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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이른 아침에

[스크랩] (과제 9.모자/노란 외별 달린 VIET-NAM 붉은 모자/(18기/이영백)

 ● 수지아카데미과제 9. 帽子(4/30)

 

노란 외별 달린 VIET-NAM 붉은 모자

(18기)이영백

 모자 쓰기를 평소에도 싫어하였다. 작은 키, 못 생긴 얼굴에 모자까지 얹어두면 아무래도 태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결혼하고부터는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걸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나를 보는 내자가 꼭 입을 대었기 때문에 되도록 민 머리로만 나다녔다.

  35년째 직장을 근무하였기에 머리도 식힐 겸 베트남 할롱베이(=下龍彎, Halong Bay) 35일 해외여행을 떠나려고 하였다. 해외여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지인 다섯 명과 더운 나라에 가면서 모자도 안 가지고 갔다. 마치 간단히 바람 쐬러 나가듯 준비하였다. 인천공항 3층에서 KE 683 밤비행기를 타고 베트남 하노이 노이 바이 국제공항으로 훌쩍 날아갔다.

  늦은 밤 낯선 하노이 하늘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하물며 한 나라 수도의 국제공항인데 조명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전기사정이 좋지 않겠다고 느꼈다. 땅을 밟기도 전에 이미 비는 내리고 있었다. 입국신고를 마치고 짐도 찾았다. 조용한 국제공항에서 깃발 든 현지가이드(=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여성)를 쉽게 만났다.

  밤비 오는 이국도심에서 방금 지나고 있는 다리를 LG에서 만들어 주었으므로 깃발을 상시 게양해 놓는다고 하였다. 하노이에는 오토바이가 많았다. 일본에서 오토바이를 팔기위해 섬에까지 다리를 놓고, 포장도 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편의를 위한 인도(人道)는 설치하지 아니 하였다. 비만 오면 진흙이 질퍽거려서 걷는데 매우 불편하다고 하였다.

  어둔 밤 속으로 낌렛호텔(KİM LİȆN HOTEL)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호텔이름에는 이상한 부호가 붙어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서글픈 사연이었다. 한 때 일백여 년을 중국이 지배하면서 한자를 배워야 했다. 또, 프랑스가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로마자 위에 여러 가지 부호를 달아서 발음하는 영어와 다른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정에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새벽 여섯 시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우리들 잠을 깨우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곳은 호텔 곁 커피숍이었다. 모닝콜도 아니면서 시끄럽게 하여 잠을 깨워 주었다. 덕택에 일찍 일어나 호텔주변을 둘러보았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아침 먹고 호텔로비에서 대기하였다. 그 짧은 시간에도 정전(停電)이 여러 차례 있어서 종업원이 촛불 켜기와 끄기에 바빠하였다. 마치 우리나라 1960~70년대를 보는 것 같았다.

  닌빈을 거쳐 땀꼽으로 갔다. 삼판(=노 젓는 대나무 조각배)을 타는 것이었다. 삼판을 운영하는 것은 국가에서 미망인들에게 수입을 올리기 위해 마련된 국책사업이었다. 여성이 노를 젓기에 힘이 부족하였다. 동행한 키 크고 장대한 G선생이 노를 대신 저어 갔다 왔다.

  관광버스의 속도는 50Km로 제한해 두어서 과속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1차 발견되면 경고, 2차는 벌금물리고, 3차는 바로 구속이라고 하였다. 짧은 거리이지만 천천히 다녀서 느림의 미학을 톡톡히 맛 보았다.

  노란색으로 칠한 집들은 학교와 관공서이었다. 학교에는 운동장이 없었다. 식민지 국가에서 체력단련으로 독립운동을 할까 두려워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니 무서운 교육정책이었다. 또 여학생에게도 마약성분이 든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허용하여 폐인이 되도록 유도하였다고 하였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려는 무서운 선진국 행태이었다. 일제침략기를 겪은 우리나라를 떠 올려 보았다.

  3일차 삼천여 개의 섬이 있는 할롱베이를 하루 종일 관광하여야 했다. 섬이 많은 이유는 석회가 녹아서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날도 바다빛깔이 석회가 녹아서 그런지 마치 우유빛깔로 뿌옇게 보였다.

  선착장이 멀지 않아 바닷가로 걸어 나갔는데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목선(木船)들이 마치 전쟁이 발발하여 출전하는 판옥선(板屋船)처럼 즐비하였다. 형형색색 깃발을 단 수백여 척의 배가 동시에 저마다 바다관광을 향해 출발하였다. 동행한 고교 체육교사였던 G선생은 군인을 해군사관학교에 복무하여서 그런지 마치 전쟁 중에 군함을 지휘하듯 높이 올라서서 항해 독촉을 부르짖고 있었다.

  4일차 한 기둥 사원을 둘러보고, 곧장 호치민 박물관으로 갔다. 입구에 해먹을 한 개 천 원이라고 해서 두 개를 샀다. 호치민 묘지 입장 시에는 카메라, 라이터 등을 일체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이드에게 모두 맡겨두었다. 한때 관람객이 불씨를 투척한 적이 있어서 그렇게 엄히 단속한다고 하였다. 호치민 묘지에 들어서니 5미터 간격으로 군인들이 베트콩 모자를 쓰고 있었다. 총 들고 지키고 있어서 오싹함을 느꼈다.

  호치민 생가에 들렀다. 수목원에는 보기 드문 연리지(連理枝)와 연리목도 있었다. 거대한 어미 보리수에서 뻗은 뿌리에 싹이 나오면서 변이가 생긴 복령(茯笭)을 생경스럽게 보았다. 넓은 호수 곁에 수밀도(水蜜桃)처럼 생긴 열대과일이 붉으락푸르락 먹음직스럽게 달려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고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장된 사무실을 만들어야만 했던 모양이었다. 베트콩 모자를 쓴 호치민이 실제 숨어 살았던 위장된 작은 방을 들여다 볼 수도 있었다.

  늦은 시간에 4일 동안 기름기 음식만 먹었다가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니 소화가 원활하게 되었다. 밤이 되자 수상(水上)인형극을 보고 하노이 노이 바이 국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하노이, 할롱베이를 통하여 베트남을 들여다보게 된 기회이었다.

  공항에서 유별나게 한 곳에 베트콩 모자를 쓴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베트남인답게 정글용 모자를 썼다. 그 청년이 해외에 취업되어 마을 주민전체가 환송하러 나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한 때는 김포공항 송영대가 복작거린 적이 있었다. 오버랩이 되었다.

  이제 기념품을 사려고 면세점에 들렀다. 마땅히 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난히 나의 시선을 끈 하나가 있었다. 얌전히 걸려 있는 빨간색 모자이었다. 그것에는 커다란 노란색 외별 하나 밑에 VIET-NAM이라는 흰색 글자를 새겨 둔 것이었다. 값도 싸서 그 모자를 선택하여 샀다.

  근교 산으로 등산하면서도 모자쓰기를 싫어하였다. 노란색 외별 달린 붉은 모자는 쓰지 않으면서도 굳이 들고만 다녔다. 그 모자를 쓰면 내자가 보기에는 내가 베트콩 같다고 했기 때문에 쓰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모자는 여럿 있었지만, 이제껏 노란색 외별 달린 VIET-NAM 붉은 모자를 장롱에 모셔만 두었다. 오늘 등산에는 왠지 그 모자를 꺼내어 쓰고 베트콩이 되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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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2. 청림/20100.)

 

              ● 이영백(李泳伯). 1950년∼ . 경주産. 號 靑林.

   전)초등학교 교사·연구주임교사(8년)/영남이공대학 교무과장(행정 26년 4개월)

   현) e 이야기와 도시 대표.

   ♣기별처 : 業務-752-0096, 손기별-011-806-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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