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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중앙대종회 공지사항

[스크랩] DGB50주년 스토리공모전 제1부문 이영백 우수상 받다

이영백 『DGB대구은행 50주년 스토리공모전

1부문 우수상 』받다

영남이공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 /이영백


  DGB대구은행 50주년 스토리공모전 1부문에서 이영백은 우수상(상금50만원)을 받았다. 대구은행은 1967년에 창립하여 금년이 50주년이었다. 이에 1967년 이전 출생자는 1부문, 이후 출생자는 2부문으로 공모하도록 되었다.
 지난 2017년 8월 18일자로 공모를 마감하여 심사를 거쳐 2017년 9월 20일(수) 10시 수성구에 있는 제1본사는 리모델링에 들어갔으며, 칠성동 소재 대구은행 제2본사 1층 카페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임환오 부행장의 인사말에 이어 시상을 수여하였다.
 한편, 이영백의 작품은 1부문 우수상에 선정된 제목은 “웃다-꽃비 종이 은항(銀行)통장”이다.  DGB대구은행과의 얽힌 삶을 감동적으로 잘 그려내었다고 한다. 총 응모자 250여 편 중에 선정되었으며, 수상한 여타작품과 함께 10월 중에 합본으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2017 DGB스토리 공모전 1부문 우수상 수상

웃다-꽃비 종이 은항(銀行)통장


영남이공대학교50년사 편찬위원/수필가/이영백

 

 나는 그렇게 표지에 가족 셋이 이빨이 다 보이도록 활짝 웃고 있는 종이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나선다. 이번 달에는 연금 받는 날 하루를 지나서야 동네 범어3동지점에 들린다. 번호표를 뽑고 벤치에 앉는다. 내가 자리한 앞에는 잡지들이 서로 자기를 보아달라고 눈짓하고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무슨 책이던 눈에 들어 오기만하면 그냥 두지를 않는다. 꼭 터치하고 싶고 아니면 기어이 속살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나의 번호표에는 세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고 찍혀있었다. 순서 기다리는 것에는 괴이치 않고 「경북의 邑城」이라는 잡지를 집어 든다. DGB대구은행에서 발행한 ‘향토와 문화 83’이란 교양잡지를 한 장씩 넘겨다보고 있었다. 내 번호 멘트(announcement)가 들리면서 언제나 그렇듯 창구여직원은 고객을 늘 상냥하고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종이통장도 새로 발급받아야 하고, 생활비도 찾아야 한다고 말을 전하였다. 우리가 은행이란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대구은행에서 발급한 종이 은항(銀行)통장 하나를 갖고 산다. 은행이란 말은 어떻게 우리 곁에 찾아왔든가? 그 말은 중국으로부터 왔다. 상인이 사용하는 행(行)은 원거리 무역에 광물질인 은(銀)을 사용했는데, 행이 금융업의 주체가 되면서 은행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단다. 은행(銀行)은 그 발음이 ‘은항’임에도 우리는 은행이라고만 말하고 산다. 이는 오랜 기간 습관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약정속성(約定俗成)현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사실 도회지에 나와 살면서부터 생애 처음 통장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필요성이나 만들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부끄럽지만 잘 모르고 살았다. 대학을 다닐 때도 논 한 마지기 판돈 11만 원을 어떻게 보관하면서 사용할까 걱정하였다. 궁여지책으로 1970년 공업단지 울산에서 장사하시던 끝에 매형에게 현금을 맡겨 놓고 다달이 이자(?)조로 받아 학자금으로 갖다 썼다.
 그 당시에는 왜 은행을 모르고 살았을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알았지만 은행에 가려면 많은 돈을 거래하여야 할 것만 같았다. 왠지 돈을 은행에 맡기는 것이 두려웠거나 아니면 적은 금액이라 이용할 생각을 아예 못하였던 것일 게다. 물론 시골이라도 가끔 소도시에 나오면 무슨, 무슨 은행이라는 간판이 여럿 걸린 것을 보고 살았다. 특히 아버지(1899己亥생)는 전근대농업시대 사람으로 통장을 모르고 사셨다. 나도 덩달아 마치 은행을 활용하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먼 일인 것처럼 하고 살았다. 1973년 바닷가에 교사발령을 받았다. 매월 17일이 되면 경리업무 선생님이 시내로 출장 가서 현금을 인출해 왔다. 수업도 저버리고 교 ․ 직원 월급봉투에 일일이 낱장을 헤아려 넣는 일과 동전까지 챙겨주셨다. 퇴근시간에 이를 받아 확인하였다. 시골은 은행도 없었기에 통장개설의 필요성을 모르고 살았다.
 총각이었을 때는 월급을 현금으로 받으면 제일 먼저 하숙비를 내었다. 또 낙찰계를 들어 매월 부어 나갔다. 남은 현금은 지갑도 없어 혹시 잃어버릴까봐 남이 모르는 작은 항아리 속에 집어넣어서 뚜껑을 잘 덮어 두고 다녔다. 결혼하고 나서는 부인에게 매달 부지런히 현금을 꼬박꼬박 온전하게 배달하였다. 혹 비자금은 나만이 아는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시 적당히 끄집어내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면 잊어버리고 살았다. 시골에서는 다방도 없어서 돈쓸 일이 거의 없었다.
 내자가 도회지 출신이었기에 몇 달치 봉급을 현금으로 모아서 처가에 가져다가 늘여 달라고 하였다. 은행에 저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빙모님이 사채를 놓았다. 사채 이율이 높아서 원금을 떼일까 봐 불안감은 있었지만 차곡차곡 재산이 잘 불어났다. 3년 만에 그 목돈으로 도회지에 아파트를 샀다. 그때까지도 은행에 거래할 필요성이나 통장을 개설할 줄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
 1981년부터 대도시 대학에 교육행정가로 근무하였다. 대학에 근무할 때도 처음에는 경리계에서 봉급을 현금으로 지급하여 주었다. 그것도 일만 원짜리로 봉투에 넣어서 부품하게 만들어 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그 해 10월부터는 전자금융업무발달로 현금지급을 안 하고 통장을 개설하여야 무통장 입금으로 지급 받을 수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평생에 은행통장이라고는 안 만들어 보았기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신분증과 도장을 들고 대학 앞 은행창구에 찾아갔다.
 창구여직원은 예쁜 유니폼을 입고 매우 상냥하였다. 통장개설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통장에 인감도장을 찍고 비밀번호 나중에는 네 자리로 바뀌었지만 세 자리를 정하라고 하였다.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던 숫자로 하였다. 예쁜 디자인에 깔끔하게 인쇄된 종이통장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인생 최초로 1981년 10월 1일 통장을 개설한 첫날이기에 더욱 잊을 수가 없다. 현재는 비록 37년 전에 만든 통장의 번호이지만 015-07-13583×이라는 열한자리 숫자를 언제 어디서나 달달 외울 정도로 애착이 가는 통장이 되었다. 그날 이후 통장번호는 그대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오늘 서른다섯 번째 재발급한 새 통장에는 이순구 작가의 통장표지화 해설이 있었다. 통장 뒤표지에 실린 해설에서 제목은「웃다-꽃비」다. ‘봄은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듯 엄마와 아이는 찬란한 봄을 맞이한다. 온 몸으로 땅의 기운을 받으며 피우는 수선화를 배경으로 별처럼 피어나는 꽃들의 희망을 예기한다.’라고 설명도 명품으로 해 두었다. 통장의 예쁜 그림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 비록 인터넷뱅킹은 못할지라도 앞으로 이 통장을 사랑하고 살 것이다.
 고객번호 110262941번으로 기재된 나의 통장은 날마다 늘 곁에 두고 생을 마칠 때까지 오래오래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직장생활에서 수수료 면제를 기획하여 두었기에 현금지급기가 열려 있는 시간이면 언제 찾아도 좋다. 이제는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아주 편리하고 최초로 만든 통장번호가 들어 있는 나의 첫째 손에 곱히는 귀한 종이 은항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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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정속성(約定俗成)현상 : 行은 ‘다니다’라는 동사일 때는 ‘행’으로 읽지만, ‘줄(Line)’ 또는 ‘점포’라는 명사일 때는 ‘항’으로 읽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항을 행으로 읽는 현상이 있었다.

출처 : 청림작가 이영백
글쓴이 : 청림작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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