내려오는 도랑물 곁에 파기 시작하였다. 어린 날 우물파기는 겁이 났다. 작은 공간을 자꾸 파내려가면서 위에서 돌을 내려 괴이고, 우물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쌓아야하기 때문이었다. 우물을 한참 파내려 갔는데 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몸피가 작아서 현재 파고 있는 그곳에 들어가서 작업하라는 것이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어길 수 있으랴. 바지 걷어 올리고 셔츠바람에 내려갔다.
도르래에 양동이를 매달아 흙을 퍼 담고 줄 당겨 신호하면 그 양동이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물 속은 나 혼자였다. 우물 속에서 하늘 보면 동전크기만하다. 다시 양동이가 내려오기까지 우물 속은 너무 답답하다.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무서웠다. 그렇게 우물이 만들어졌다. 밖으로 올라와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난 죽을 뻔하였다.
우물은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 팠기에 나에게는 오랫동안 애착이 가는 것이었다. 여름에는 우물 속까지 끈을 내려 묶어두었다. 아버지 새참 동동주 주전자를 매달아 두기도 하였다. 자연냉장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어머니가 하는 일 중에 큰일은 된장 담그기 하면서 곧잘 우물물을 양동이 걸쳐서 무지개로 짊어지고 퍼다 날았다. 사람이 사는 데는 먹는 물, 샘물이 가장 중요하였다. 우리 집 우물은 작았다. 그래서 옹 우물이라 한다.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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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蘿井) : 사적 제245호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박혁거세의 탄생전설이 깃든 우물.
*재매정(財買井) : 사적 제246호 경주시 교동 문천 가 김유신장군 옛 집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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