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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이씨 사료

[스크랩] 전주이씨시조[이한李翰]에 유래에 관한 이야기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 유래에 대한 이야기

 

경주이씨의 분적인가?

중국 귀화인인가?

 

△. 전주이씨 시조는 [중국 귀화설]과 [경주이씨 분적설]의 두 가지가 있다.

△. 아래는 상고사 문답에서 율곤 학회에서 전주이씨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에 대한 답변 내용이다.

 * 동그라미안의 작은 번호는 잘못 표현된 글로 이를 지적하여 아래에 바르게 고쳐 본 것이다.    

  

◆ 경주이씨 분적설.

 

[① TV방송에서 *사공(司空) 이한(李翰)이 당(唐)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면 당나라 때 신라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율곤 선생이 참고한 책은 전주이씨 대관(全州李氏大觀)입니다.

 

이한(李翰)의 선조는 *신라 육성(六姓 : 李 ·崔 ·鄭 ·孫 ·裵 ·薛)에서 비롯되었으며 시조는 알평(謁平- 경주이씨 시조)이다.

 알평은 기원전 32년(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에 *아찬(阿餐) 벼슬에 오르고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임금이 하사한 성) 받았다고 합니다.

 

- 전주이씨 홈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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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司空)- 고려 때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의 최고 벼슬. ‘공조판서’의 딴 이름.

*신라 육성(新羅六姓)- 李. 崔. 鄭. 孫. 裵. 薛

*아찬(阿餐)- 17관등 중 제 6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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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대동보> 총론 편에는 경주이씨의 유래와 관련하여 이알평(李謁平)은 경주이씨의 시조인데, 과거의 <경주이씨 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蘇判公)을 중시조 1세(世)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습니다. 이는 시조 이알평 부터 중시조 이거명 까지 약 1000년간의 세계가 실전되어 몇 대가 흘러간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약 2백 년 전 조선 말기에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②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 부터 이거명 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계대는 아래와 같습니다.

(1세)알평(謁平) -(2)유 -(3)타 -(4)중가 -(5)석 -(6)문상 -(7)방 - (8)수장 -(9)수 -(10)기정 -(11)미선-(12)성립 -(13)서- (14)계환 -(15)걸 -(16)선장 -(17)기담 -(18)인흥 -(19)확 - 20)선정 -(21)체-(22)태휘 -(23)우영 -(24)준 -(25)소

-(26)경지 -(27)욱 -(28)원장 -(29)한로 -(30)계탕 -(31)도-(32)사언 -(33)기 ③-(34)희두 -(35)계 -(36세)거명

...-(34)진두 -(35)백전 -(36세)공-(37세)한(翰)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5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합니다.

 

④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입니다.

 그렇게 34세 희두(禧斗)까지 계대가 내려오다가 34세 희두(禧斗)에서 동생 진두(辰斗)가 있고 진두(辰斗)의 대에서 증손자인 한(翰)이 태어난 것입니다.

 

⑤ 이때가 AD. 742年~756年인 것입니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를 가리키는 것이며

⑥ 시조 이한(李翰)은 경주이씨 시조(慶州李氏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7세손인 것입니다.

 

경주이씨의 족보가 언제부터 쓰여 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⑦ 하지만 위 사실로 유추해 본다면 경주이씨는 신라 말 고려 초 동해물가(지금의 우리나라 경주)로 이주해 오면서 처음으로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조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이거명(李居明- 蘇判公)을 중시조 1세로 기록해 오다가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 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을 찾아서 끼워 넣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全州李氏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의 관계입니다. 34세 진두공의 약력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면 "공(公)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侍中公)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⑧ <세장보(世藏譜)>를 참고 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여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이 바로 全州李氏의 시조 사공공(司空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세)진두(辰斗)- (35)백전(白全)- (36) 공(恭)- (37) 한(翰)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大司空)은 상서(尙書) 어사중승(御使中丞) 상주국(上柱國)으로서 자금어대(紫錦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配位)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全州李氏의 시조다." 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한(翰)이 全州李氏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⑨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형제가 아닌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이상하다.

 

⑩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 재령이씨(載寧李氏) · 아산이씨(牙山李氏) · 우계이씨(羽溪李氏) 등이 있다. 이 성들은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全州李氏가 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⑪ 또 그 기록이 한(翰)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34세 辰斗)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더욱 이상하다.

 

이상으로 볼 때 全州 李氏가 중국에서 왔다, 또는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애매모호하다.

 

⑫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⑬ 세직(世稷.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⑭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중조 40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전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전주이씨의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 ①-⑭항의 표한 곳의 지적사항 오류 및 수정


[[텔레비젼 방송에 사공(司公) 이한(李翰)이 당(唐)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면 당나라 때 신라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율곤 선생이 참고한 책은 전주이씨 대관(全州李氏大觀)입니다.]

 (설명)

 [TV 방송에서 사공(司公) 이한(李翰)에 대하여 사서(史書)에 당(唐)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나라 때 신라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전주이씨 대관(全州李氏大觀)에는 사공(司公) 이한(李翰)이 신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 부터 이거명 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습니다.]

 (설명)

 분적종 합천이씨 족보에 올라져 있는 실전세계 35대의 계대는 대종보의 35대로된 실전 세계의 계대와 같습니다. 그런데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P287-292의 ‘失傳世系의 考察’에서 기록이나 역사적 사실 등 이유를 들어 이 계대가 정확한 계대가 아님을 밝혀 말하고 있고 경주이씨 화수회에서도 이를 참고로만 하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의 정확한 사실 규명은 후일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알려진 실전 세계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으나 한 가지 예를 들면 ‘관직명이 신라시대의 관직명이 아닌 대부분 고려와 중국의 관직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는 점으로 이는 정확한 세계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34)희두 -(35)계 -(36)거명 ..-(34)진두 -(35)백전 -(36)공 -(37)한(翰)]

 (설명)  위의 계대는 분적종 합천이씨 세보에 올라져 있는 전주 이씨 사공(司空) 한(翰)의 계대이다.  ‘경주이씨 상세 실전계‘에 기록된 계대는 이와는 다르게 아래와 같습니다.

 시조부터 직계 계대로 ---(34)長子 희두 -(35)계 -(36)소판공 거명(居明) 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지는데 여기에서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이는 전주 이씨 시조 한(翰)의 세계(世系)는 시조 34세 희두(禧斗)의 동생인 진두(辰斗)에서 비롯되니 아래와 같습니다.

 

'慶州李氏 上世 失傳系' -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P304-305의 기록은 -(34)長者 희두 -(35)계 -(36)거명 -(34)次子 진두- (35)백전- (36)長子 공(恭). 次子 한(翰)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합천이씨 세보에는 전주 이씨 시조 사공공(휘 한)이

시조 34세 진두의 증손자로 36세 恭의 아들로 시조 37세  한(翰)으로 기록된 반면에 경주이씨 실전계에서는 34세 진두의 손자 즉 시조 36세 恭과 형제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상이(相異)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합천이씨 세보에는 전주이씨 시조 한(翰)이 경주이씨 중시조 거명(居明)과 7촌 숙질간으로 기록한 반면 경주이씨 대종보에는 6촌 형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공공 한(翰)의 계대는 아래 같이 계대가 이어집니다.

 -(36)한(翰)- (37)자연(自延)- (38)천상(天祥)- (39)광희(光禧)- (40)입전(立全) -(41)긍림(兢林)- (42)염순(廉順) -(43)승삭(承朔).

 

위의 본문 글에는 합천이씨 세보의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발견으로 경주이씨에서는 그 세수를 시조부터 읽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현재도 시조로부터의 세수는 헤아리지 않고 중시조(휘 거명)을 1세(世)로 세수를 읽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입니다.

 (설명)

 

합천이씨 세보에 기록된 35대 실전세계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중시조 세수를 헤아려 왔는데 이 실전세계의 발견으로 시조부터 세수를 읽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경주이씨 종친들이 시조 세수로 '나는 시조 75세이다.'라고 말하고 읽는 것을 보면 한 때 시조로부터의 세수를 누구나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경주이씨 대종보에는 이 35대로 된 실전 세계가 분석한 결과 신라 관직명이 아닌 고려와 중국 관직명으로 기술되고 내용상 맞지 않은 연대차이 등 많은 오류로 인하여 정확히 고증할 수 없는 실전세계인고로 이 계대는 다만 참고로만 한다고 하였으므로 지금은 부정확한 시조 세수는 읽지 않고 보다 정확한 계대인 중시조 세수로 계대를 읽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때가 AD. 742年~756年 이다.]

 (설명) 전주이씨 시조 한(翰)이 태어난 시기를 서기 742년에서 756년으로 추증하는 모양입니다.

 시조 34세 희두와 진두가 활동한 신라왕이 헌안왕과 경문왕조이고  시조 35세 계와 백전. 힐지가 활동한 시기를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조이며 36세 거명과 공과 한이 활동한 시기가  진성왕. 효공왕조입니다.

 시기별로 보면 헌안왕 AD 857-860. 경문왕 861-874. 헌강왕 875-885. 정강왕 886. 진성왕 887-896. 효공왕 897-911년입니다. AD 742-756년은 경덕왕 1년에서 15년까지로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과 전주 이씨 시조 한(翰)이 형제 항렬이면 진성왕과 효공왕조가 AD 887-911에 활동한 인물로 근 100년 이상의 차이로 위의 서기년도는 잘못 기술한 것 같습니다.

 

[시조 이한(李翰)은 경주이씨 시조(慶州李氏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7세손으로 하는 것이다.]

 (설명) [전주이씨 시조 이한(이한)은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의 37세손]에서 ‘37세손‘은 36세손의 오기이다.

 이는 합천이씨 세보에 기록된 대로 전주 이씨 시조 한(翰)을 시조 36세 공(恭)의 아들로 세수를 읽어 시조 37세로 읽은 것이고 이를 ‘世와 代는 異義’ 논법 즉 세와 세손을 같이 읽어 37세손으로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世와 世孫은 그 뜻이 엄연히 다른데 37세를 37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는 것은 잘못입니다.

 世孫은 맨 윗대 조상 기준으로 기준은 헤아리지 않고 다음 아랫대(아들)를 1세손. 다음 아랫대(손자)를 2세손. 다음 아랫대(증손자)를 3세손...등으로 아래 후손을 ‘기준의 몇 세손’으로 읽을 때 世孫으로 읽습니다.

 이로 보면 사공(司空) 한(翰)은 경주이씨 시조 37세로 36세손(36대손)으로 읽어야 합니다.

 만약 중시조 36세이면 35세손(35대손)으로 읽어야 하고....

 

[하지만 위 사실로 유추해 본다면 경주이씨는 신라 말 고려 초 동해물가(지금의 우리나라 경주)로 이주해 오면서 *처음으로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명) [경주이씨가 신라 말 고려 초 동해물가(지금의 우리나라 경주)로 이주] 라는 표현은 잘못되었습니다.

 본디 신라 천년의 도읍지는 경주입니다.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휘 알평)은 신라 6촌 촌장과 6부 대인으로 경주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신라 건국 좌명공신으로 그 후손이 신라가 망할 때까지 대대로 경주를 생활 근거지로 한 것이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닙니다.  

 신라 1000년 동안 시조부터 중시조 소판공까지 경주지방을 생활 근거지로 세거했던 것이지 다른 곳에서 살다가 경주로 이주했던 것으로는는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려 초에는 도읍지가 개성이니 고려 조정에 벼슬을 한 조상님은 경주에서 개성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더 짙습니다. 이유는 소판공 손자인 중조 3세인 중원태수공(휘 금서金書. 호부랑중)께서

고려에 처음으로 벼슬하였기 때문에 경주에서 개성으로의 이주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덧붙입니다.

 

중시조(소판공)부터 계대를 알게 된 경위는 고려 말 익재 문충공의 묘지명(고려 말 야은野隱 이색찬李穡撰)을 발견하였고 그 묘지명에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부터 익재공까지 17세의 계대 기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태로던 기록이 있었기에 익재 문충공의 묘지명에 신라 말 소판공(휘 거명)부터 익재공까지 약 500년간의 직계 계대를 알았을 것이고 그것을 묘지명에 각자(刻字)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신라 말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부터 족보는 아니더라도 세계표(世系表) 정도는 보존하여 그 계대를 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 하건데 이분의 손자 한(翰)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 

 (설명) 경주 이씨 대종보 상세 실전계(35대로 된 실전 세계)에는 위 행적의 기록 문장이 없습니다.

 이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 기록된 내용인 것으로 보입니다.

 [한(翰)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기록한 것 같습니다.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형제가 아닌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이상하다.]

 (설명) 아래와 같이 덧붙여 이해를 돕습니다. 내용은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상세 실전계(大宗譜總編上世失傳系)에는 

 -(34)長子 희두 -(35)계 -(36)거명 -(34)次子 진두(辰斗)- (35)백전(白全)- (36)長子 공(恭). 次子 한(翰)으로 기록하고

 분적종 합천이씨(陜川李氏)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長子 희두 -(35)계 -(36)거명 -(34)次子 진두 -(35)백전 -(36)공 -(37)한(翰)으로 계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주이씨 대종보에는 전주이씨 한(翰)을 시조 36세로 기록하여 공(恭)과 한(翰)을 형제로 기록하고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과 6촌 형제로 한 반면 합천이씨(陜川李氏)세보에는 공(恭)을 시조 36세. 한(翰)을 시조 37세로 기록하여 부자간으로 하여 소판공과 7촌간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姓)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등이 있습니다. 이 성들은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全州李氏가 경주이씨 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설명) 합천이씨(陜川李氏). 평창이씨(平昌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차성이씨(車城李氏) 등은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것이 기록 등 정황이 말해주고 있어 정확하다고 볼 수 있으나 전주이씨는 분적된 기록이 없고 단지 경주이씨 상세 실전계와 합천이씨 상서공파세보에서 ‘李翰’의 족보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순수한 신라 사람으로 옛날 기록이 있고 사실여부가 명확하지 않지만 중간에 발견된 경주이씨 실전세계에 사공공의 기록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는 연구해볼만한 일입니다.

 

[또 그 기록이 한(翰)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34세 辰斗)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더욱 이상하다.]

 (설명) 35대로 된 상세 실전계의 시조 36세 이한의 족보 기록과 합천이씨 세보의 실전세계의 이한 기록이 시조 37세로 기록되어 있고 이한의 약력기록이 조부인 34세 휘 진두의 행적난에 기록되어 있는 점은 기록에 의혹이 있어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확인을 해 보았으나 합천이씨 세보에는 다른 기록은 없고 -(34)長子 희두 -(35)계 -(36)거명 -(34)次子 진두 -(35)백전 -(36)공 -(37)한(翰)으로의 계대만 기록하고 있어 더 확실한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즉 시조 37세인 이한의 기록이 증조부인 34세 휘 진두의 행적난에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은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설명)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조건 사대모화(事大慕華- 큰 나라 중국을 섬김) 사상에 의한 야사적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세직(世稷-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설명)  위의 글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찾아보았으나 알지 못하였습니다. 추측컨대 전주 이씨 조상 중에 세직(世稷- 世直)이 있고 ‘世’자가 들어 있으니 당태종 世民의 ‘世’자와 결부시켜 같은 항렬자로 보아 황제의 친척으로 보고 위상을 높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중국 윗대 조상은 이세직에 이른다는 말일 것 같습니다. 사공공 이한은 신라 말경의 인물이고 이세직은 그보다 훨씬 빠른 당태종 시절이니 신라통일기 전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당태종 李世民 시절에는 황제의 이름자를 일반국민들이 생활에서 바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世’자가 들어 있는 백성들의 이름을 모두 다른 글자로 바꾸거나 빼어 버렸습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자를 피하려다 보니 역사서 *‘수서(隋書-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 당태종 때 편찬)’를 편찬할 때 왕세충(王世充)을 왕□충(王□充)이라고 세(世)자를 공백으로 남겨 놓았고 또한 공신 연국공 이세적(李世勣)도 이적(李勣)이라고 世자를 빼고 바꾸어 기록했습니다. 여하간 전주 시조 이한을 당나라 때 [세직(世稷. 世直)]관 관련시킨 것도 황실의 위엄을 더하여 위상을 높이려는데 연유한 것으로 추축됩니다.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중조 40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전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 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우리의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설명) 윗글의 결어입니다.

 사공 한이 경주이씨의 후예라면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집안이고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 휘 거명과 전주이씨 사공공 휘 한을 동항렬로 본다면 6촌 형제간으로 연대는 비슷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이 애매하고 불분명하여 단언할 근거가 없어 규명할 수 없으므로 후일 밝혀질 때를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는 뜻입니다.

 

 

 

◆ 중국 귀화인 설

 

1)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

 이 글에서는 본래 이씨는 중국고유의 성씨로써 중국인이다.

 전주란 송나라 전주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 全州李씨가 본래 중국인으로써 당(唐)나라 대에는 황실의 일족이 되었고 일부는 신라로 또한 일부는 그 이후 고려 때 귀화하여 많은 분파를 이루게 되었으나 모두가 원래 중국인들이며, 완산인이 된 것은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 ‘[전주이씨] 성씨의 진실’ 이정기 님 끝 부분에「우리 全州李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①그런데 문제는 전주이씨 측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사대주의로 이익을 본 가문이라면 굳이 감출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조선시대에 당당히 중국의 당 황실 후예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스럽다.

 

②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에서 연유한 야사적 기록이라 세직(世.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③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세직(世稷-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전주이씨 측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사대주의로 이익을 본 가문이라면 굳이 감출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조선시대에 당당히 중국의 당 황실 후예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스럽다.

 (설명) 가문의 뿌리를 두고 시조를 중국인으로 하자니 한민족의 반감이 있을 것이고 경주 이씨로 하자니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의 정치적 입지에 중국의 입김이 무서울 것은 뻔할 것입니다. 이조 500년간 사대주의의 이익을 본 것은 이씨 왕조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당 황실의 후예임을 왜 드러내지를 못하였는가를 하는 점입니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에서 연유한 야사적 기록이라 세직(世稷.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설명) 전주 이씨의 윗대 조상을 중국 당태종 때 이세직(李世稷. 世直)으로 하고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같은 ‘世’자 항렬이니 당의 종실로 보아 중국황실과 관련을 맺어 그 위상을 높이려고 한 것 같이 보입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세직(世稷-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

 (설명)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위의 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세직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전주에 세거한 것이 세대로는 ‘광희공’에 해당한다는 말일 것 같은데 그러면 시조가 세분이나 되어 종잡을 수 가 없게 됩니다..당 태종시절 이세직을 시조로 보는 것. 신라말 중국에서 건너온 사공공 이한을 시조로 보는 것. 나머지는 전주에 세거하여 시조가 된 광희공입니다.

 전주이씨의 시조 한(翰)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시조가 되었다면 굳이 광희공 운운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광희(光禧)공은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3세손이고 시조 4세이며 경주이씨 실전세계로는 시조 39세입니다.

 중국 당나라 이세직(李世稷)은 훌륭한 인물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당대의 은둔 군자인데 아들 8명을 두었지만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기 전후 사람으로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 때 사람으로 우리나라로는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사람으로 경주이씨 실전 세계(失傳世系)로 말하면 시조 23세 문정공(文貞公) 휘 우영(友榮) 전후의 사람입니다. 전주이씨 4세 광희(光禧- 경주 이씨로는 시조 39세)는 시조 38세 중원태수공(中原太守公.휘 金書)과는 5촌 숙질간으로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시점으로 당의 이세직과는 250-300년의 차이가 납니다.   고로 전주이씨는 이세직의 후손으로 300년 후에 우리나라로 건너와서 전주에 세거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2) 완산실록(完山實錄)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을 뒷받침하고 있다.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전주이씨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 목조 이안사 이전의 사적 기록 전무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翰)이다. 태조 이성계(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이한(翰)의 21대손(세손)이다. 그러나 이성계(成桂)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안사(安社)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 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行里- 이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이춘(椿- 이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이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이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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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 이한 유래

자료출처 : http://blog.naver.com/ewwiz/29393830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翰)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安社)는 원래 전주(全州)사람이었는데, 그 곳 지주(知州:지금의 지사)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 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 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바다 건너 간도(間島) 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춘(椿: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의 벼슬을 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元)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영흥)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彊)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成桂)는 영흥(永興)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때부터 고려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게 되었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가 왕자대군(王子大君:적자)과 왕자군(王子君:서자)을 파조(派祖)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李太祖)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18세) 이전의 분파(分派)로는 시조 한(翰)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琚)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分派)로는 안사(安社)의 아들인 안천(安川) · 안원(安原) · 안풍(安豐) · 안창(安昌) ·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行里)의 아들인 함령(咸寧) · 함창(咸昌) · 함원(咸原) · 함천(咸川) · 함릉(咸陵) · 함양(咸陽) ·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椿)의 아들인 완창(完昌) · 완원(完原) · 완천(完川) ·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子春)의 아들이자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豐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도합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대군 · 74군)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왕족(王族 · 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 왕비 · 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외척)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거의 끊일 사이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그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내지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어왔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名家)는 밀성군파(密城君派:침, 세종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의 대제학(大提學: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벼슬)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후생,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의정부의 으뜸벼슬, 정1품)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政丞)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여, 세종의 제5자),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무생, 정종의 아들) 정승1명과 많은 문 · 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보, 태종의 제2자)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선생,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阮君派:초, 선조의 생부)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하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 덕춘군파(德泉君派) · 밀성군파(密城君派) ·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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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정보 사이트 내용

 자료출처 : http://www.surname.info/i/jeon_ju.html

             

시조(始祖) : 이한(李翰)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翰)이다.
  태조 이성계(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이한(翰)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이성계(成桂)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안사(安社)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 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行里, 이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이춘(椿,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이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이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嫡)과 왕자군(王子君,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 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安社, 18世)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 ·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 ·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 외척(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 三議政) 22명, 문형(文衡, 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 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 정2품 벼슬)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 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여(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무생(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 ·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보(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 선생(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초 , 선조의 생부(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출처 :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9세손 문욱공종회
글쓴이 : 장의 (신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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