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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4

(영버수필 4) 수그사이 환희 26. 셋째형 갑년잔치

엽서수필 4 : 수필과 그림사이, 그 환희

26. 셋째형 갑년잔치

이영백

 

 셋째형 갑년잔치라고 연락이 왔다. 부지런하고 법 없이 살 사람이다. 관공서 일이나 무슨 집안일이든지 먼저 나서서 척척 해 왔던 셋째형이다. 열아홉에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자원입대하여 공병부대에 근무하였다. 미군부대로 전역하여 7년 동안 군 생활하였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셋째형은 화려하였던 인생에 회갑, 갑년잔치를 치른다.

 셋째형과 나와 함께하였던 시간은 군 제대 때가 1957년 초교 1학년 다닐 때부터였다. 같은 집에서 살게 된 인연이다. 셋째형과 함께 살 때가 좋았다. 큰 머슴, 중 머슴, 작은 (꼴)머슴 등이 함께 일하던 시절이다.

 셋째형은 군대 생활을 6ㆍ25전쟁 발발부터 7년이나 복무하고 제대하였다. 귀가하여 7일간 휴가 받아 세상을 주유하다 4일 만에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농경시대를 마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논 70마지기를 모두 팔아 부산 동래 미남으로 가서 미나리꽝을 사자고 제안하다가 혼만 나고 말았다. 분명 셋째형의 혜안이 맞았는데 말이다. 부산이 도시로 발전되면서 미나리꽝에 시외버스주차장이 들어서고 빌딩이 생겼다. 토지 주는 졸부가 되었다.

 셋째형 갑년에도 아들 둘, 딸 넷으로 육남매들이 어울려 잔치를 잘 준비하였다. 아마도 셋째형 건강을 염려하여 갑년잔치를 그렇게 준비한 모양이다. 마치 일찍 돌아가실 것을 예견하였듯 잔치 후 4년 뒤 돌아가셨다.

 예전에는 평균수명이 짧아서 갑년까지 살아 있음에도 큰 영광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자손들로서는 부모가 오래 살아야 그 집안의 대들보를 지키고, 재물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도 장수가 필수하였기 때문이다.

 갑년잔치를 치르고 4년 후에 돌아가셨다 함은 현대의학을 저버린 결과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갑년이라는 용어도 사라지고 칠순이라는 용어도 사라진지 제법 된다. 팔순잔치도 대수롭잖게 넘어가는 시대를 맞는 것이다. 개인건강이 허락하는 한 모두 장수한다고 믿기 마련이다.

 셋째형 갑년잔치 때에 벌써 얼굴에 검은 빛이 서리었다. 이를 일찍 알았더라면 서울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부터 올바르게 하고 대처하였어야 하였다. 삶이 너무 팍팍하여 그만 그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 잘못이다.

 삶의 여유라고는 없었으니 모두가 제 그림자 밟고 빠져나오질 못하고 그렇게 살았다. 셋째형 갑년잔치하고 고작 4년을 넘기셨다.

(20211030.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