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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이씨 사료

[스크랩] 류차문제와 뒤틀린 가문의식


첨부파일 문화류씨선대 세계의 의문.hwp


※ 오늘 모 SNS에서 젊은 종원이 아직도 류차문제를 우리 아버지가 큰집이라고 했는데 왜 자꾸 아니라고 하느냐“는 글에 뎃글을 달고 그와 관련된 류주환교수 글을 과거에 다운 받아 놓은 것을 보면서 보충하여 충경공파 지천 진사공종회 元泉 柳永熙님의 글의 소개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moonhwaryu/R79P/12?q=%D7%B3%3F%F3%B3%20%B9%AE%C1%A6%C0%C7%20%C0%FC%B0%B3%BF%CD%20%C0%FC%B8%C1 

문화류씨 선대 세계의 의문

질문
 
   저는 대승공 32세 영희입니다. 2008년 4월에 우연한 기회에 대전 뿌리 공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명문가라고 생각했던 우리 문화류씨 유래비는 찾아볼 수 없고 연안 차씨 유래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내용은 머리에 남지 않았으나 대승공 휘 ‘柳車達’을, ‘車海’라고 하고 대승공 2세 효금께서 사성을 받아 류씨가 이어져 오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지난해 10월 8일 문화류씨 유래비 제막식 참석하였습니다. 좋은 자리에 멋진 유래비를 보면서 자긍심도 느끼고, 유래비를 세우는데 공헌하신 어른들께 감사하기도 하고, 여러 종친 어른 분들을 뵈올 수 있어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형비 비문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에게서 아래와 같은 선대 세계임을 배워 왔는데 우리 문화류씨와 차씨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文化 柳氏 先代 世系

姬씨 4세, 시조 :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B. C. 2704년      
姒씨 10세, 시조 : 하후 우씨(夏后 禹氏)  B. C. 2222년
王씨 57세, 시조: 왕조명(王祖明)
車씨 32세, 시조: 차무일(車無一  본 성명은  王蒙)
柳씨 5세(사성전) 시조:  류 색(柳 穡) 본성명 차승색(車承穡)
柳씨 시조: 류차달(柳車達)

  이것은 제가 그 동안 우리 집안에 대해 관심이 적었으며 대종회 총회에도 참석한 바가 없으니 저의 탓입니다.
  그 후 뿌리 깊은 버드나무 카페에 들러 여러 가지 관련된 글들을 찾아 읽어 보았으나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읽어 본 글은 ‘류-차 문제 방’ 2번 글 차릉, 4번 글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의 관계, 5번 글 ‘문화류씨들의 망언 글에 대한 반박’ 등입니다.
  설날에 집안 종친이나 아이들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텐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난감합니다.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관련이 없다는 내용을 집안 어른, 아우, 형, 조카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말도 안 된다고 야단입니다. 그 분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료를 알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류영희 y99230h@hanmail.net(99230 은 숫자임)


답글
답글 :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것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정리는 http://kenji.cnu.ac.kr/ryu/의 최신글 “류차문제와 뒤틀린 가문의식:그 전개와 전망”이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 싸이트에는 차원부설원기가 왜 악서이며 위서인지 등등의 상세한 애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류씨와 차씨가 일가라고 믿고 이야기하시는 분들께서는 대승공이 차씨라고 억지를 부리는 연안 차씨들의 망동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류차문제와 뒤틀린 가문의식: 그 전개와 전망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한 가문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조상들의 벼슬이나 공적에 있지 않다.
얼마나 아래로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높이고 위로는 사회의 복리를 추구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한 가정이 세대를 이을 자녀를 잘 길러내고 사랑을 담아내는 그릇이 있듯이 가문은 그 구성원들을 잘 교육하고 선도하고 대를 이은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게 하는 큰 그릇이다.
여기에는 거짓이나 허세나 배타성이 들어 와서는 안 된다.
2004년 경부터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그 여파로 몇 백년 동안 전해오던 류씨와 차씨의 관계에 대한 사실이 철저히 검토되고 재평가되었다.
그 결과 류차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은 僞書이자 惡書이며, 변질된 車門의 배타적 가문의식이 역사와 사회에 심각한 해약을 끼쳤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글에서는 류차문제를 개관하고, 「차원부설원기」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밝혀진 역사적 진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전파된 몇몇 경우들을 소개한 후, 미래를 전망하고자한다.

차례는 다음과 같다.
1. 시조의 성이 빠꿔다니
2. 류문의 대응
3. 설원기는 위서이며 악서
4. 뒤 틀린 가문의식의 발로
5. 객관성의 확보와 류차문제의 해소
6. 진실의 전파
7. 차문의 역사 왜곡은 현재 진행중
8. 역사의 햇불

1. 시조의 성이 바뀌다니
2004년 연안차씨(차문) 대동보가 발간되자 문화류씨 문중(류문)은 쑤신 벌집처럼 흥분했다. 바로 그곳에 명시적으로 류문 시조인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이 성씨도 이름도 모두 갈려 차해(車海)라는 이름으로 등장해버렸기 때문이다. 차문에서는 류씨를 가성(假姓) 혹은 모성(冒姓) 류씨, 곧 가짜 성이라고 부르면서 친절하게도, 대승공의 아들 좌윤공(佐尹公) 류효금(柳孝金)부터는 진짜 류씨이고, 대승공과 계보 상 그 위에 있는 다섯 분의 조상, 곧 전부 6대의 류씨들만 가짜 류씨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이런 주장의 속에는 이런 꾸민 이야기가 숨어 있다. 곧, 대승공을 포함한 6대가 원래 차씨였는데, 화를 피하기 위해 임시로 류씨를 빌려 세상을 속이며 가짜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태조 왕건이 대승공 집안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 이기고 나서 고마워서 전공을 크게 세운 맏아들에게 너는 장하니 다시 예전 차씨를 다시 쓰라, 하고, 동생은 어리고 별 볼일 없었지만 그래도 한참동안 집안이 가짜 류씨로 행세해왔으니 버리기 아깝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정식으로 그 류씨가 되어서 문화류씨 시조가 돼라, 하고 자상하게 처분해주었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차문에서는 머리를 더 굴렸다. 그러면 왕의 하사해준 것이 아니면 다 가짜 성인데(사실 아님), 대승공과 그 위의 성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더라? 별말이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에라 한문을 억지로 해석해서 대승공도 차씨로 하라고 했다고 우기자. 그러면 그 위는 가짜 류씨들이었으니 다 자동으로 차씨로 바뀌는 것이 옳겠지.
이런 꾸며진 이야기를 4백 수십 년 동안 잘 믿어왔던 류씨들이 시조를 모독하니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은 그럼에도 2004년까지 류씨들은 최소한 몇 년 동안은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2001년에 차문에서는 이미 대전 뿌리공원에 유래비를 세우면서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필자 주: 류씨를 쓰기 시작한 후 6대째를 의미]인 류해(柳海)", "둘째아들 효금(孝金)은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같은 문장을 넣어서 명확히 공격의 칼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동보의 편수를 전후하여 인터넷 홈페이지, 종보(宗報), 각종 서적 등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대승공의 성명을 바꾸는 창씨개명의 일을 자행한 것이다.

2. 류문의 대응
2004년 류문의 종보인 "유주춘추"(2004년 4월)에 차문의 가성류씨 주장에 대해 항의를 하는 글(류두열(柳斗烈))이 실렸으나 "차원부설원기"와 원파록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으로 해석상의 문제만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종보에는 당시 대종회 총무였던 류익환(柳益桓)씨의 문화에 관한 고찰을 하는 글 가운데서 설원기와 원파록을 비판하면서 가성류씨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밝히고 있는데 아직 직접적인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 후 류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차문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원파록과 설원기에 연유함을 알아냈다. 그 결과 (1) 설원기와 원파록을 배척하고, (2) 차씨가 대승공의 후손이 아님을 선언하고, (3) 차문에 시조 모독을 포함한 기만행위들을 중지하고 사과할 것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대종회장과 14개 파종회장 전체의 명의로 결정되어 2004년 8월 11자 공문으로서 당시에 존속하고 있던 차류대종회에 전달되었다. 그때까지도 차류대종회는 차문과 류문이 모두 참여하는 단체였기에 그런 중간역할을 할 단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차문에서는 물론이지만 류문의 일부 사람들도 그동안 수백 년 이상을 류씨와 차씨가 형제집안으로 알고 지내왔고 차류대종회라는 단체까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해온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무런 문제의 해결 없이 단지 사태를 넘겨보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설원기와 원파록은 탐구하면 할수록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필자가 몇 개월의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차원부설원기 비평"과 "문화류씨 선계(先系) 고찰"을 발표한 것이 그 즈음인 2005년 1월 중의 일이었다. 전자의 글에서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들과 설원기 자체의 기술들이 합치하는지, 설원기 자체의 내부 모순은 없는지를 중심으로 설원기를 비평했고 그 결과 차원부설원기가 저자를 참칭해서 조작해낸 '믿을 수 없는 문헌'임을 밝혔다. 후자의 글에서는 원파록이 몇 부분의 문헌을 근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주된 근간은 역시 설원기이며, 설원기가 위서(僞書)로서 배척되고 다른 문헌들도 그 원형도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주장들에 근거가 전무하여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원파록 또한 전체가 믿을 수 없는 기록임을 밝혔다. 각종 문헌을 두루 섭렵하여 상세하게 작성된 이 글들 중 류차문제에서 더 비중이 큰 "차원부설원기 비평"은 2005년과 2006년 "유주춘추"에 약간의 형태를 달리하면서 실렸고 차문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많은 종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3. 객관성의 확보와 류차관계의 해소
그러면서 실상 차원부설원기를 비평한 인물들이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현대의 역사학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필자는 2007년 3월에 그 한 달 전에 학술지에 실린 학술논문 한 편을 소개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영남대에서 평생 성씨 연구를 행했던 이수건 교수의 유고(遺稿) 논문이었다. 제목은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이었고, 제목의 주제의 대표적인 예로서 "차원부설원기"를 들면서 그 문헌이 위작이라고 단언하며 그 위작자, 위작시기, 위작동기, 위작내용 등을 명백히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 논문을 바로 대종회에 소개했고, 대종회에서는 그것을 다시 종원들에게 널리 배포했다. 그 결과 머리로 믿게 된 차씨는 대승공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가슴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은 후에 문화류씨 대동보(2008년)에도 그대로 실릴 만큼 중시되었다. 그 후로도 고려대에서 가르치는 김난옥 박사의 논문도 나와서 설원기가 위작임을 논증했고, 이미 조선시대에 남극관(南克寬), 황윤석(黃胤錫), 이선(李選), 홍계희 등의 인물들이 설원기가 위서임을 간파했음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들은 설원기를 '더러운 위작'이라는 내용의 표현까지 썼다.
한편 이수건 교수는 2007년의 논문과 내용적으로 유사한 논문을 1998년에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낸 것이 확인되어, 이 교수의 연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또한 2003년에 나온 저서 "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는 설원기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수차례에 걸쳐 그것이 위작이고 위서임을 거듭 명시하고 있었다.
2007년 5월에는 드디어 더 이상 의미 없게 된 차류대종회가 해체되었고 장학재단도 해체되어 문화류씨 단독의 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8년은 여러 모로 류차문제에서 결정적인 해이다. 바로 류씨와 차씨가 완전 별개임을 선언한 문화류씨 대동보인 무자보가 발간된 해이고, 뿌리공원에 문화류씨 유래비가 세워지고 그 안에 명시적으로 같은 내용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몇 십년만의 류릉의 방문을 통해 차씨들이 류상운 선조께서 대승공의 성을 "류차"라고 불렀다는 망발을 일거에 깨뜨릴 수 있었다. 여기에 필자는 다음에 언급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원부설원기의 공식적 부정도 넣고 싶다.

4. 진실의 전파
필자는 그 후 설원기의 연구나 차문에서 주도한 설원기의 국역에 관련되었거나 혹은 기타 어떤 식으로든 설원기와 관련된 개인 및 단체들을 찾아 설원기의 실상을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학중앙연구원"(구 정신문화연구원)이다. 이곳은 권위 있고 인터넷의 대형 포털 사이트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편찬한 곳이다. 그런데 이 사전에서는 "차원부" 및 관련 항목들이 검색이 되고 그것들은 차원부설원기에 입각한 설명들을 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국사사전에도 나오는 것을 누가 믿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이것을 수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차원부" 및 관련 항목들을 삭제 내지는 정정해달라는 장문의 요청서를 연구원에 송부했고, 드디어 2008년 8월 6일자 공문으로 필자의 요청을 모두 수용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현재 개정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작업이 2011년에 완성된다고 했다. 이 공문은 바로 "차원부설원기"의 사망선고라 평가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보내온 공문(일부). 이로써 위서 "차원부설원기"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음.]

다른 것은 한국 사학계의 중진이며 정도전 연구에 권위자인,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하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한영우 교수이다. 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정도전사상의 연구"의 앞부분에서 설원기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정도전 가계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했고 한 교수는 2008년 7월 19일에 설원기가 "위서가 확실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밝히는 답장을 보내왔다.

설원기 국역을 축하해준 작가이며 컬럼니스트인 김제영 여사에게도 연락해서 설원기가 위서임을 인정한다는 답변을 들었으며, 국역에 발간위원회의 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홍일식 박사(전 교려대학교 총장)에게도 연락해서 병환으로 인해 그 비서를 통해 사안을 인지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번역 자문을 해준 강원대의 철학과의 고재욱 교수는 그런 문헌인지 몰랐다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륜의 진주하씨 문중의 몇몇 분에게 하륜이 설원기에서 얼마나 그릇 매도당하고 있는지를 일찍이 전언했는데, 더 이상 논의를 나눌 문중의 주체는 찾기가 어려웠다. 대신 박팽년 선생의 순천박씨종친회와는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박팽년 선생이 설원기의 저자로 참칭되고 있음을 알렸고 박씨 문중에서는 검토 끝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1998년의 설원기 국역 시 차문에서는 순천박씨종친회장까지 발간위원회 고문으로 끌어들인 점인데, 필자는 그렇게 끌려들어간 순천박씨는 그 선조인 박팽년 선생에게 부지불식간에 얼마나 큰 불효를 행한 것인가를 생각할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 문중에 연락을 해서 차문에 박팽년 선생의 참칭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길 권했는데, 문중간의 싸움으로 비화할 것을 걱정한 탓인지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조상이 위서에 참칭되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필자의 좁은 소견 탓일까.
이런 맥락에서 아직도 진행 중인 사안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문헌 해제의 정정이다. "차원부설원기"는 그동안 여러 이름으로 출간되어온 카멜레온 같이 종잡을 수 없는 문헌인데다 위서인데 문헌의 해제라는 것은 대개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라서 해제를 읽는 사람이 그 내용을 사실로 오인할 소지가 크다. 그런 해제를 제공하는 기관이 권위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사이트에 "차문절공유사" 해제를 쓴 것으로 나와 있는 황재문 교수(서울대학교 연구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자신들은 역사학계에서 내리는 평가 같은 것을 함부로 내릴 입장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문을 제시했더니 현재는 규장각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기에 어렵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런 내용을 반영하겠다고 전해왔다. 규장각 자체에는 그 추이를 봐서 접근할 예정으로 있다. 하나의 예를 만든 다음 다른 많은 도서관 등지에 연락해서 비록 책 내용을 그 자체로 소개는 하더라도 최대한 설원기가 위서임을 명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안은 설원기를 찍어냈던 목판에 관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200년이 좀 넘은 것이라 하여 전남도의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필자는 목판으로서의 가치가 그 위서 자체의 해악을 상쇄할 만큼 크지 않다면 문화재지정에서 해제하도록 민원을 제기한 상태이고 현재 처리가 진행 중이다. 근본적으로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사항이기 때문에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는 국가나 지방단체의 재정지원도 받기 때문에 지정 해제 요청을 차문에서는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해서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주간동아 2005년 12월 6일자(통권 513호)에서 "'杜門不出' 두문동 72賢을 찾아서. 7. 연안 차씨와 차원부"에는 말미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차원부설원기를 그대로 옮긴 기사가 실려 있다. 이에 대해 주간동아와 작가에게 설원기가 위서임을 지적했고 나아가서 두문동 72현이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연관성이 별로 없는 72명(실제는 숫자도 110명이 넘음)을 묶은 성립할 수 없는 개념임을 밝혔다. 주간동아는 한 발 빼고 아무런 반응이 없고 대신 작가(컬럼니스트 허시명)는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작성된 기사이며 차문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고백을 해왔다.

5. 차문의 역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
이 시점에서 차문의 교지(敎旨)와 차성묘(車城墓)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선 교지라 하면 왕이 일정한 품계 이상의 벼슬이나 시호 등을 내리는 임명장이다. 그런데 차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지를 족보와 각종 서적에서 선전하고 있다.

차문에서 위조한 교지(敎旨)

이 교지에는 차원부에게 벼슬들을 증직(贈職)하고 있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고 쓰여 있고, 시호의 해설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날짜이다. 바로 경태7년(세조 2년, 1456년) 5월이며, 6월 2일의 사육신 변고 직전의 시기이며 위서(僞書) 설원기의 작성날짜로 조작된 바로 그 시기이다. 한편 "일성록(日省錄)"은 일차적 왕실 사료로서 조선왕조실록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이 "일성록"의 정조 10년(1786년) 9월 7일, 정조 11년(1787년) 2월 6일, 그리고 정조 12년(1788년) 4월 4일의 3년에 걸친 세 번의 기사에서 차원부에게 시호를 내려주길 요청하는 상언(上言: 왕에게 올리는 글)에 대하여 정조와 해당 부서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태조에서 세조까지 역대 왕들이 차원부 및 그 설원에 큰 관심을 갖고 실제 설원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모두 거짓임을 의미할뿐더러, 더욱 명명백백하게 시호를 내린 적이, 곧 교지가 내린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이것은 저 교지가 위조되었음을 증명한다. 이 위조는 심각해서 차문에서는 이것이 위조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도덕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 곧 과거에 조작된 설원기의 경우는 누군가 조작한 사람 때문에 자신들도 지금까지 속았다는 변명이라도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교지는 최근의 조작임이 확실하기에 현재의 조작의 주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교지 못지않은 또 하나의 이슈는 차성묘(車城墓)이다. '차성'은 부산 기장의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는 별칭인데, 그곳에 큰 무덤이 하나 전해져 오고 있다. 차문은 18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 지명을 주목하고 견강부회를 했다. 바로 그 무덤을 대승공의 꾸며진 6대조인 차건신(車建申 혹은 차건갑)의 무덤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차건신이 신라의 높은 벼슬을 한 신하로서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의 섭정을 하다가 죽어 왕의 예로 기장에 장사지내서 그 고을을 '차성'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차씨는 "고려사"에 처음 등장했고 신라시대까지 그 어떤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섭정이라면 왕의 대리자로서 왕에 버금가는, 또는 경우에 따라 그 이상 가는 권력자이니, 실제 그런 인물과 사건이 있었다면 사서에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차성'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보면 이미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할 때 생겨난 지명이며, 그 뜻 역시 한문의 차(車)자와는 전혀 무관한 우리말의 한자화일 따름이다(車 = '수리'). 실정이 이런데도 차성의 車자에 가공인물 차건신의 車자를 견강부회하여 '차릉'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설원기에서 대승공 류차달의 車자 때문에 차효금을 견강부회시킨 것과 동일한 맥락이어서 흥미롭다.
차건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차승색(車承穡)으로서 이 역시 벼슬이 높았고 어린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다 발각되어서 구월산 지역으로 도망쳐 류씨로 가짜 성을 붙이고 이름도 '색'으로 바꾸어 '류색'(柳穡)으로서 최초의 류씨가 되었다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인물도,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대단한 인물이고 그런 대단한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아무런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문(2008. 11. 27.)으로 확인한 사항이다.

6. 뒤틀린 가문의식의 발로
차문에서 시작된 역사 왜곡은 이미 1619년에 류몽인(고흥류씨)이 썼다는 차식(車軾: 차천로의 부)의 신도비명에서 그 큰 싹을 보이고 있다. 묘비명의 성씨 내력은 대개 해당 집안에서 제공하는 것을 기초로 작성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신도비명에서는 대승공은 일언반구도 없고 일찍이 고려 금석문에서부터 대승공이 세운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공적을 차문의 시조라는 차효전이 혼자 세운 것으로 몇 백 년 후에 기록하고 있다. 설원기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시기가 대략 1580년 전후이다. 위서 설원기에서조차 차마 대승공을 배제할 수 없어 대승공과 차효전이 같이 공을 세운 것으로 조작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불과 30여년 후에는 아비의 공까지 모두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이수건 교수도 김난옥 박사도 모두 한미한 가계를 높이려는 그릇된 가문의식에서 설원기가 나왔다고 설파하고 있고, 그런 심리적 계기를 차식, 차천로, 차운로 3부자의 재주에 비해 낮은 관직에 대한 불만, 그리고 특히 차천로와 차운로의 부정과 패악함 등을 들고 있다.
실제 실록에는 차천로의 과거 부정(1586년)과 그로 인한 유배를 언급하고 있고, 차천로가 과거 때 본관을 적지 않아 문제가 된 일도 거론되며(1596년), "어리석고 용렬"하고 "거칠고 야비한 행동을 많이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직책에서 파직되곤 했다(1601년, 1602년). 더구나 한번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종실(宗室)의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 있으면서 또 처를 들인 행위가 되었기에 기강을 무너뜨린 짓이었고 뒤의 처는 아내가 될 수 없는데 왕실 계보에 아내라고 임의로 올려 선조임금도 "지금 차천로의 행위는 너무도 풍속을 해치고 윤리에 어긋나는 것"(1606년)이라고 탄식할 지경이었다. 계속 차천로는 사치스럽다, 아첨한다, 행실이 형편없다는 등의 묘사가 계속된다. 오랜 후에 1792년 정조 때의 실록 기자는 그가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집안이 미천하고 관직이 현달하지 못하여 그의 시(詩)도 또한 오래 전하지 못했었다."하고 종합평가를 하고 있다.
차운로 역시 경망스럽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며(1589년), 1618년에도 역시 "차운로(車雲輅)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삼가지 않아서 도처에서 낭패를 당하고 더욱이 집안에서의 행동이 패려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진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라는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1622년에도 미천한 사람이며, 백성과 관리들을 침탈하고 자기 집안 제사의 제물(祭物)까지 뜯어냈다고 탄핵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도 이들은 문장이 뛰어났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특히 차천로는 조선 후기까지도 문장의 대명사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한시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도 현재 그의 글이나 시로서 명문으로 소개되는 것을 본 적은 없어 그 연유가 의아하다. 그 뛰어난 재주가 집안의 한미함 때문에 더 큰 출세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크게 느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차천로는 실제 아내의 일에서 신분상승을 극도로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실록에 드러내 밝힐 정도이기에 연구자들이 바로 이런 점을 설원기의 위작 동기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7. 설원기는 위서이며 악서
여기까지는 왜 설원기가, 그리고 그에 대부분을 기초하고 있는 원파록이 조작된 문헌들인가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그 내용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원기는 내용 전체가 악의적으로 꾸며낸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원부의 행적을 조작하기 위해 4명의 사람들, 특히 그 중에 하륜을 극악한 인물로 꾸민다. 그리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종용하여 고려를 망하게 만들었으면서도 이성계에게 벼슬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선에는 엄청난 공을 세웠고 고려에는 절신(節臣)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자가당착적인 억지 이야기를 꾸며댄다. 또한 차원부를 높이기 위해 도입한 방법 중 하나가 차원부는 적자(嫡子)이고 하륜은 얼자(?子)라는 대비인데, 하륜을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출신을 조작하고 왕자의 난의 역사적 사실들을 교묘하게 뒤틀고 있다. 특히 당시의 이성계의 행적은 어떤 다른 역사적 기술과도 맞지 않는 극도의 왜곡을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해서 왕들뿐만 아니라 허다한 최상층 신하들의 극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차원부라는 인물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일성록"에서도 그리고 실록에서도 직접 등장한 적이 없고, 오히려 부인되는 기사들이 나오며, 차원부설원기의 등장 이전에는 다른 여하한 문헌에서조차 보이질 않는다. 대개 차원부가 실재한 인물이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의 상황이다.
  설원기는 이런 내용뿐만 아니라 형태면에서만 봐도 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우선 본(本)에 따라 서문의 저자가 하위지에서 신석조로 왔다갔다 한다. 소위 왕명으로 만들어졌다는 책이 이런 실정이다. 또 그 작성연도도 본에 따라 1455년과 1456년으로 나온다. 더구나 설원기 본문의 말미에 그 저자라는 박팽년의 직책, 이름, 작성 날짜(년월일)이 밝혀져 있는데 엄밀하게 고증하면 그 날짜에 박팽년의 직책이 맞지 않는다. 왕에게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 본문을 보면 왕에게 자신의 직책을 속이고 있는 것이 되어 왕을 능멸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 충심의 글이라는 것을 바치는 왕이 며칠 있다가 시해하려고 했던 세조이다. 박팽년이 쓰지 않았음을 100% 증명하는 대목이다. 기타 40여명의 응제시 저자들 중 많은 경우가 저자일 수 없는 다수의 문제점을 갖고 있는 등 형태적인 문제가 허다하다.
  설원기라는 이해할 수 없는 위서(僞書)이자 악서(惡書)가 지금까지 문화류씨, 연안차씨, 개성왕씨 등 원파록을 받아들인 여러 관계 집안의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식자(識者)들 사이에서까지 큰 권위를 갖고 내려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토록 중국 황제(黃帝)의 자손이 되는 것이 좋았던 것일까. 차원부의 꾸며진 절의(節義)의 가치에 눈이 멀어 제대로 판단할 이성(理性)도 마비되고 문헌 고증 의식도 전부 증발했기 때문이었을까.

8. 역사의 횃불 차문은 왕에게서 사성(賜姓)을 받아야만 진짜 성씨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등의 역사적 거짓을 일삼고, 정도전이 "고려사"를 마음대로 농단해서 대승공 류차달이 원래 다른 이름인데 류차달로 제멋대로 고쳤다는, 동기도 없고 증거도 없고 최종 "고려사"는 정도전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무시하면서 음모론만 제시하는 예에서 보듯 막무가내식의 주장에,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한문 해석의 왜곡까지 버젓이 동원하면서 류차문제를 지속적으로 확대해가며 역사왜곡을 계속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고려선양회"라는 단체에 차문 사람들이 회장 등의 임원들로 포진하고 대승공이 "류차달"과 "차해"로서 두 개의 위패로 모셔지고 있으니 경천동지할 일이 아닌가.
  아직 류씨와 차씨의 선계가 다르다는 사실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류씨들도 없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선조들이 말로 또는 글로 명시하여 류씨와 차씨는 일가라고 전해온 것을 거역할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그 선조들 위의 선조들은 류씨와 차씨의 혈연관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누가 하마를 돼지로 잘못 알았고 그렇게 자식을 가르쳤다 해서 그 후손들이 하마가 돼지가 아님을 알게 되고도 선조인 그를 존경해서 계속 돼지라고 부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웃음을 살 일일 게다. 더구나 대승공 자신께서 없던 아들이 하나 더 생겼고, 그 잘난 가짜 아들 덕에, 당신께서 류씨 가문을 일으키셨는데, 차씨까지 되었다고 행여나 영광스러워 하실까.
  문화류씨는 가문사와 족보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고 그 위치를 통해 다른 가문들의 의식과 족보의 형성에 영향을 주어왔다. 그동안 깨닫지 못하는 사이 끼친 해악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몇 백년에 걸친 그릇된 선계의 기술(記述)은 현재 각종 인터넷 자료와 문헌 등에 잘못된 정보를 넘치게 만들었다. 일본이나 중국어 등을 쓰는 외국 사이트와 문헌 자료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차문은 그 동안의 분란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 인식 위에 가문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류문은 향후 총체적인 노력을 경주해서 남겨진 과제들을 모두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사명을 띠고 있다. 몇 백년 동안 사기에 넘어갔던 주체였다는 죄 아닌 죄에 대한 응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굽은 것이 곧은 것을 물리칠 수 없는 세상을 향해 횃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2008년 12월 11일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학술박사(Ph.D.) 대승공 36대손 류주환(柳朱桓)
Home: http://kenji.cnu.ac.kr/ryu/
E-mail: juwha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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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류씨 종중사 바로 알리기를 하면서 많은 종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듣고 더 많은 종원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바른 종중 역사를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이글을 씁니다. 요즘은 휴대폰에서도 검색하면 차문의 거짓말이 바로 나오는데………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당당하게 말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류차문제와 뒤틀린 가문의식
차 례
1. 후삼국시대 활동했던 사람들의 성씨
2. 차문의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3. 문화류씨 종중 역사
4. 차문과 화합하려면 문화류씨가 수용해야할 내용
5. 문화 류씨 종사 연보
6. 현재 현황

1. 후삼국시대 활동했던 사람들의 성씨(선조 존칭 생략함)
왕건 아버지(용건) 할아버지(작제건), 견훤(상주견씨)아버지 이(정주이씨)아자개 등으로 후삼국시대 활동했던 소위 왕의 아버지 할아버지 성씨가 아들 손자와 다릅니다.
고려초기에는 성씨개념이 확실하지 않아 현대 성씨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류차달호족의 아버지 할아버지 자료 연구가 필요하며 柳씨인지 다른 성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원파록에서 차공도가 강남으로 피신하고 왕씨로 변성하여 왕건의 선조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용건은 도선국사의 말을 듣고 용건에서 왕륭(개성왕씨시조)으로 바꾸고 천하를 다스릴 아들 왕건을 낳게 됩니다. 대승공 류차달의 부 조부 증조 등은 더 연구하여야하며 현재는 알지 못합니다.
차달 류보림 류무선 류진부 류공숙 류승색은 차문이 원파록에서 조작하여 만든 이름입니다.
2. 차문의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2000년 차문은 당시 회장 상임부회장이 중심이 되어 차문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면서 문화류씨는 가성이며 차해 차달이라고 5개국어로 2004년 차문 대동보 만들면서 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라고 하면서 평택 의덕사를 만들어 원파록에 류보림 류무선 류진부 류공숙 류승색이라고 자기들이 만든 이름을 차달(차무일38세손) 차보림(대승공 부) 차무선(대승공 조부) 차진부(대승공 증조) 차공숙(대승공 고조) 차승색(데승공 5대조)  위패를 모시고 또 파주 고려대전에 “대승문도 연안차공 달 선생”으로 위패 모셨다가 고려대전 총제와 사무국장에서 차문에서 물러난 2015년 “차달”위패는 자진 철수 하고 문화류씨에게 2000년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3. 문화류씨 종중 역사
대승공이 후삼국시대 사람임으로 대승공이후 천년인데 차문은 천년동안 차문과 형제라고 하는데 천년동안 형제가 아니고 405년전 원파록에서 차문과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1911년 차문이 대승공 묘소에 친일파 이용원이 쓴 대승공신도비를 세웠으나 1925년대 10여년간 시도기를 보면 차문은 한명도 시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족보는 보통 1권에 문헌편이 있어 선조 묘도, 비문, 사우, 등을 기록하고, 종통편에는 1세 시조 선조부터 후손 본인까지 종원 개개인의 이름 벼슬 호 출생 사망일 배우자 묘 위치 자녀 등이 기록됩니다. 그런데 문화류씨 선조들은 원파록이 나온지 366년 동안 족보를 편찬할 때 마다 문헌편에 원파록을 실었으나 종통편에는 류차달 아들을 류효금 한분만 등재하여 오다가 1976년 류차달의 장자로 차효전을 족보에 넣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차문과 종사를 함께한 것은 지금부터 51년전인 1965년 부터이며 43년동안 차문과종친회를 함께하였고 8년전인 2007년 차류종친회 해체되었는데 차문 말만 듣고 차문과 혼인하지 않는 천년 형제라고 하는 종원은 자신의 무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파록이 나오기 전에 차문과 혼인한 사례가 있습니다.
대승공 사우인 광주 대동사도 1946년 창건되었는데 이후 차문이 시제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는데 1997년부터 차문이 참여하여 성금과 향촉대를 냈습니다. 그런데 2015년 광주 차문 일부가 대동사 소유권이전 소송을 걸어 왔습니다. 이래도 큰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차문과 화합하려면 문화류씨가 수용해야할 내용
① 문화류시 시조는 류효금이다
② 류차달의 이름은 류차달이 아니며 차달(연안차공 달)이며 영락보 가정보는 오류가 있는 족보다.(차문은 두 족보에 차효전이 없다고 잘 못된 족보라고함) 
③ 고려 개국공신록에 있는 류차달의 공적은 없고 차효전이 왕건을 도운 공신이다.
④ 호랑이를 구해 준 사람은 류효금이 아니고 차효전이다.
⑤ 차문이 류차달의 큰아들이므로 류차달의 이름 호 시호 공적을 차문에서 마음대로 바꾸어도 작은아들 류문은 큰아들이 하는 일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아야한다.
5. 문화 류씨 종사 연보
※ 참고 자료--2008년 무자보, 유주춘추, 구월청풍, 대호하루 등
880년  대승공 류차달 탄생(추정).
1196년 대승공 7세 공권 묘지명 발견--노일(4세) 보춘(5세) 총(6세).
1344년 권부처 류씨(류승 딸) 묘지명--시령류씨 대승차달 후손.
1349년 11세 돈 묘지명--문화인 차달은 태조 공신, 아들이 호랑이를 구해 줌.
1416년 14세 량 졸--왕조실록 태종항목에 대승공 류차달(삼한공신)
1423년 문화류씨 영락보 영(14세 검한성공파)--아들 효금
1456년 차원부설원기--문성인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류효전
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대승공 아들 류효금 소개(효전 기록 없음)
1543년 대승공 차달 묘갈문(홍춘경 지음)--대승공이 효금을 낳고 좌윤이 금환을 낳으니
1565년 가정보 희잠(20세 충경공파)--삼한공신 대승공 류차달 아들이 좌윤 효금이다.
1610년 류용수의 원파록 황제-왕씨-차씨-류씨-류차달에서 차효전과 류효금으로
1678년 묘갈개견문(류상운 지음)대승공 묘비 개수
1689년 기사보 처후 (22세 하정공파)--류용수 원파도는 흐리명명하니 후대에 연구하라
1742년 경신보 환문(27세 좌상공파)편찬—류차달 아들 류효금
1812년 차씨 종친회 경상감영 공소--차헌기 강렬공파보 원파록은 조작되었다고 판결.
1863년 대승공 신도비(남병철 지음)--원파록 내용을 기록함
1864년 갑자보(류승기 편찬)--문헌편에 원파록 기록
1911년 차문에서 대승공 신도비 세음(이용원 지음)--원파록 내용을 씀.
1926년 병인보 대승공 향사 시도기에 10년간 차문이 시제에 참여한 기록 없음.
1946년 대동사 창건
1964년 차류 대종회 창립
1976년 차류대종회 선립 이후 발행한 병진보 자손록에도 대승공 아들에 차효전 없음(문헌편에는 대승공 아들이 2명임)
1997년 대동사 보존회 초대회장으로 차문 참여하여 성금을 냄
1999년 차씨유래비--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다.
2000년 차씨역사바로세우기 운동--류문에서 선조를 조작했다는 글 발표
2001년 차씨유래비--문화류씨 가성을 변성으로 수정함
2004년 연안차씨 갑신대동보--대승공 본성명은 차해(車海)이며 차무일의 38세손이다.
2007년 파주 고려대전에 대승문도공연안차공 달“大丞文悼公延安公車達”선생 위패 모심
2007년 차류 대종회 해체
2008년 무자보--원파록 파기
2012년 의덕사 세향--차승색 차공숙 차진부 차무선 차달 위패로 시제 지냄
2012년 대동사 시향--아사류선생 대광차공 좌윤류공 위패로 시제 지냄
2012년 차문에서 류차는 천년간 형제였다는 주장을 함
2015년 차문회장--차문에서 잘 못하였으니 2000년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2015년 고려대전에서 차달위패를 철수하였음.
6. 현재 현황
2015년 문화류씨광주전남종친회를 창립하면서 많은 종원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결과 약 30%는 차문 잘 못으로 인하여 문화류씨 종사를 바로 알게 되었다고 알고 있으며 70%정도는 지금도 차문이 형님집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알고 있는 30% 중에는 20년전 차문이 문화류씨는 가짜성씨이라하여 류문에서 알아본 결과 차원부설원기와 원파록은 조작되었다는 말은 대종회나 파종회에서 들었는데 자기 종중에 가서 설명을 하지 못해 침묵하는 종중임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중고대를 다니는 손자 손녀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알게되어 신라 김언승이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것과 조선 개국공신 배극렴과 왕위 계승 문제에서 조준 행적을 적당하게 섞어 만든 곳이 차원부설원기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차문과는 아무관련이 없는 고려개국 2등 공신 류차달 후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할아버지는 너의 증조가 차문이 큰집이라서 혼인도 하지 않는 같은 뿌리라고 하여 손자에게 할아버지 권위가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이 차문을 받아 들인 오류 때문에 타성씨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대부분 유림들은 조선시대부터 선구자들이 차원부설원기는 위작이라하였다면서 차문에게 속아서 큰집이라고한 선조들을 비웃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정보 공유가 어려워 속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이들은 홈페이지는 관공서나 회사 또는 단체의 공지사항을 볼 때 그리고 블로그는 음식 맛집광고를 볼때는 이용하지만 보통 때는 SNS를 자주 이용하기에 밴드와 페북에 그룹을 개설하여 문화류씨의 바른 종사를 알려보았더니 나이에 관계 없이 많은 종원은 바로 알고 있었으나 일부 종원은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차문이라 큰집이라 했는데 헛소리 하지 말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문화류씨와 차문은 남이라고 하는데 극히 일부정치인이 표를 의식하여 차문과 함께하려는 성향이 있어 가슴 아픕니다.
고위공직자를 지냈거나 정치인 일부는 이런 자료를 보내주면 읽어보지 않고 내 아버지 할아버지가 큰집이라 했다는 말만 합니다.

소위 대학을 나왔다는 종친일부가 원파록에서 말하는 승상류승색은 신라에 승상이란 관직명이 없엇다고 하면 휴대폰에서 검색하면 바로 아는데 우리 아버지가 승상류승색이라했는데 라며 믿지 않습니다.  
2016년 7월 23일

문화류씨 하정공파 광주종친회장 대승공 33세 夏谷 류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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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夏谷류재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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