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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50)천수답 논물대기

신작수필

50. 천수답 논물대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내 어릴 적 온갖 심부름 다 해 보았고, 어려운 일 다 해보았지만 한밤 캄캄한 밤에 이제 겨우 집에 나이 9살, 학교 나이 7살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이에게 그것도 혼자 들판에 가서 논에 물대고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정말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논이 조금 많았다. 그러나 거개가 천수답(天水畓)이거나 당시 관개수로(灌漑水路)가 정비되지 못한데서 농사를 짓는 논들이었다. 논이 경지정리(耕地整理)가 되지 못하고 자기모양 생긴 대로 따라 도랑들이 구불구불하듯이 따라 흘러가던 시대의 들판이었다.

 논은 있는데 밤에 물을 대어 놓아야 하는 논이 많았다. 흔히 말해 바로 천수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렵게 모내기를 한 논에 이튿날 뜨겁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논이 마르기 시작한다. 논에 댈 물은 모자라고 낮에는 아예 물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논에 물이 있어야 심어 놓은 모가 자랄 수 있다. 그래서 밤에 우리 식구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산지사방으로 책임지고 논마다 물대러 나가는 것이 그 때는 가장 큰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어리다고 가까운 새보 묘답 다섯 마지기에 물대러 가라신다. 그것도 많이 생각하여 주신 명령이었다. 우선 물대러 가려면 준비물이 필요하였다. 길을 밝히는 등과 사각 성냥통과 삽을 가지고 가야 했다.

 등(燈)은 사각 틀을 만들고 위에는 불 켜면 검댕이 빠져 나가도록 둥근 구멍을 만들어 두었고, 아래는 나무가 막혀서 호롱불을 놓도록 하여 만든 것이다. 등 사방에 참 종이를 발라두고 한 쪽은 불 켜기 위해서 문짝처럼 위쪽에다 고정시켜 여닫이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생긴 등에 호롱불을 켜서 들고 가야 길이 밝아진다. 들고 다니도록 위에다가 끈을 달아 놓았다.

 논에 물 대러 나가는데 단단히 준비를 하고 가야 했다. 이제 준비물을 들고 우리 논 새보 도랑 쪽 높은 언덕에다가 자리를 정하고 등불을 끄고 삽만 챙겨 들고 역 밑으로 도랑 따라 올라간다. 불을 밝히면 다른 사람이 논에 물꼬를 틔어 대고 들어가면서 불을 보면 바로 따라 오기 때문에 어두워도 불을 끄고 물을 어디서 막아 대는지 도랑 따라 찾아 올라가 보아야 한다.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항시 켜놓은 역(驛)의 가로등이 희미하게나마 나의 가는 길을 밝혀 주고 있다. 더듬거리고 찾아 올라가니 용케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거리이었다. 삽으로 막아 놓은 도랑물을 터뜨리면 바로 우리 논으로 들어오는 도랑을 따라 부리나케 내려 왔다. 천천히 따라 오는 물줄기 소리가 아직 나지 않았고, 우리 논 물꼬 앞에서 도랑을 막았다. 그리고 살짝살짝 가볍게 아까 등을 놓아 둔 언덕으로 와서 가만히 물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천천히 왔기에 도랑에 물줄기가 벌써 따라 와서 우리 논바닥으로 들어가고 있다.

 당시 역 밑 우리 마을에는 전기(電氣)가 들어오지 않아서 천지가 새카맣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천지가 새카만 들판의 언덕에 앉아 있기도 무섭고 그만 드러누웠다. 밤하늘의 그 무수한 잔별이 떠 있다. 하늘도 하도 맑아서 별이란 별은 온통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내린다. 우선 은하수가 가로질러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날 다리가 보인다. 가장 북쪽에 우뚝 서 보이는 북두칠성의 1등 별들이 제 자랑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자기를 보라고 말이다.

 바로 등불(燈-)이 어른거려 보인다. 아까 내가 터뜨리고 내려왔던 그 물꼬의 사람이 자기 논에 물들어 가는 것을 다시 확인하러 왔는가 보다. 그 새 물꼬를 막은 흙을 터뜨리고 자기 논에 물을 댄다. 이때는 내가 불도 켜지 말고 가만히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갔을 때 확인 후 물을 대는 것이 상책이다.

 논으로 무언가 지나간다. 호∼작∼호∼작∼ 방금 물 대어서 물이 들어 있는 논바닥으로 쥐가 지나가는지 제법 고요한 밤사이를 가로 지르는 소리다. 조금 있으려니까 웬걸 납닥발이가 모래를 막 퍼 부우면서 지나간다. 이 모두가 나이 어린 나로서는 간(肝)이 콩알만 해지고 만다. 그렇다고 무섭다고 울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방금 온 사람에게 들킬까보아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 무서움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정녕 이때는 정작 납닥발이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게 사실이다.

 그 사람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혼자 있으려니 도저히 무서워서 견디지 못해 등에다가 불을 켰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니 벌써 삼경이 지나면서 초저녁에 본 은하수가 제법 움직이었다. 그러나 지나가던 몹쓸 바람이 휙 부니 금방 등속의 호롱불이 꺼져 버렸다. 무서웠다. 한 밤이 되었으니 사방천지가 조용하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들이 논의 모를 휩쓸고 허리가 휘어질 뿐이다. 나도 이제 마지막으로 물길을 우리 논으로 틀어 놓고 집으로 잠자러 오고 말았다.

한밤 사립문을 열고 철커덩 소리가 나면서도 물대고 온 나의 흔적을 소리로 남겼다. 그리고 사경(四更)이 되었다. 피곤하였다. 열일 제쳐 두고라도 잠자리에 빠져 들었다. 아니 새벽 네 시면 아버지께서 기침하시고 아침에 이런 저런 집안일을 확인하시고 또 아침 여섯 시가 되면 벌판으로 우리 논 둘러보러 나가신다.

 나는 낮에 소 풀베기와 낙엽 모으기 때문에 지친 몸에다 논에 물대기를 새벽까지 하고 와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꿈속에서도 물 대는 어른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터에 아버지의 소리에 그만 단잠을 깨고 말았다. 벌써 아침 7시 반이다. 아버지께서 모든 논을 둘러보고 간밤에 물을 어디어디 잘 대고 들어왔는지를 조사 완료하고 오셨다.

“막내 너 어제 밤에 물 안 대고 어디 놀러갔다 왔지?”

“예? 어제 제가 논에 물대고 사경에 집에 들어 왔습니다.”

“묘답 다섯 마지기 논에 물이 하나도 없던데?”

“예. 분명히 저는 어제 밤에 물대고 왔심더. 아버지 언제 제가 거짓말 합디까?”

“그래? 이상하다 말이야. 알았다. 어제 밤에 물 댔으면 오늘 낮에 모가 시드는지 안 시드는지 보면 알끼다.”

“예. 저는 어제 분명히 물 댔심더.”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밤새껏 물대고 새벽에 들어 왔는데 그 물은 어디로 갔을까? 너무나 억울해서 넷째 형님에게 여쭤 보았다.

“형님 간밤에 분명히 물 댔는데 그 물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그래 알지. 야야! 그 논은 천수답(天水畓)이고 물은 댈 때 붙어 있지. 물 안대고 때면 금방 말라버려. 그것 아직 몰랐구나?”

 아하! 이제야 원인을 알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시면서 일부러 나에게 테스터를 해보신 것이다. 그날 묘답 다섯 마지기의 모는 싱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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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닥발이 : 삵. 삵괭이〔夜猫〕

( 푸른 숲/20100-2012.11.20.)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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