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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7. 못 다한 글 사랑, 이모작 수필사랑

7. 못 다한 글 사랑, 이모작 수필사랑

이영백


 난 늘 잡문만 써댔다. 입학식, 졸업식, 누구의 책, 무슨 단체에서 발간하는 서문, 심지어 누구 아들 S대학교 가는데 “자소서” 등 그렇고 그런 글만 써댔다. 심지어 친구가 “수필집”을 내는데 교정봐 달랜다. 그것도 짧은 몇 시간 만에 교정을 봐 주었다. 글을 왜 나에게 써 달래지? 아니면 왜 나에게 교정을 봐 달래지? 나는 로봇처럼 글 쓰는 사람인가 봐.

 초등학교 교사 때에는 고학년 담임을 많이 맡았다. 다섯 군데 근무지마다 마지막 학년담임을 맡아왔다. 마지막 근무지에서는 1개월 25일 만에 퇴직하였으니 그렇다 치자. 네 군데 근무지에서는 졸업 송사 쓰는 것을 꼭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세 번째 학교에서는 학급신문, 졸업문집까지 발간하였다. 고향 경주에서는 “교사아동문예”모임에도 활동하여 보았다. 나중에 그곳에서 시인과 수필가가 여럿 배출 되었다.

공업전문대학 교무행정을 맡았다. 개교기념식, 졸업식, 입학식 등 무슨 행사 때마다 인사말 쓰기가 나에게 떨어져서 쓸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글 쓰는 곳에서 필요하다면 나에게 꼭 그 글을 쓰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시나 소설이나 무슨 장르에서든 내 글을 쓰는 문학인이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살았다. 21세기가 되면서 조직이 복잡해졌다. 대학행정에도 환멸을 느꼈다. 두말없이 정년 3년을 두고 만57살에 그만 은퇴하였다. 그렇게 양어깨는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퇴직 3일 만에 너무 무료해지기 시작하였다. 좋아하던 술을 마셨고, 도시에서 이웃사촌들과 근교등산도 다니면서 퍽이나 술을 즐겼다.

 내리닫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았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였다. 남은 나의 생애에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시골생활로 출발하여 나의 체험을 풀어내는 초교 교사시절 등 젊은 날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자질구레하였지만 즐겁게 다듬어 써 내려갔다. 3년간 한밤을 잊어버리고 아래층 누옥 골방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글을 써댔다.

 초임 모포초교는 「파도소리에 묻혀」, 두 번째 내북초교는「산골짝에 다람쥐」, 세 번째 감포초교는 「파도치는 등대아래」, 네 번째 괘릉초교는 「왕릉 숲속으로」 등 8년 교사생활에서 250여 편을 마구 쏟아내었다. 이중에 7편 골라 수필가로 등단하고, 3년간 이론공부를 하였다. 이제 “수요일愛수필쓰기반”을 운영하며 인생 이모작을 짓고 있다.

(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