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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47)소 먹이기

신작수필

47. 소 먹이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시골에 살면서 과거에 소를 기르지 아니하고서는 목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시골에서 소는 곧 살림의 기본이며, 재산을 늘리는 수단으로 소를 사육(飼育)하였고, 아울러 농사짓기에 중요한 권속(眷屬)이 되었다. 그 집에 소를 몇 마리 키우느냐에 따라서 재산의 척도를 알 수가 있었다. 소를 많이 키운 다는 것은 당시에 곧 논·밭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당시 소가 열한 마리나 있었고, 머슴이 셋이었으며, 논이 70여 마지기 이었다. 밭이 4천여 평으로 시골 규모로서는 그래도 당시에 상당한 재산의 축에 들어갔다. 농사가 끝나면 200여 가마니의 백석지기가 아닌가?

 소 열한마리 중에 황소는 단 두 마리이고, 거개가 암소이다. 황소는 우리 어린아이들로서는 근처에 가지도 못하였다. 무섭고 얼마나 설쳐대는지 감당이 안 되었다. 그러나 암소들은 우리 어린 아이에게도 순종을 잘하고, 잘 따라 주었다. 자연히 소를 먹이러 나가려면 우리는 암소를, 작은 머슴과 각기 세 마리씩 책임을 진다.

 소를 삼밭골에 올려놓고 우리는 배고픈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밀 서리를 시작한다. 나이 든 형들이 시작하고 우리는 그저 심부름만 하였다. 준비 된 낫으로 동국댁 밀밭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가서 한꺼번에 고랑을 베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여기서 저기서 조금씩 베어 모으는 것이었다. 낫질도 그렇지만 밀을 베는 손이 떨리고, 가슴이 콩닥거리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그래도 책임이라는 것이 무섭지 소 먹이는 일곱 명이 먹을 만치 밀을 베어서 아름 째 안고 도망치듯 삼밭골로 돌아온다.

 밀을 베 오는 동안 밀 서리하는 밑불 땔감을 준비하여 놓았다. 큰 돌 세 개를 주어 와서 부엌처럼 만들고 혹시 불이나면 안 되니까 돌로 막아 두고 솔가지인 갈비를 놓고 불을 지핀다. 자연히 처음에는 연기가 난다. 그러면 혼비백산을 하여 입김으로 바람을 불어서 완전 연소하여 빨리 불이 잘 붙기를 바란다. 불이 제법 붙어서 알불이 생기면 이제 끊어 온 밀을 멀리서 들고 밀 끝을 불 위에서 굽는다. 그러면 빨리 익으면 토닥토닥 불 위에 밀 머리가 떨어지기도 한다. 이제는 형들이 큰 집게를 만들어 불에 많이 타지 않도록 집어낸다. 그리고 골고루 굽힌 밀을 나누어 준다.

 지금부터는 그것을 먹기 위하여 굽힌 밀을 비벼야 했다. 시커멓게 굽힌 밀을 들고 그 작은 손바닥으로 앙증스럽게 한 입 먹어 보자고 비비고 비빈다. 그리고 어지간히 비벼 졌다고 생각하면 한 움큼을 들고 입으로 훅 불어서 껍질을 날리고서 바로 그냥 입 속으로 넣는다. 흘린 것도 없이 낱알하나도 모두 주워 먹는다. 땀이 나자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닦는다. 아니 뺨에도 근지러워 훔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온통 얼굴에 검댕으로 그림을 그렸다. 마치 군인들이 위장(僞裝)을 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 그 한 움큼의 굽은 밀을 먹기 위하여 얼굴에 검댕으로 메이크업을 다 하다니 말이다.

 소를 산으로 올려 두고 밀 서리 해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우리 소가 어디에서 풀을 먹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도 우리들은 대담했다. 형들이 함께 있으니 나이 어린 우리들은 겁도 없이 삼밭골 입구에만 기다린다. 어느 듯 해는 지고 저녁노을이 된다. 평소에는 해가 져 가면 저절로 산 아래로 풀을 뜯어 먹으면서 내려오기 때문에 쉽게 우리 소를 찾을 수 있는데 오늘은 쉽사리 소가 내려오지 아니 하고 있다. 그랬다. 유별나게 오늘 소들이 내려오지 아니한다. 그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형이 제안을 한다.

“곧 어두워지는데 우리 소 찾으러 가자!”

그리고서는 제 빨리 산 위로 찾아 나선다, 우리는 아직 어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두워지면서 겁이 나고 산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저 울고만 있었다. 밤이 되면 산골은 순식간에 산그늘이 내리고 갑자기 캄캄해 오고 만다. 작은 머슴과 나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소를 잃어 먹어서 무척 겁이 나서 그만 나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우리 집 소를 버리고 말이다.

 대문간에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쩔쩔 매고 있는데, 넷째 형님이 우리를 보고 당장 알아차린다.

“너! 너 네들, 소 잃어버리고 왔지? 이제 큰일 났다. 아버지! 얘들 소 잃어버리고 왔네요!”

“응이, 뭐라고 소를 잃어? 그래 알았다. 오복아! 그만 집에 들어오너라.”

“예.”

얼마나 고마우신 말씀이신가? 소를 잃어 버려도 그냥 집으로 들어오라니 말이다.

“아버지! 소 잃어 버렸는데 이제 우차지요?”

“그래. 괜찮다. 소가 얼마나 영물(靈物)인데 우리 집 알고 찾아 올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또 너 네들 소 안 보고 또 밀 서리 해 먹었지?”

 아니 아버지께서는 안 보시고도 먼저 훤히 다 알고 계신다. 하물며 잃어버린 소도 어른이시니까 걱정이 안 되시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홉 시가 넘어서야 우리 집 소 워낭소리가 “쩔렁∼, 쩔렁∼!”들린다. 아니 소는 밤에, 캄캄한 밤에 어떻게 우리 집을 알고 찾아오지? 그것도 여섯 마리 모두를 데리고 어미 암소가 제일 먼저 앞서 오고, 얌전이 송아지가 “딸∼랑, 딸∼랑!”울리면서 우리 집으로 모두가 일렬로 줄 서서 군인이 사열(査閱) 받듯이 거침없이 찾아오다니? 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니, 내 눈에 눈물이 찔끔 다 나왔다. 아니, 그 놈의 밀 서리 때문에 소 먹이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이다.

( 푸른 숲/20100-2012.11.17.)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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