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지성 아카데미 과제 3. 좌충우돌(3/19) |
3월 5일생이 어때서
이영백
사람이면 누구나 생일은 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은 자기 생일이 없다. 어릴 때 읽은 소설 중에 “생일 없는 소년”이라는 제목도 있었다. 요즘은 한우(韓牛)도 생일이 있다. 그것도 중요하다고 관에서 만들어 준 패를 목에다 걸고 살아간다.
공부(公簿)에 생일을 기록할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부모님의 무지렁이로 인하여 생일이 여러 가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연도(1957년)에 가서 음력으로 사월 열이틀이라고 하니, 역산으로 햇수를 쳐 올라가서 양력으로 환산해서 1950년 5월 28일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학교 간다고 호적초본을 떼 오라해서 보니 3월 5일이다.
그 이후로 생일은 쭉 양력으로 3월 5일로 굳어졌다. 이 날이 나에게 이래저래 좋은 날이다. 물론 내가 태어나 관(官)에서 기록된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은 슬프기도 한 날이다. 사실 태어난 날은 1949(己丑)년 음력 사월 열이틀 날이다. 이를 다시 만세력에 찾아보니 5월 9일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1949년 5월 9일이 내 생일인 것이다. 어찌 똑똑하지 못해 본래 태어난 날은 간곳없이 사라졌고, 1950년 3월 5일이 임의로 지정되어 나의 생일로 되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 열 번째 막내로 햇빛을 보았다. 위로 형님이 넷이요, 누나가 다섯 분이다. 제일 꼴찌로 태어남은 우리 집을 십남매라고 흔히들 알고 있다. 어찌 보면 막내로 태어나서 귀여움을 받았을 것이고, 좋았을 것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막내로 태어난 것이 참 불행하기도 하였다. 백형과 나이차이가 꼭 두 띠 동갑이다. 어떻게 보면 자식뻘이다. 백형의 맏아들, 장조카가 살았더라면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이며, 바로 위인 넷째 형과 동갑이 되었을 것이다.
일자무식한 당신께서는 자식 욕심이 대단하였다.
“아버지, 가난한데 왜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까? 공부를 안 시킬 양이면 그만 낳아야지요?”
“야야! 그런 말 하지마라. 네 고조부가 무후(無後)였고, 매우 빈한하여 증조부 대에 아무도 양자를 안 오려하니 한참 먼 집안에서 양자로 오셨지. 그만큼 집안에 자손이 귀했지. 내 아버지도 독신이지. 겨우 우리 대에 사남매잖니?”
“그래도 그렇지요. 자식만 많이 낳아 놓고, 공부를 안 가르치면 온당한 사람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말 하지마라. 사람은 태어나면 제 먹을 복은 다 타고 난다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제 노력하기에 따랐고. 봐라! 네 큰 아버지도 아들 하나에 육남매, 네 삼촌도 아들 하나에 육남매, 나는 아들·딸 반반씩 열을 낳았지. 내 할일은 했지. 네 고모는 배태(胚胎)도 못했지. 이 모두가 가문이 되려면 자식이 많아야 한다는 것에 내가 알고 내린 결론이다.”
“예……?”
정말 야릇한 일은 다음이었다. 다섯째 누나, 나에게 막내 누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 해인, 세 살 때 세상을 하도 빨리 살아서 나물하러 가고 말았다. 또, 나를 임신하였는데 마마까지 겹쳤다. 그런데도 출산하여 산고의 고통이 배가하였으며, 결과로 얼굴이 살짝 얽어 곰보까지 되셨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서 막상 호적에 올리려니 조금 전에 막내딸 죽고 사망 신고한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귀찮아서 내가 태어나도 반갑지 아니하였고, 제때 호적에 올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태어나서부터 병약하니까 곧 죽기를 기다린 것이다. 당시만 하여도 어린애들이 죽어서 동네 한 적한 곳마다 애장한 자리에 돌 세 개를 놓아 둔 곳이 많았다. 거의 일 년이 지나갔는데도 죽지 않고, 바락바락 살아있으니까 그때서야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생일은 실제 태어난 날이라야 하는데, 출생신고를 안 하면 벌금이 나오게 되니까 벌금 물지 않으려고 관에다 신고한 날로 되어버렸다. 사실상 나의 생일 날짜는 3월 5일이라는 날이 나의 생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단지 벌금 물지 않으려는 날짜일 뿐이었다.
그러나 덕을 본 것도 있다. 태어나고 이 주일(법적으로 14일)이내에 재깍 호적신고를 하였다면 공직자였던 나에게 연금기간을 일 년이나 연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 어찌 이런 사실을 알았을까? 그것도 2월 말까지면 육 개월이 또 줄어들었을 텐데 3월하고, 단지 5일이 지난 3월 5일이었으므로 정년기간을 5일로 육 개월이나 더 얻어 주었던 것이다.
당시 시골에서 호적을 제 때에 한 사람들이 몇이나 있었을까? 초등학교 에 입학하고 보니 같은 동기인데도 다섯 살이나 많은 동기가 당시로서는 수두룩했다. 결과로만 보면 일 년 지나고 나서 호적 신고한 것은 대단히 사회의 규범을 잘 지킨 것으로 드러난다.
내자(內子) 집안에서는 장인이 대학교까지 다니셨으니 개명(開明)한 집안이어서 아이가 태어난 날에 모두 재깍 호적신고를 하였단다. 정확하기로도 너무 정확하여서 처제는 신체가 약했는데 그대로 학교를 입학하게 된 사연도 곁들여진다.
무식이 풍부하면 가문이 자멸한다. 삼대가 무식하면 가문이 끊어진다고 한다. 삼대가 제사에 무축(無祝)하면 깜깜한 가문이 된다고 한다. 자식을 낳았으면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공부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시켜야할 것이다. 배워두면 그 획득한 지식과 친구들과 더불어 어떻게라도 제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곧잘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이 공부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도 알 수 있다 하지 않았든가?
생일을 임의로 관에다 신고하였기에 좋은 점도 있었고, 나쁜 점도 있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제 나름의 노력에 따랐다는 것을 새삼 철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의 출생신고가 이런 좌충우돌로 이뤄졌으나 일생에 한 번쯤 해보는 것도 인생을 사는데 복선(複線)을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나의 생일이 뒤죽박죽에 좌충우돌로 엇바뀌는 현실에서 희비쌍곡선을 만들었다.
생일 3월 5일은 정말 좋은 점도, 나쁜 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날로 관에 신고한 날짜가 되면 금융계통이나 휴대폰 회사에서 생일을 희한하게도 알고 축하의 매세지가 전달해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3월 5일생으로 살아가는데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다하나 사실은 관에서 인정하여 주민자치센터에서도 2015년 3월 5일이 되니 만65세면 노인(老人)이라는 반갑지 않은 닉네임이 하나 전달되어 왔다. 이후 도시철도에 무임승차할 수 있는 자가 대구광역시에 한 명 더 늘어났을 뿐인데 말이다.
● 이 영 백(李 泳 伯). 1950년∼ . 경주産. 호 靑林. 대구교육대학 졸업. 전)초등학교 교사·연구주임교사(8년). 전)중·고등학교 자원봉사 국어교사(2년). 전)영남이공대학 기획·홍보과장 및 교무과장 역임(26년 4개월). 현) e이야기와 도시 대표. ♣기별 처-業務:752-0096, 自家:755-1640, 손기별:011-806-2010. ○카 페 : cafe.daum.net/purnsup ○블로그 : blog.daum.net/seons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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