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시골둑길
이영백
세상에는 자연이 펼쳐있다. 삼라만상이 어우러져 그렇게 지표에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누가 그렇게 시작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누더기 조각보처럼 논과 밭을 나누었다. 또 저마다 그 공간을 점유하면서 법을 만들어서 소유권을 주장한다. 그 자연의 들판과 구릉(丘陵)에서도 사람들이 집을 짓고 생활의 작은 공간인 방을 만들어 살고 있다.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즐겁다. 나의 어린 시절, 학창시절에 나도 그러한 시골에서 자연인처럼 살았다.
논과 밭이 법의 공간을 가득 채웠듯 경계선에 논둑과 밭둑을 만들었다. 도랑가에는 큰 둑이 만들어졌고, 자연히 그 위를 시골둑길은 고불고불하게 줄을 흩으려 놓은 듯 이어져갔다. 그 둑길에는 미루나무가 마치 군인들 관병식 하듯 줄지어 자라서 농촌의 풍정(風情)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감히 도회지에서는 그런 풍경을 만들지도 못할 것이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수양버들의 뿌리는 강둑을 보호하였다. 수양버들 휘늘어지면 봄을 지나 여름에는 어르신들의 최고 쉼터였다. 간혹 극성스러운 매미가 울고 둑길에 집집마다 소들을 몰고 나와 풀을 뜯긴다. 철없는 송아지는 어미를 잃어버리고 ‘음~메~.’하고 운다. 그러나 제어미의 냄새를 맡아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잘 찾아온다. 소가 풀 뜯는 시간에 우리들은 물 오른 버들가지 꺾어 피리 만든다. ‘호~르~륵~ 호~르~륵~’풀피리 불고 논다.
멀리서 고향마을 내려다보면 초가와 기와집이 옹기종기 섞여 살고 집 앞으로 고불고불한 집 찾아가는 고작 길이 나 있다. 감나무, 미루나무 키다리 나무들마다 꼬챙이를 부리로 모아 까치들이 집을 짓는다. 태풍이 오는 해에는 야물게 짓고, 그렇지 않을 해에는 엉성하게 짓는다. 미물도 우리들에게 태풍 오는 것을 알려 준다. 까치는 너무나 기특한 텃새다.
시골둑길은 도랑의 물길을 막아 주고, 하천과 경작지를 크게 구분지어 준다. 시골둑길은 사람 사는 데 큰 가림역할을 한다. 그 길이 있어서 저마다 어려움이 생기면 막연하나마 둑길 걸으며 인생의 철학을 배운다. 답답한 시골사람들 오늘날 서울사람들 마냥 한강변 찾듯 하고 산다.
시골둑길을 걷다보면 어르신 만나면 인사도 드리고, 동네 처녀들 나물 캐는 곳에 총각들이 어른대기도 한다. 동네혼사로 본동(本洞)댁이 탄생한다.
시골둑길에는 사랑이 싹트고 그 사랑이 맺었다. 시골둑길은 시골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의 활동사진인 스크린이었다. 사색하는 철학의 길이었다. 나는 곧잘 그 시골둑길을 마치 철학자처럼 허허롭게 걸었다.
(202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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