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하룻밤 풋사랑
이영백
흔히 역전마을은 인심이 박하다고들 한다. 역 앞에는 막차를 놓치고 나면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관광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사연은 모두가 구구절절할 것이다. 그리고 긴박하다. 노잣돈이라도 조금 있는 사람은 호텔이나 여관을 찾아가겠지만 부족한 사람들은 비록 하룻밤이지만 여인숙을 찾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교동기가 집안 형편으로 나처럼 진학을 못하고 삼촌이 운영하는 여관 일을 도우고 있었다. 역전에 들리면 ‘찬물이라도 한 그릇 마시고 가라’고 손짓한다. 아주 큰일이나 하듯 오랜만에 만나 악수하고, 기다란 여관집 청 마루에 걸터앉아 물 한 잔 얻어 마신다. 우리 집은 농사짓는 집이라 그곳이 그렇게 모두가 신기하였다.
가수 손인호의 “하룻밤 풋사랑”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온다. 그 가사의 내용에 세상 살아가는 풍미가 들어 있기도 하다. 친구가 일하는 여관에서 그 노래를 들으니 방마다 사연들이 배어 있을 법도 하였다.
그때였다. 여관 미닫이가 열리면서 앳된 여성 한 분이 나왔다. 얼른 보아서 윗도리는 겨우 메리야스 하나만 걸쳤고, 속 치맛바람으로 머리에 수건 두르고 세면소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차마 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친구의 전갈로 여성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마치 자기 집처럼 살며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세상의 삶이 무엇인지 모를 일이지만, 타관살이로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지으며 생산되는 것으로 연명하지만 분명 그 아가씨로서는 어찌 삶을 살아갈까 궁금하였다.
고향을 떠나 외지, 특히 관광지 여인숙에 사는 사연이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젊은 여성으로 이런 관광지 역전에서 하필 정착을 하였을까? 정말 사랑에 못이 박혀 흐르는 눈물에도 손수건 적시었을까? 아니면 미련만 남기고 말없이 헤어져야만 하였을까? 애증이 식어버린 하룻밤 풋사랑에 행복을 어떻게 그릴 것이며, 가슴을 움켜 안고 애타는 심정으로 이 밤을 못 잊어 거리를 헤매며 눈물로 벗을 삼는 그런 하룻밤 풋사랑이었을까?
여관의 장독간에 핀 맨드라미〔鷄冠花〕가 뽀글뽀글하게 폭탄머리를 하고 제 키대로 화난 수탉모양으로 으스댄다. 고고한 자태로 나에게 위협하듯 보였다.
새벽 네 시 첫차에 하룻밤 풋사랑을 남겨 두고 슬픈 기적소리로 갚음한다.
(20200420)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 > 늚이의 노래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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