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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이씨 사료

한민족성씨의 역사-이것이 한국사다-김태혁(도서출판 寶文書院)

道靜 讀길思 挑戰

2019년 8월 10일 오후 08:30 - 수정됨

?? 교과서에 없는 한민족 성씨의 역사 ??
   ?이것이 한국사(韓國史)다.? 
 
교과서에 없는 한국인(韓國人)의 역사(歷史)를 수록했다. 
 
한국(韓國) 성씨(姓氏)의 역사(歷史)는 우리 가문(家門)의 역사이자 한국인(韓國人)의 역사다. 조상들의 거쳐온 모습과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을 정리했다. 
 
약 293개 성씨의 1,041개 문중별 유래부터 사적, 유적, 인물, 문학, 정치, 경제, 과학은 물론 각 성씨의 이야기를 통해 한민족의 탄생에서 부터 현존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역사교과서 이상의 광범위한 역사를 살펴보자. / <❤813?>  
 
648. 이[李]氏 / 문중의 유래(由來) 요약 소개 : NO. 2 
 
우리 나라 이씨(李氏)는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中國系) 및 기타계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계는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한 것으로, 차성이씨(車城李氏,위(渭)[알평~33세]), 합천이씨(陜川李氏,개(開)[알평~39세]), 평창이씨(平昌李氏,윤장(潤張)[알평~39세]), 가평이씨(加平李氏,윤원(潤遠)[일평~39세]), 아산이씨(牙山李氏,주좌(周佐)[알평~41세]), 재령이씨(載寧李氏,우칭[알평~42세]), 우계이씨(羽溪李氏,양식(陽植)[알평~48세]), 진주이씨(晋州李氏,군재(君梓)[알평~53]), 원주이씨(原州李氏,반계(攀桂)[알평~58세])이상 9개 성씨는 기록과 문헌 및 고증(考證)이 확실하다. 
 
아울러 금구이씨(金溝李氏), 덕은이씨(德恩李氏), 흥양이씨(興陽李氏,별[알평~59세 ]), 영천이씨(永川李氏), 진위이씨(振威李氏)도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계> 이씨(李氏)성은 고성이씨(固城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연안리씨(延安李氏), 청해이씨(靑海李氏), 태안이씨(泰安李氏), 태원이씨(太原李氏), 평산이씨(平山李氏)등이 이에 속한다.  
 
기타계로는 안남국(安南國:베트남)의 왕 이천조(李天祚)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옹진반도 화산(花山)에 정착한 화산이씨(花山李氏), 정선이씨(旌善李氏), 김알지 후손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한 광산이씨(光山李氏)와 허씨(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등이 있다. 
 
경주이씨는 신라 6성(六姓:李氏, 崔氏, 鄭氏, 孫氏, 裵氏, 薛氏)의 하나이며, 우리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으로,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다.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瓢岩公) 이알평(謁平)은 기원전 177년(한무제(漢武帝)6년) 갑자(甲子)에 하늘로부터 진한(辰韓)땅의 표암봉(瓢岩峰)인 박바위(지금의 경주)로 처음 내려와,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서 부족을 다스리며 혁거세(赫居世)를 양육시켜,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6부 촌장의 의장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여,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킨 선구자였다. 서기 32년(신라 3대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경주)을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로 사성하였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이씨, 계림이씨)로 하였다. 그후 후손들은 이알평의 36세손으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수 있는 신라 진골출신인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받들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거명의 17세손(고려말기)에서 8파로 대별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파로 분파된다. 전통의 명문거족인 경주이씨는 고려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공신.학자.명신을 배출하여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相臣정1품정승) 8명, 대제학(정2품문형) 3명을 비롯하여 10여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명신(名臣)을 배출하였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시조 이양식(李陽植)은 이알평의 48세손(소판공 이거명의 13세손으로 고려조에 중서사인(中書舍人:정4품)을 거쳐 좌복야(左僕射정2품부총리)를 역임하였고, 아들 순우는 의종 때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뛰어난 문신으로 한림원에 속하여 왕의 교서를 짓는일을 맡아한 종2품에서 4품)를 지냈으며, 경주에서 우계(강릉의 속현)로 이주한 후 양식의 5세손 이구(李球)에 이르러, 경주이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우계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 "한민족 성씨의 역사(韓民族 姓氏의 歷史)"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