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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이씨 사료

[스크랩] 김유신 장군 묘의 실체 논란

신문은 왜 오래된 논쟁을 새삼 처음있는 얘기처럼 보도할까?

 

 

선도산[仙桃山 혹은 西兄山]은 신라의 어머니라 불리는 선도성모가 살았다는 산이다. 이곳에는 김씨 왕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왕족의 무덤들이 산을 이루고 있다. 법흥왕릉이 있고 태종무열왕릉이 있고 그 앞에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와 무열왕 9대손인 김양 묘가 나란히 있다. 태종무열왕릉 뒤편에는 무열왕릉만큼 큰 서악고분이 여럿 산처럼 둘러쳤다.

 

무열왕릉을 나와 몇 발자국을 걸어 마을로 접어들면 그 뒷산에 그리 크지 않은(무열왕릉이나 서악고분에 비해) 릉들이 수십 기가 산을 메우고 있다. 47대 헌안왕릉 그의 아들 48대 문성왕릉 등등, 경주 오릉이나 대능원, 서악고분 등을 보고나면 이 능들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시대가 어수선하여 능을 크게 쓸 여력조차 없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란다. 서라벌의 왕도에 인구가 밀집되면서 서라벌 내부에는 이제 더 이상 분묘를 할 장소가 없어졌고 또 불교가 공인 되면서 이제 보편적으로 불교사상이 세상에 널리 퍼져 내세관이 비뀌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현생의 삶이 내세에 그대로 이어진다고 믿어 금은보화와 순장의 풍속이 성행했던 것에 비해 이제는 현생의 업보에 의해 내세가 결정된다는 관점으로 전환되면서 분묘의 규모도 그전처럼 성대하게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법흥왕릉이다. 법흥왕의 능은 규모에서도 작아졌고 또 선도산으로 간 첫번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선도산 둘레를 타고 가면 산 중턱에 가장 화려하고 큰 무덤이 태대각간 김유신묘가 나온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다. 테종무열왕보다 12년 뒤에 타계한 김유신묘는 크기 뿐만이 아니라 화려한 12지간을 병풍으로 들렀고 그 조각이 1,500 전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고 난간석은 그 혼령이 나와 달빛이라도 구경할 것 같다. 어린아이 키만큼의 높이로 놓인 상석의 전면에는 향로인지 술잔인지 음각의 그릇이 새겨져 있다.

 

그로 인하여 문무왕대 타계한 김유신 때부터 석물을 조성하였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생각은 신문왕릉을 만나는 순간, 의구심이 다시 생긴다. 문무왕은 화장을 하였으므로 능이 없으니 비교할 수가 없고 31대가 신문왕이 그 다음인데, 그곳에는 12지간은 있어도 난간석 대신 둘레석의 튕겨짐을 방지하는 버팀돌이 있을 뿐이다. 그 보다 앞선 무열왕의 능은 12지간의 새김도 없고 더구나 난간석이나 상석도 없다. 신문왕 후대로 내려가면 난간석과 상석이 그린 듯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난간석은 언제부터 설치하기 시작했을까. 신문왕릉의 버팀돌이 그 후 멋을 더한 난간석으로 발전해 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장군 묘가 확실하다면 위치나 조형에서 김유신 장군의 묘와 원성왕 괘릉이 단연 으뜸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공이 컸다하나 왕보다 더 화려하고 왕릉보다 더 위에 묘를 조성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김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니 믿을 수 밖에. 얼마 후 자료를 찾다가 나보다 먼저 의문을 갖고 연구한 학자들이 있음을 알았다.

 

이병도 박사는 『한국고대사연구』「김유신묘고」(1976. 박영사)에서 현재 김인문의 묘로 알려진 무덤이 김유신 묘라는 주장한 것이다. 김인문은 삼한을 평정하고 당나라로 인질로 끌려가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은 비운의 장군이며 외교관이었다. 그의 주검은 죽은 다음 해인 효소왕 4(695)년 신라로 운구되어 왕경(서울)의 서쪽 들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의 비명(碑銘)은 조선 숙종대에 낭선군 이우(郎善君 李俁)가 편찬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속편에 실려 있고 그 후 1931년 12월 왜정시절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서악서원의 누문 아래서 재발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봉분이 깎이고 무너져 평지화되고 김인문의 묘가 어디인지 몰라 그 자리에 조선시대 서악서원을 세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왜 지금의 묘를 김유신묘로 정해졌을까? 그것을 수정코자 하는 학자들은 처음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어떤 고증을 거치지 않고 촌노들의 구전을 바탕으로 비문을 세웠다는 것이다. 지금도 남지훈이 세운 태대각각 김유신 묘라고 쓰인 비문이 묘를 지키고 있다. 그 후 그 무덤의 주인은 김유신으로 굳어져 왔다. 그 단초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고증을 하여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두 능의 비교

 

김유신 묘 (선도산 소재 배면 촬영)

 

신문왕릉(낭산 소재)

(이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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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보다 화려 '김유신 장군묘' 실제 주인은?

[중앙일보] 입력 2012.02.27 01:48 / 수정 2012.02.27 06:05

신라 왕릉만 파고든 고 이근직 교수 유저서 주장 … 다시 논란
이 교수 주장의 근거
① 12지신상 그 시대엔 없던 양식
② 무열왕릉보다 신하 무덤이 화려
③ 왕 아래 무덤 쓰던 풍습과 어긋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김유신 장군 묘. 이근직 교수는 ‘김유신은 금산원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장군의 무덤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봉분을 둘러가며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근직 교수 등은 12지신상과 난간 둘레석 등은 김유신 시대보다 후대인 성덕왕 이후에 등장 한다고 주장한다(사진 왼쪽). 김유신 장군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고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당시 구전 등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른쪽).
24일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평일이지만 적잖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묘의 왼쪽 앞에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경주시 이채경(51) 학예연구사는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가며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595∼673)이라면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다.

 묘 앞에 어린이 키만 한 상석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봉분을 돌아가며 난간 둘레석과 12지신상이 장식돼 있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 무덤이다.

태종무열왕릉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귀부가 발견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신라 왕릉 7곳 중 하나다. 신하인 김유신과 동시대 왕의 능인데도 김유신 묘에는 설치된 난간 둘레석도 12지신상도 없이 소박하다.
 김유신 장군 묘를 나와 2㎞쯤 떨어진 태종무열왕릉을 찾았다. 능 입구에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받침돌)만 남은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다. 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 신하인 김유신 묘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고(故) 이근직(1963∼2011) 교수는 이런 의문들에 매달렸다. 26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왕릉 연구』 출판기념회는 그의 유고작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대 문화재학과에 몸담았던 이 교수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라 왕릉 고증에 천착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있는 신라 왕릉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일이다.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이 교수는 왕릉의 주인공이 확실한 곳은 무열왕 등 7곳뿐이라며 나머지는 구전과 사실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유신 장군 묘다.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의 주장을 현장에서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상석과 분묘 난간 둘레석은 분묘 형식으로 보아 훨씬 후대인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 ‘김유신은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원(原)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동시대 왕인 무열왕릉보다 신하의 무덤을 더 화려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왕릉 연구』에서 이런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며 김유신 장군 묘를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 묘를 김유신 묘로 보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무덤 위치가 들판이며, 당시 신하는 왕 아래 무덤을 쓰는 ‘배장(陪葬·딸린 무덤)’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이 있는 것도 김인문 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신라 왕릉 논란은 3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선비 유의건은 “(영조 6년·1730년) 이름 없던 고분 17기의 피장자를 왕으로 바로잡는 과정에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능지기의 전언에 의존한 건 문제”라고 본격 문제를 제기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왕을 배출한 박·석·김 문중이 중심이 돼 구전을 바탕으로 당시 왕릉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왕릉 이름 바로잡기는 이후 추사 김정희, 한학자 정인보, 사학자 이병도로 이어졌다. 이병도 박사도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유신 장군 묘를 이 교수와 달리 45대 신무왕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 때문에 경주시는 사적 안내문 등에 한동안 확실치 않은 곳은 이름 앞에 ‘전해 온다’는 뜻으로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문중의 항의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지금은 이 글자가 사라졌다.

 김유신 장군 묘에 제례를 올리는 김해 김씨 등 해당 문중은 이 교수의 깊이 있는 학설로 문제에 봉착했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교과서의 관련 내용도 고치고 경주 지역의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도 바로잡아야 할 판이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김성식(79) 전참봉은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지만 학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돼 입증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경주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의 명칭 변경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차 때문이다.

출처 : The Pen
글쓴이 : 이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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