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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2/4다마 계룡산

(엽서수필 2) 109. 내가 누군가

40년 만에 시 오른 을뒷산 계룡산

109. 내가 누군가

이영백

 

 뒤로 힐끗 돌아보았다. 나의 삶이 쪼르르 달려와 보인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어려움이라는 것을 극복하고 첫 직업이 교사자리 이었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가르치는 공부를 줄곧 하여 왔기에 학동들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8년을 가르치고 내 공부 더 한다는 핑계로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차라리 난 배우는 것이 더 쉽다.

 다시 한 번 더 뒤로 돌아보았다. 나의 삶이 도회지에서 살 것이라고는 애초에 생각도 못해 봤는데 어쩌다 대학 행정직으로 봉사하였다. 그렇게 젊음을 고스란히 376개월로 몸 바치고 또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지 않았든가? 조직을 떠난 자유인이 되었다. 글 쓰는 내가 되고 말았다. 글 씀이 재미났다. 내가 나로 살았던 체험을 풀어내고 허물 벗는 작업이었다.

 본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태어났기에 이제 모두 버리고 옷 한 벌 걸치고 떠날 것이다. 그것이 진솔한 나일뿐이다. 인간 한 평생 그렇고 그렇게 살아 왔는데 부자나 가난뱅이나 무엇이 다른가? 모두가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다. 가난을 밥 먹듯 하고 살았지만 이제 이렇게 자유인으로 살아오는 지금이 행복하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이룸도, 못 이룸도, 아까움도, 부러움도, 아린 삶도 지나고 보니 한 줌으로 스치는 빛이었다. 그렇게 나로 살아온 것이 행복하고 즐거움이었다.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즐거움이었다. 결코 아웅다웅 살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교육학을 배울 때 흔히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고 하였다. 나는 결코 그 솔잎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인간으로 더 배우고 싶은 욕구와 충동으로 교직을 버렸다. 그러나 다시 얻은 직업은 교직원으로서 연수라는 미명하에 또 가르침을 자원하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조직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자원하여 연수라는 제목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자원하여 어려운 글쓰기방법을 공부하고 투자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나 혼자만 알고 버리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송충이처럼 또 재능기부로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가르침에 또 묶이어 들어갔다.

 내가 누구인가? 작은 삶을 살아오면서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

(2021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