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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6. 못 다한 욕심

6. 못 다한 욕심

이영백


 어디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못 다한 것이 한두 가지이겠는가? 어려서부터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도 그림을 잘 그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그림 그리면 “환쟁이 될라 컸나?”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엄한 말씀에 그저 나 혼자 좋아서 흙바닥이나 종이에 그려 보는 것뿐이었다.

 중학교 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버지 개똥철학으로 초교 졸업하고 학교 공부는 끝이 났다. 낮에 일하고 밤이면 무슨 희망이 보인다고 꼬부랑글자 쓰고, 영어 단어 외우며 늘 나 혼자 만족하곤 하였다. 2년 동안 그렇게 하여 중학교과정을 혼자 섭렵하였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하였다. 더 많이 배우는 신학문이 꼭 필요하였다. 아버지 몰래 4km 떨어진 큰누나 집에서 중1학생을 가르치며 가정교사로 돈 벌어 가면서 내 공부를 하였다.

 석 달 후에 교복 입고 모자 쓰고 책 가득 넣은 가방 들고 집으로 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그만 책을 잿더미 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어머니 재 털어가며 가방에 넣어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그렇게도 공부하고 싶거든 다시는 집에 오지마라!”그 후 1년 지난 후 그래도 아버지 앞에 끓어 앉아 토, 일요일 집안일을 모두 하는 조건으로 귀가 하게 되었다.

 왜 하고 싶은 공부하면 안 되는지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버지 19살에 조부님 돌아가시고 사남매 치송도 못했는데 당신이 직접하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셨다. 그러나 이천 석하던 재종 집에 “마름”하면서 보았던 것이 일제침략기시대에 중학교 나와서 가산을 일시에 탕진하는 것을 보고 신학문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사연으로 신학문을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시골에서 논 두 마지기 유산이 전부였다. 대신에 서당 다니면서 축문, 지방, 혼서 쓸 줄 알면 된다고 하였다. 장가가고 아들딸 많이 낳아서 가문 이어가면 된다고 하였다. 아버지(1899년~1973) 머릿속에서는 전근대 철학이었다. 아버지는 목수였기에 초가삼간은 퍼떡 지어 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살아갈 21세기에서는 그것이 분명 아니었다.

 그럭저럭 고생했어도 돈 벌어 가면서 평생 내 공부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못 다한 욕심이지만 연금수급자요, 좋아하는 글 실컷 써보는 수필가가 되었으니 반분은 풀리었고 살아간다. 속담에 “말 타면 경마 잡힌다.”고 사람의 욕심은 자꾸 생긴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날 일을 차마 못 다한 욕심을 채우고 말았다.

(20200407. 보건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