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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車城)지명(地名)

[스크랩] 기장군의 역사적 유래 및 연표,수난시대

기장군의 역사적 유래 및 연표,수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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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boolingoo  (2006-03-17 16:47) 신고하기 | 이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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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機 張 郡 의   歷 史 的 由 來

 

아득한 옛날 원삼국시대 기장은 부족국인 거칠산(居柒山)국에 속해 있었다. 거칠산국은 지금의 황령산(荒嶺山)쪽을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독노국, 장산국 또는 내산국등으로 표기하는 곳이 이 지역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서기 57∼79년 사이 신라 제4대 석탈해왕 때 거도(居道)장군이라는 장군이 장토야(張吐野)라는 들판에서 말놀이를 하므로 주민들은 해마다 하는 행사라고 여기고 또한 그를 마숙이라고까지 칭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사를 일으켜 거칠산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 멸망된 땅에 서기 505년 신라는 제22대 지증왕 6년에 와서 한곳은 거칠산국(居柒山國) 또 한곳은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 그리고, 한곳은 대증현으로 각각 고을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최초에 고을이 탄생됐다.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와서 전국적으로 고을의 이름을 한자로 개칭할 때, 거칠산군은 지금의 東來로 갑화양곡현은 기장(機張)으로 개칭되었다. 갑화양곡현으로 존속한 기간이 252년, 기장으로 불러진 이래 지금까지 1243년이다. 고을이 생긴 이후 무려 천오백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機 張 郡   年 表

 

시 대

연 도

역사상의 주요내용

원삼국시대

 

거칠산국(居柒山國)이란 부족국가에 속하였으며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
서기 57∼79년(신라 4대, 석탈해왕 재위)에 신라의 거도(居道) 장군에 의해 멸망, 신라에 편입 

신라

505(지증왕 6년)

갑화양곡현 설치(고려사 권 57 지리 11)

통일신라

757(경덕왕 16년)
 

기장현으로 개정 - 동래군의 영현이 됨.
기장은 신라 9주(州)중에 삽량도에 소속됨

고려


1018(현종 9년)

1304(충렬왕 30년)
1391(공양왕 3년)

고려시대에는 감무(監務)를 배치
울주의 영현이 되고 별호를 차성이라 함(고려사 권11 지리 2)
고려사에 비로소 등재
양산군의 영현이 됨.
기장군으로 개칭 - 주현

조선

1394(태조 3년)

전국을 팔도로 개편시 경상도 기장현으로 존속, 4주, 4대도
호보, 30목, 44도 호부, 82군, 175현을 두었을 때 기장현은 175
현 가운데 존속하였다.

1413년(태종 13년)

기장현에 현감을 배치하였다.
기장현으로 개칭 - 주현

1415(태종 15년)

기장현감을 지현사로 삼음 - 4품이상 관을 파견함

1456(세조 원년)

기장이 동래진의 좌익이 됨

1519(중종 14년)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누고, 그 후 수차에 걸쳐 2도의 분할이 거듭될 때 기장은 경상좌도에 속하였다.

1592(선종 25년)

임진왜란으로 기장읍성이 점령당함

1593(선조 26년)

기장성 등을 수복함

1599(선조 32년)

기장현이 폐현됨 - 남쪽은 동래현에 이속, 북쪽은 울산군에 편입되어 울산군의 하미면이 됨

1617(광해군 9년)

기장현의 복원(폐편된지 18년만에 복군)

1653(효종 4년)

기장현감 강유후가 상소하여 54년만에 울산군에 소속된 하미면을 다시 찾음. 그러나 7년 후에 하미면은 다시 울산군에 합속

1681(숙종 7년)

당시의 기장현감이었던 신담과 고을에 덕망있는 김상남, 김의창의 진소로 다시 21년만에 울산군의 하미면이 기장현으로 복귀되었다. (경상도읍지의 기장현)

1895(고종 32년)

을미개혁으로 동래부의 기장군으로 개명되고 읍내면, 동면, 남면, 중북면, 하서면, 하북면, 상서면, 상북면을 둠

일제

1914. 3. 1

경상남도 도령 제1호로 동년 4월 1일 기장군 폐지, 동래군에 속하여 동래군에 속하여 기장면, 장안면,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 5개면으로 개편

해방이후
현재

1973. 7. 1
1980.12. 1
1985.10. 1
1986.11. 1

1995. 3. 1

법률 제 2597호에 의하여 동래군이 폐지되고 양산군에 병합
기장면이 기장읍으로 승격
장안면이 장안읍으로 승격
양산군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기장읍, 장안읍,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 5개읍면을 관할
부산광역시 기장군 설치됨

 

機張郡의 수난시대

 

1) 고려시대(왜구의 침입과 노략질)

기장은 신라변방에 속한 지역이므로 멀리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왜구(倭寇)의 침탈을 무수히 당해온 곳이다. 신라, 고려, 근세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왜구가 노략질을 해 왔다. 고려시대의 기록을 잠깐 소개를 하면 왜적이 울주, 청도, 밀양, 자인, 언양등지에 침입하자 우인렬(禹仁烈)은 배극렴(裵克廉), 하을지(河乙沚), 오언(吳彦) 등과 함께 울주에서 싸워 적10명을 죽이고 병선7척을 나포하였다. 울주에 침입하여 벼를 베어 양식으로 하고, 기장까지 침입하였으므로 우인렬이 군대를 모집하였다. (고려사 권114열전 우인렬전)

고려 1년∼2년 사이에는 11월에 왜구가 명진현에 침구하였고, 또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영선 등의 고을을 불지르고 노략질을 하였고, 12월에는 합포현에 침구해 불사르고 양주, 울주, 의창, 회원, 함안, 진해, 고성, 동평, 동래, 기장들의 현민을 죽이고 불살랐다고 하였다(고려사권 133열전)

 

2)조선시대

(1) 왜구의 침입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조 5년 8월 9일 1397년 왜적의 배가 120척이 경상도에 입구(入寇)하여 병선 16척을 탈취해 가지고 수군만호(水軍萬戶) 이춘수(李春壽)를 죽였으며, 동래, 기장, 동평성이 함락되었다. (조선태조 실록 태조 5년 8우러 9일조) 이렇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수없이 많은 왜적의 침탈이 빈번하였다.

 

(2) 임진왜란과 기장

한반도 남단의 한곳인 기장은 부산동래와 함께 바다의 관문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침략군의 제2군 가등청정(加 淸正)군은 22,800명의 병력으로 동래, 기장, 언양, 울산으로 진격해 갔다.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자 기장현감은 군졸을 모아 동래성 수복을 위해 준비중,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지금의 일광면 조전리로 도망치다시피 후퇴해 버렸다. 1653년 선조26년 6월경에는 지금의 기장읍 죽성리에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왜성(倭城)을 쌓고 한때는 8000여명이 주둔하였다 한다. 기장지역은 7년간의 전란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계속하여 왜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 기장현은 현민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남녀노소가 입은 피해는 형언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장은 저 삼한 이래로 왜구의 침략과 침탈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제일선에서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으니 기장사람들은 조상때부터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자기생존에 대하여 절망속에서도 끈기있게 목숨을 부지해 온 강인한 정신력이 없이는 어찌 오늘까지 유지해 왔겠는가? 그러므로 기장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3) 기장의 폐현

임진란의 결과로 기장은 왜군의 본 거지가 되었기에 현청(縣廳)도 없었고 현감도 없었고, 향리도 없었고 백성들은 산 속 깊이 피난하였다. 전란이 끝나자 기장현(機張縣)은 극심한 피해로 독립된 현(縣)으로 유지될 수 없었고, 전란 때 현감(縣監)이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였다는 문책으로 기장현은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32년(서기 1599년)에 폐현이 되어 버렸고, 동래부도 동래현으로 강등되었다. 폐현된 기장(機張)은 두 조각으로 나뉘어 남쪽은 동래현에 편입되고 북쪽은 울산군에 편입되어 기장현은 없어졌다.

 

(4) 임진란과 기장의 의병활동

임진란 7년동안 현감도 도주하고 관군도 힘없이 흩어질 때 기장에서는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지금의 철마면에서 김일개(金一介), 김일덕(金一德), 김일성(金一誠), 오홍(吳鴻), 오춘수(吳春壽)등이 의병을 일으켜 기장현 수복을 위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많은 의병들이 항의토적을 외치며 싸웠던 것이다. 울산, 경주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과도 연락하고, 협력하여 기장의 왜병을 소탕하는데, 경울간의 박홍준 의병장과 김득복(金得福)의병장도 수차에 걸쳐 동래와 기장 수복전에 직간접으로 호응하여 왜병퇴치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외도 많은 의병들의 전공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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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기타]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ijang_sunan.htm
출처 : 백두산족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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