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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車城)지명(地名)

[스크랩] 차릉(車陵)에 관한 소고(小考)

차릉(車陵)에 관한 소고(小考)

 

  목차:

    1. 차릉에 대한 일반적 기술

    2. 차릉에 대한 차문의 기술

    3. 구체적인 사항들

      3-1. 지명 차성(車城)

      3-2. 삼국사기 제10권 소성왕(昭聖王) 기사

      3-3. 삼국사기 제10권 애장왕(哀莊王) 기사

      3-4. 차건신(車建申)

      3-5. 차씨

    4. 종합 토론 및 맺는 말



1. 차릉에 대한 일반적 기술


1-1. 엔사이버 백과사전


차건신의 묘 (車建申의 墓)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신라시대 재상 차건신의 묘. 

소재지 : 부산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산 72

시대 : 신라시대

분류 : 묘


1985년 11월 7일 경남문화재자료 제158호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해제되었다.

차릉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39대 소성왕이 어린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가 불안하여

늙은 재상인 차건신에게 태자를 부탁했다. 어린 애장왕의 보상(輔相)이 되어 정사를

돕다가 죽으니 왕의 예로서 장례를 지냈다.


소성왕의 묘에 배향하고 묘는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정했다 한다. 한편 이 묘를

이위의 묘라고 후손들이 주장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2000년 현재 차씨 집안에서 조상의

묘로 관리하고 있다.


만화리 주민들은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차건신은 큰 공신으로서 백성들에게

추앙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수호신으로 숭배된 듯하다. 또 옛날부터 이 묘소에

벌초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었다 한다.


1-2. 기장군 홈페이지


차건신의 묘는 기장읍 만화리에 있는 고분이다. 신라39대 소성왕이 어린 태자에게 위를

물려주기가 불안하여 늙은 제상[재상의 잘못일 듯]인 차건신에게 유언을 남기니 즉위한

12세의 상장왕[애장왕의 잘못]의 보상이 되었다.


그 후 공이 죽으니 왕의 예로서 장례하고 소성왕묘에 배향하고 묘는 이곳에 정하였다.

그리고 기장을 차성으로 성격[승격의 잘못?]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 묘를 두고 33세의 이위의 묘라고 후손들이 주장하기도 해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지금은 차씨 집안에서 조상의 묘로 관리하고 있다.


어쨌든 만화리 사람들은 이곳에 먼저 동신제를 드리고 그 다음에 당산제를 거행하는

것으로 관행을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묘는 옛날 나라의 큰 공신으로서 백성들과

고을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사후에도 수호신으로 숭배를 받게된 분의 묘로 추정된다.


차릉으로 불리는 이곳 차건신의 묘는 누구의 묘로 중요성을 갖기보다 이곳이 고대부터

마을사람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는 데 더 의미를 두는 사람도 많다. 옛부터 차릉에

먼저 벌초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를 이룬다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런 의미는

더욱 확실해 진다고 할 수 있겠다. 잘 다듬어진 이곳도 한번쯤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2. 차릉에 대한 차문(車門)의 기술


- 차문의 현존 선조 묘소 중 가장 오래된 묘소.

- 신라 조정에 의하여 왕례(王禮)로서 봉안(奉安)하였기 때문에 세칭 차릉으로 불림.

- 차무일(車無一) 득성시조(得姓始祖)의 32세손 이신 신라 승상공(丞相公)

차건갑(車建甲)의 묘소

- “공께서는 신라 39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노재상(老宰相) 이셨는데

소성왕(798-800)이 운명 직전에 공(公)을 불러 옛날 중국의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조회를 하면서 여러 제후(諸侯)들을 이끄는 그림을 친히

하사 하시며 열두 살에 불과한 세자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왕이 붕어(崩御)하자 세자(世子)가 왕위에 올라 40대 애장왕(哀莊王) (800-809)이

되고 공(公)께서 보상(輔相)으로서 모든 국사를 섭정하시다가 돌아가시니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하시니} 왕을 비롯하여

조야가 모두 슬퍼하며 왕명으로 국상을 치루고 모든 행사를 왕례(王禮)에 준하도록

하였으며 기장군 만화동에 안장하고 소성왕묘에도 임금과 같이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신위도 소성왕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왕명으로 기장현을

차성(車城)으로 승격시켰다.”

- “옛 기장군지에 의하면「차릉은 기장현 북쪽 5리지점 만화동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2001년 9월 3일자 발간된 기장군지의 상권에「차릉은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이러한 고증(考證)에 따라 행정 구역이 경상남도 기장군으로 있을 때 기장군

문화재의 가치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문화재 조사자료 등록번호 제158호로 등록된바

있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고 있다.”


한편 “연안차씨 대동보 백서: 부록”(2004년 12월)에 차릉에 대한 고증자료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시되어 있다. (한문 글들은 필자가 해석함.)


① 동래군지(東萊郡誌)

  “차릉이 동쪽 30리에 있다. 차건갑은 신라 애장왕의 섭정이었다. 따라서 왕례(王禮)로

장사지냈다.”

  * 동래군지-권지사(卷之四) 1899년 편찬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를 근간으로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간행한 지리지.

② 기장읍지(機張邑誌)

  “차릉이 현의 북쪽 5리에 잇다. 신라 애장왕 때 승상 차건갑이 죽으니 큰 공훈이 있어

국가왕례(國家王禮)로 이에 장사를 지냈다.”

  * 지리지-읍지20 경상도4 (1832년쯤 간행 추증(추정의 잘못인 듯))

③ 경주읍지(慶州邑誌) 하(下)

  “차건갑이 신라 소성왕을 받들었다. 왕이 친히 주공(周公)의 성왕을 업고 제후를

조회(朝會)하는 그림을 보여주며 태자를 부탁했으니 애장왕이 어렸기 때문이다. 애장왕이

즉위하고 공(公)은 보상(輔相: 대신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고

죽으니 왕례로 기장 만화동(萬化洞)에 장례를 지내고 차릉이라 불렀다.”

  * 지리풍속지-경주읍지권지팔(卷之八)

④ 교남지(嶠南誌) [교남 = 영남을 뜻함]

  “차건신묘는 일광면(日光面) 만화리(萬化里)에 있다. 신라태사가 소성왕의 고명(顧命: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을 받든 신하로서 주공이 성왕을 업은 그림을 받았다.

죽으니 왕례로 장사지냈다. 세칭 차릉이라 한다. 현의 이름인 차성이 여기서 나왔다 한다.”

  * 지리풍속지-교남지4권 권지50의 기장읍편(1867~1875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金世鎬)

편찬)

⑤ 경주시지(慶州市誌)

  “차건갑 및 차승색: 차건갑은 소성왕을 섬김에 왕이 주공부성왕조제후도

(周公負成王朝諸侯圖)를 친수(親授: 친히 줌)하였더니 왕의 붕시(崩時, 죽을 때)

태자(애장왕)가 유충(연소함, 13세)하였으므로 애장왕조 건갑이 보상(輔相)으로서 죽음에

[‘죽으매’의 잘못] 그 식읍(食邑) 차성(기장)에 왕례로 장(葬)하였다.”

  * 경주시지-제4편 31장 상신(相臣)


그리고 이런 자료 외에도 동경잡기(東京雜記), 양산군지(梁山郡誌), 기장군지(機張郡誌),

기장의 역사와 문화(기장군 문화원), 구(舊) 기장군 향토지(기장 향인회) 등에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차건갑(건신)의 보상, 섭정 같은 역할이 명시되어 있고 기장이 그의 식읍(食邑)이었다는

말도 추가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예외 없이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3. 구체적인 사항들


3-1. 지명 차성(車城)


차성(車城)은 두 지역을 가리킨다. [“한국역사지명사전”]

  A. 경기도 수원(水原) 남쪽에 있었던 용성현(龍城縣)의 신라시대 이름.

  B. 경상남도 기장(機張)의 옛이름.


기장(機張)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현(縣) 이름.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기장면(機張面) 지역에 있었다. 본래 신라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기장현으로 고쳤다. 조선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에 동래군(東萊郡)에 편입되어 기장면이

되었다가 뒤에 양산군에 이속되었다. 차성(車城).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위의 차문(車門)의 설명처럼 기장(機張)을 차성(車城)으로 ‘승격’시킨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덕왕이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현(車忽縣)이라 불리던 지역을

차성현(車城縣)으로 ‘개칭’한 일은 있지만[“삼국사기” 제35권, “고려사” 제56권], 이것은

기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수원 남부에 해당하는 용성현의 이야기이다. 기장의 설명에

나오는 차성은 항상 “별호(別號, 딴이름)를 차성이라고 한다”고 나온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장현

항목]. 곧,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명으로 바꾸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수원 남부 지역은 ‘차성’으로 바뀌고, 기장은 다른 이름에서 그 이름(‘기장’)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기장을 왜 ‘차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차문(車門)의 설명대로 차건신이라는 인물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홈페이지가

자세히 논하고 있다: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ijang_gojangmyong.htm


이에 따르면 기장은 처음 이름인 갑화량곡(甲火良谷)이나 차성(車城), 그리고 기장(機張)이

모두 ‘큰 성, 큰 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甲火良谷이나 車城, 그리고 機張이라는 지명은 甲은 크다로서 大, 火良은 벌로서

城이므로 甲火良谷은 큰성의 뜻으로 大城이라 번역되고, 車는 수리(정수리)로서 首, 城은

벌로서 城이므로 車城은 으뜸되는 큰성 머리성의 뜻으로 首城으로 번역되고, 機는

‘크다’로서 대(大), 張은 [‘벌’]로서 [마을(城)]이므로 ‘큰 성’의 뜻으로 機張은 大城으로

번역된다.”

    

  “차성은[‘차성’의 ‘차’는] 수레로서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서라(徐羅) 등과

같이 모두 수리(首)의 뜻을 가졌다. 즉 車는 首와 같은 뜻으로 수레는 수리로서

정수리(首)의 옛말이 된다.”

 

이런 설명은 타당성이 무척 큰데, 이는 용성현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곧 학자들은

용성현의 고구려시대의 명칭인 차홀(車忽) 혹은 상홀(上忽)이 모두 ‘수릿골’로

훈독(訓讀)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제2권의 문호왕 법민(文虎王 法敏 = 문무왕)편에 “속(俗)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차의(車衣)는 ‘수리’의 차자(借字)로 본다. 곧

차홀(車忽)이나 차의(車衣)는 모두 우리말 명칭을 한자로 임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車자는 그 뜻이 수레와 직접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수레’의 차자) 없을 수도

있다(‘수리’의 차자). 한편 이상에서 車자는 모두 역사학자들도 사람에 따라 ‘차’로도 읽고

‘거’로도 읽는다. 여기서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려고 빌려 쓴 글자일 따름이기 때문에

한자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장의 차성(車城, 거성)이라는 별호(別號)는 차씨와 연관을 짓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3-2. 삼국사기 제10권 소성왕(昭聖王) 기사


○ 昭聖王(소성[또는 昭成(소성)]왕)이 즉위하니, 諱(휘)는 俊邕(준옹)으로,

元聖王(원성왕)의 太子(태자) 仁謙[인겸:諡(시) 惠忠(혜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金(김)씨요, 비도 金(김)씨, 桂花(계화)부인이니 大阿飡(대아찬) 淑明(숙명)의 딸이다.

元聖大王(원성대왕) 원년에 아들 仁謙(인겸)을 봉하여 太子(태자)를 삼았는데 7년에

죽으니, 元聖(원성)이 그의 아들[俊邕(준옹)]을 宮中(궁중)에서 길렀다. 俊邕(준옹)은

[元聖王(원성왕)] 5년에 唐(당)에서 奉使(봉사)하고 대아찬의 位(위)를 받앗으며, 6년에는

波珍飡(파진찬)으로 宰相(재상)이 되고, 7년에는 侍中(시중), 8년에는 兵部令(병부령),

11년에는 태자가 되었다가 元聖(원성)이 돌아가자 그 位(위)를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 원년 3월에 菁州[청주:州治(주치)는 지금의 晉州(진주)]의 居老縣[거로현:지금의

巨濟(거제)]으로 國學生(국학생)의 祿邑[녹읍:食邑(식읍)]을 삼았다. ○ 冷井縣令(냉정현령)

廉哲(염철)이 白鹿(백록)을 進上(진상)하였다. ○ 5월에 아버지 惠忠太子(혜충태자)를

追封(추봉)하여 惠忠大王(혜충대왕)이라 하였다. ○ 牛頭州都督(우두주도독)이 사람을

보내 (王(왕)에) 말하기를, "소와 같은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가량에 털은 없고 코는 긴데, 峴城川(현성천)에서 烏食壤(오식양)으로

향하여 갔다"고 하였다. ○ 7월에 (길이) 9자나 되는 人蔘(인삼)을 얻어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신을 唐(당)에 보내 그것을 進奉(진봉)하였는데, 德宗(덕종)은 인삼이 아니라

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 8월에 어머니 金(김)씨를 추봉하여 聖穆太后(성목태후)라 하였다.

○ 漢山州(한산주)에서 흰 까마귀[白烏(백오)]를 獻上(헌상)하였다.

○ 2년 정월에 왕비 金(김)씨를 봉하여 王后(왕후)를 삼고, 忠芬(충분)으로 侍中(시중)을

삼았다. ○ 4월에 暴風(폭풍)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리며, 瑞蘭殿(서란전)의

발[簾(염)]이 날려 간 곳을 모르고, 臨海(임해)·仁化(인화)의 두 門(문)이 무너졌다. ○ 6월에

王子(왕자)를 封(봉)하여 太子(태자)를 삼았다. ○ 왕이 돌아가니 諡(시)를 昭聖(소성)이라

하였다. 


3-3. 삼국사기 제10권 애장왕(哀莊王) 기사


○ 哀莊王(애장왕)이 즉위하니, 諱(휘)는 淸明(청명), 昭聖王(소성왕)의 太子(태자)요,

어머니는 金(김)씨, 桂化(계화)부인이다. [王(왕)의] 卽位時(즉위시)의 나이 13세이므로,

阿飡(아찬) 兵部令(병부령) 彦昇[언승:王(왕)의 叔父(숙부)]이 攝政(섭정)하였다. ○ 처음

元聖王(원성왕)이 돌아갔을 때 唐(당)의 德宗(덕종)은 司封郞中兼御史中丞(사봉랑중겸어사

중승) 韋丹(위단)을 持節使(지절사)로 보내어 弔慰(조위)하게 하는 동시에 嗣王(사왕)

俊邕(준옹)을 책봉하여 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을 삼게

하였는데, 韋丹(위단)이 鄆州(운주:지금의 山東省(산동성)에 이르렀을 때 嗣王(사왕)이

돌아갔음을 듣고 도로 歸還(귀환)하였다. ○ 7월에 왕은 이름을 重熙(중희)라 고쳤다.

○ 8월에 앞서 入唐宿衛學生(입당숙위학생)인 梁悅(양열)에게 豆肹(두힐[縣(현)])

小守(소수)를 임명하였다. ○ 처음 德宗(덕종)이 奉天[봉천:지금의 陜西省(섬서성)

乾縣(건현)]에 避難[피난:長安(장안)의 軍亂(군란)]하였을 때 梁悅(양열)은 從難(종난)의

功(공)이 있어, 帝(제)가 右贊善大夫(우찬선대부)의 職(직)을 주어 돌려보냈으므로 왕이

이 때 擢用(탁용)하였던 것이다.

○ 2년 2월에 왕이 始祖廟(시조묘)에 拜謁(배알)하였다. ○ 太宗大王[태종대왕:武烈왕

(무열왕)]과 文武大王(문무대왕)의 2廟(묘)를 別立(별립)하고 始祖大王[시조대왕:味鄒尼師今

(미추이사금)]과 왕의 高祖(고조) 明德大王[명덕대왕:孝讓(효양)], 왕의 曾祖(증조) 元聖大王

(원성대왕), 皇祖(황조) 惠忠大王(혜충대왕)을 5廟(묘)로 삼았다. ○ 兵部令(병부령) 彦昇

(언승)으로 御龍省(어룡성) 私臣(사신)을 삼았다가 얼마 아니하여 上大等(상대등)을 삼았다.

○ 죄수를 大赦(대사)하였다. ○ 5월 초하루 壬戌(임술)에 당연히 日蝕(일식)이 있을 터인데

食[식:蝕(식)]치 아니하였다. ○ 9월에 熒惑[형혹:妖星(요성)]이 달에 들어가 별이 비와

같이 떨어졌다. ○ 武珍州(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進上(진상)하고 牛頭州(우두주)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 10월에 큰 추위가 있어 松竹(송죽)이 다 죽었다. ○ 耽羅國[탐라국:

지금의 濟州(제주)]에서 사신을 보내 朝貢(조공)하였다.

○ 3년 정월에 왕이 神宮(신궁)에 親祀(친사)하였다. ○ 4월에 阿飡(아찬) 金宙碧(김주벽)의

딸을 後宮(후궁)으로 들였다. ○ 7월에 지진이 있었다. ○ 8월에 加耶山[가야산:陜川

(합천)]의 海印寺(해인사)를 창건하였다. ○ 歃良州(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進上(진상)하였다. ○ 12월에 均貞(균정)에게 大阿飡(대아찬)의 位(위)를 주고

假王子(가왕자)를 삼아 日本(일본)에 볼모로 보내려 하니, 均貞(균정)이 사양하였다.

○ 4년 4월에 왕이 南郊(남교)에 行(행)하여 보리 농사를 보았다. ○ 7월에 일본과

交聘(교빙)하여 友好(우호)를 맺었다. ○ 10월에 지진이 있었다.

○ 5년 정월에 伊飡(이찬) 秀昇(수승)으로 侍中(시중)을 삼았다. ○ 5월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황금 300냥을 進上(진상)하였다. ○ 7월에 閼川(알천)에서 軍兵(군병)을

大閱(대열)하였다. ○ 歃良州(삽량주)에서 흰까치를 진상하였다. ○ 臨海殿(임해전)을

重修(중수)하고 東宮[동궁:太子宮(태자궁)]의 萬壽房(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 牛頭州(우두주) 蘭山縣(난산현)에서 伏石(복석:엎어진 돌)이 일어났다.

○ 熊川州(웅천주) 蘇大縣[소대현:지금의 泰安(태안)] 釜浦(부포)의 물이 피로 변하였다.

○ 9월에 望德寺(망덕사)의 두 塔(탑)이 相戰(상전)하였다.

○ 6년 정월에 어머니 金(김)씨를 봉하여 大王后(대왕후)라 하고 妃(비) 朴(박)씨를 봉하여

王后(왕후)를 삼았다. ○ 이 해에 唐(당)의 德宗(덕종)이 崩(붕)하여, 新主(신주)

順宗(순종)이 兵部郎中兼御史大夫(병부랑중겸어사대부) 元季方(원계방)을 보내어 喪(상)을

告(고)하고 왕을 책봉하여 '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雞林州刺史 兼

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 

겸 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을 삼고, 그 어머니 叔(숙)씨를 大妃[대비:王母(왕모)의

아버지는 叔明(숙명)으로 奈勿王(내물왕)의 13世孫(세손)인즉 어머니의 姓(성)은 金(김)씨니

그 아버지의 名(명)으로 叔氏(숙씨)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아내 朴(박)씨를 妃(비)라

하였다. ○ 8월에 公式[공식:法規(법규)] 20여 조를 頒示(반시)하였다. ○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 7년 3월에 日本國(일본국) 사신이 오니, [王(왕)이] 그를 朝元殿(조원전)에서

引見(인견)하였다. ○ 왕이 下敎(하교)하여 佛寺(불사)의 新創(신창)을 금하고 오직

修葺[수즙:重修(중수)]만을 허락하였으며 또 錦繡(금수)로 佛事(불사)를 짓거나

金銀(금은)으로 器用(기용)을 만드는 것을 금하여 所司[소사:官吏(관리)]로 하여금 널리

布告(포고) 施行(시행)케 하라 하였다. ○ 唐(당)의 憲宗(헌종)이 宿衛王子(숙위왕자)

金獻忠(김헌충:何王(하왕)의 아들인지 미상)을 歸國(귀국)케 하고 이어 試祕書監(시비서감)의

職(직)을 가하였다. ○ 8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朝貢(조공)하였다.

○ 8년 정월에 伊飡(이찬) 金憲昌(김헌창)[昌(창)은 혹 貞(정)으로 씀]으로 侍中(시중)을

삼았다. ○ 2월에 왕이 崇禮殿(숭례전)에 御坐(어좌)하여 奏樂(주악)을 觀聽(관청)하였다.

○ 8월에 큰눈이 왔다.

○ 9년 2월에 日本國(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厚禮(후례)로 대접하였다.

○ 金力奇(김역기)를 唐(당)에 보내어 朝貢(조공)하였다. 力奇(역기)가 (唐主(당주)에게)

上言(상언)하기를, "[德宗(덕종)] 貞元(정원) 16년(新羅(신라) 昭聖王(소성왕) 2년)에

詔書(조서)로 臣(신)의 故主(고주) 金俊邕[김준옹:昭聖王(소성왕)]을 책봉하여

新羅王(신라왕), 어머니 申(신)씨를 大妃(대비), 아내 叔(숙)씨를 王妃(왕비)로 하였는데,

冊封使(책봉사) 韋丹(위단)이 中路(중로)에서 왕의 薨去(훙거)를 듣고 도로 돌아가게 되어

그 冊封書(책봉서)가 中書省(중서성)에 (그대로) 있다 하니, 지금 臣(신)이 귀국하니 청컨대

그것을 臣(신)에게 주어 가지고 가게 하소서" 하였다. 唐主(당주)가 칙명에 "金俊邕(김준옹)

등의 冊書(책서)는 鴻臚寺(홍려사:外務部(외무부)와 같음)로 하여금 中書省(중서성)에서

그것을 수령하여 寺(사:홍려사)에 와서 金力奇(김역기)에게 授與(수여)하여 가지고 돌아가게

하라" 하고, 이에 왕이 叔父(숙부) 彦昇(언승)과 그 아우 仲恭(중공) 등에게 門戟(문극)을

내리고 本國(본국)으로 하여금 例(예)에 의하여 주게 하였다[申(신)씨는 즉

金神述(김신술)의 딸이니 神字(신자)의 同韻(동운)인 申(신)을 氏(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 왕이 사람을 12道(도)에 보내어 諸郡邑(제군읍)의 境界(경계)를 分定(분정)케 하였다.

○ 7월 초하루 辛巳(신사)에 日蝕(일식)이 있었다.

○ 10년 정월에 달이 畢星(필성)을 犯(범)하였다. ○ 6월에 西兄山城[서형산성:지금의

慶州(경주) 西岳山城(서악산성)]의 鹽庫(염고)가 (저절로) 울어 소 우는 소리와 같았다.

○ 碧寺(벽사)의 蝦蟆(하마:두꺼비와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었다. ○ 7월에 大阿飡(대아찬)

金陸珍(김육진)을 唐(당)에 보내어 (前年(전년) 冊封(책봉)의) 恩(은)을 辭(사)하고 겸하여

方物(방물)을 進奉(진봉)하였다. ○ 크게 가물었다. ○ 왕의 叔父(숙부) 彦昇(언승)이 그

아우 伊飡(이찬) 悌邕(제옹)으로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大內[대내:宮中(궁중)]에 들어와

亂(난)을 일으키고 王(왕)을 弑害(시해)하였으며 王弟(왕제) 體明(체명)도 왕을

侍衛(시위)하다가 해를 입었다. 왕을 追諡(추시)하여 哀莊(애장)이라 하였다.


3-4. 차건신(車建申)


“삼국사기”와 “삼국사기” 등, 고려의 역사 이전의 역사서에 차씨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차건신에 대한 기록 역시 전혀 찾을 수 없다.


지금은 근거가 없어 해체된 차류대종회에서 발행하던 “차류대종보” 특집2호(1973년

9월)에는 차건신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곧 그 이름이

건신(建申)이 맞는지 건갑(建甲)이 맞는지에 대한 것인데, 양쪽 주장이 제시되고 5명의

원로들의 재고증(再考證)을 통해 건신(建申)으로 결정하는 엄숙한 기사였다. (참고로, 아직도

건갑(建甲)도 혼용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연안차씨 대동보나 강렬공파보 등에서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에서 사용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류씨 족보, 곧 기사보(1689년)

이후의 족보들, “차원부설원기”(1580년 전후의 위작(僞作)), 차식(車軾)의 신도비명(1619년)

등이다. (차식은 차천로와 차운로의 부친임.) 특히, 필자는 지금도 연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문의 일부 계보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본(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그 계보와는

상관없는 차건신의 이름의 신(申)자가 이본(異本)을 만들다가 (아마 실수로) 갑(甲)자로 쓰인

탓으로 설명되었다. 차식의 신도비명과 류씨 족보들은 설원기의 설명을 따르고 있을

따름이라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


결론적으로 차건신의 실재에 대한 근거는 “차원부설원기”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위서(僞書)임이 판명이 나 있다. 


3-5. 차씨


다음은 “엠파스 백과사전”의 ‘차(車)’ 항목이다. 류씨와의 관계를 잘못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생략했다.


“문헌에 110여 개의 본관이 전하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으로는 연안(延安) ·

평산(平山) · 용성(龍城) · 남해(南海) 등이 있다.


차씨의 대종을 이루는 연안차씨는 차효전(車孝全)을 시조로 한다. .....

문학공파(文學公派) · 전서공파(典書公派) · 월파공파(月波公派)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 등의 분파를 이루며 계대를 이어왔다.


평산차씨의 시조는 차광한(車光翰)으로 전한다. 여러 문헌에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사실이 전해오나 유래나 계통을 상고할 수 없다. 용성차씨의 시조 역시 문헌에 따라

차우상(車遇尙) 또는 차중립(車仲立)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 시조의 행적이나 본관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남해차씨는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낸 차지보(車之普)를

시조로 삼아 계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남해를 본관으로 삼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5만 6,106호와 인구수

18만 589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39위이다.”


2000년의 통계청 인구조사자료에 따르면 1000명 이상의 차씨에는 연안차씨(161,325명),

경주차씨(6,294명), 고령차씨(1,772명), 수원차씨(1,591명), 나주차씨(1,235명)의 5개

본관이 있다. 위에 언급된 평산차씨(276명), 용성차씨(359명), 남해차씨(394명)는 현재

소수의 구성원만 존재한다.


이들을 보면, 흔히 차씨들은 단일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씨들은 본 자체도 바뀐 경우가 많고(큰 지방의 명칭을 따서 개관한 경우 등), 큰 본관에

흡수된 경우도 많다. 따라서 현재의 인원만 가지고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 큰 세력을 떨친 정주류씨가 현재 679명만 존재하는 것이 좋은 예에

속할 것이다.


류씨의 경우도 “柳氏皆祖文化大丞車達”(류씨는 모두 문화류씨 대승공 류차달에서 나왔다)는

식의 개념이 조선시대 후반에 크게 퍼졌었다. 역사적 인물 중에 그 상계를 알 수 없어

대승공과의 연결을 밝힐 수 없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실제 대승공과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일단은 그 상태로 두어야 할 것이다.


* 현재 연안류씨(622명)도 있고 문화차씨(613명)도 있음.

* 이상의 숫자는 모두 2000년 통계에 의함. 물론 북한은 빠져 있어 그것이 포함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임.


차씨가 문헌상으로 최초로 나타난 것은 “고려사”이다. 이것은 류씨나 많은 다른 성씨들과

유사한 상황이다. 반면 고려금석문에는 차씨 관련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車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는 원나라 사람 차라대(車羅大) 등이 나오고, 연안차씨와 연관을

찾을 수 없는 차지보(車之普) 등이 나오며, 연안차씨의 인물로는 차중규(車仲圭),

차송우(車松佑), 차약송(車若松), 차신(車信), 차척(車倜), 차포온(車蒲溫) 등의 10명이

좀 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중 가장 먼저 사람이 19대 명종 때 사람인

차중규(1095-1174)이다. 특이한 것은 “고려사”에 대승공 류차달의 이름(名)과 동일한

차달(車達)이란 인물이 6대 성종 때인 990년의 기사에 나오는데 운제현(雲梯縣, 전주 지방)

지불역(祗弗驛)이란 곳의 백성으로서 효자로서 ‘역(驛)과 섬에서 해방’되는 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차달’은 전체가 이름으로 판단되며, 車를 성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항목에는 “토성(土姓)이

7이니, 송(宋) · 이(李) · 홍(洪) · 고(高) · 강(康) · 전(田) · 김(金)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정(鄭)이요, 촌락성(村落姓)이 2이니, 차(車) · 노(魯)요, 속성이 3이니,

단(段) · 황(黃) · 최(崔)이다.【지금 모두 향리가 되었다.】” 라고 하여 차(車)씨를

촌락성으로 밝히고 있다. 성씨의 연구에 따르면, 군현의 읍치를 본관으로 하는 성은

지배층에 속했고, 촌락성이나 향 ·소 · 부곡성 등은 국가에 대한 조세 · 공부(貢賦) ·

역역(力役) 등의 부담을 져야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대략 차씨도 고려 초기에 국가적으로 시행된 성씨 분정을 통해 성립된

다른 많은 성씨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차중규의 역사적 등장도 이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4. 종합 토론 및 맺는 말


위에서 대부분의 구체적인 사실이 제시되었고, 이미 결론은 자명하다고 생각된다.


기장에는 어떤 무덤이 내려오고 있고 주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생긴 것인지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가 없다. 1-1의 엔사이버

백과사전의 항목이나 1-2의 기장군 홈페이지 내용에서 언급되어 있는 ‘이위’는 차씨인지

이씨인지 불명확한데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알려진 무덤에는 도장(盜葬)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미 무덤이 있던 곳에 다른 무덤이 거듭 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인터넷 사전(엠파스 백과사전)에 ‘차건신의 묘’의 소유자와 관리자가

문화류씨대종회로 되어 있었고 문화재자료 158호로 지정되었던 사실만 지적해 놓고

있었다. 문화재도 아니며, 기껏 그 ‘문화재자료’에서도 그 후 10년 후에 해제되었는데 그

해제 사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나 역사책을 조금만

떠들어보아도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차성’이라는 지명은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차건신이라는 인물은 16세기 후반에

“차원부설원기”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둘 사이에 연관된 이야기가

지어져서 19세기에는 읍지(邑誌)와 군지(郡誌) 등에 들어가게 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이런 책자들은 그 내용의 기술이 엄밀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해당 지방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그 사실 여부에 그다지 구애 받지 않고 가급적이면 많이 실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라에서 간행했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증보문헌비고”에도 검증되지 않고 당대에

만연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실은 경우가 부지기수임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보면 2번 항목에서 다룬 차릉에 대한 차문(車門)의 기술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명’이란 말의 남용을 여기서도 목격하는데, 예를 들어

행정구역 개편이 있어서 어느 지역의 이름이 변경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왕명’이라

부를 이유는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왕의 이름으로 행해진 시대였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분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요즘 시대에 그런 강조가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 염려스럽다. 


3-2와 3-3의 신라 소성왕과 애장왕 기사는 길지만 나중에도 참고로 쓰기 위해 제시해

보았다. 여기서 누구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차건신, 차승색 등의 가공인물들의

그림자라도 보이는지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승상(丞相), 좌상(左相)이었다는

이들의 관직명조차도 당시에는 없던 명칭이며 승상은 우리나라에서 쓰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 시대의 사료가 많이 전해져 오지 않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충분치

않다고 해도 이 비교적 상세한 기사들에서 보상(輔相) 혹은 섭정(攝政)이었다는, 왕에

버금가는 비중의 차건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 하나의 결론밖에 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차건신의 이름에 대해 논증한 여러 사람들이 겨우 근거로

삼는 것은 실질적으로 “차원부설원기” 하나뿐이었다. 이 책이 조작된 가장 큰 목적은

선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임은 이수건 교수의 평생 연구에서 밝힌 내용 중 하나이다.

차건신이란 인물의 조작이 그 일부분임은 의심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결국 차릉은 ‘차성(車城)’이라는 지명에다 적절히 역사적으로 실재성이 증명되지 않고, 대개

실재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의 성씨를 맞추어 만들어낸 이야기로 생각된다. 게다가 ‘차성’이란

지명의 ‘車’자는 車라는 한자를 직접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말 훈(訓=한자의 새김)을

딴 차자(借字)일 따름인 것이 확실해서 차씨와의 연관을 짓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닿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견강부회는, 문화류씨 시조인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車’는 수레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성(姓)의 車와는 연관이 없는데도 그 연관성을 암시하며 차씨를 류씨에

꾸며 붙인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나 지금은 폐기된 문화류씨 원파록(源派錄)의

견강부회와 동일한 맥락의 일이어서 흥미롭다. 이제는 이런 일들은 말끔히 털어내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 묘사라는 탄탄한 지반 위에 아름다운 집안의 역사를 세워 그

구성원과 사회에 큰 이익과 도움이 되는 역사(役事)에 매진할 때임을 강조하고 싶다.



2008년 10월 19일

彩霞 류주환

출처 : 물고기와 물병
글쓴이 : 은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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