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수필 |
20. 기능직원과 고향 술집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술은 술로서 문제를 일으키기 쉬우니 술을 항상 조심하라.” 아무런 글자 한 자도 배우지 않은 나의 어머니(松谿堂婦人)께서 이 어려운 말씀을 나에게 전달하여 주고, 일흔 둘(1905∼1976)에 그만 돌아가셨다.
1973년부터 교사를 하면서 처음에는 숟갈로 마시며 술을 배웠는데 이제는 술이 말술〔斗酒〕도 모자라고, 술만 있으면 밤을 새울 수라도 있을 것 같았다. 술을 이렇게 마셔대니 자연히 내자의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다시 마시는 것이 막걸리요, 막걸리를 마시면 계속 마시니 이 또한 큰일 이었다.
1979년 늦가을 오늘은 토요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농장 J주사에게 많은 일을 맡겨 두고, 그 동안 1년 반이나 지났는데도 술 한 잔 마음 놓고 사드린 적이 없었다. 역시 기능직이지만 공무원 신분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L주사가 있다. 이 분은 연세가 들었어도 우리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았고, 또한 급식 식자재구입에 보조업무를 하지만 기능직으로 역시 공무원 신분이었다. 토요일이라 내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대구 친정으로 갔다.
사전에 던져둔 말이 있었다. 학교 관리에는 K주사가 있지만 연세가 많았다. K주사는 술을 많이 드시지 못하였고, 학교도 관리하여야 했으며 저녁에 J주사와 L주사에게 선약을 하여 두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서 퇴근할 사람은 모두 퇴근하였고, 이제 학교농장 전체는 교장 선생님이 계셔서 나도 훌훌 털고 나의 집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일부러 늦게까지 있다가 J주사와 L주사를 모시고, 나의 고향 불국사 기차역전으로 나섰다. 두 분 자전거를 타고 나를 따라 나섰다. 벌써 어둠사리가 치면서 살살한 가을 날씨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연구 주임선생님! 오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예? 무슨 일은, 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 동안 학교 일을 잘하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저녁이나 하러 가는데요.”
그곳은 저녁만 되면 학교농장 지키기에 얼이 나갔고, 또 밤이 되면 경비 일에만 몰두 하였던 것이 사실 아니었던가? 오늘은 모처럼 내자도 친정가고 없는 날인데 혼자 저녁을 먹느니 기능직 아저씨들의 노고도 치하할 겸 저녁이라도 함께하려던 것이라니까 두 아저씨 모두 고마워하였다.
자전거를 저어타고 시래교(時來橋)를 통과 하자말자 나타나는 불국시장 들어가는 입구 못 미쳐 차성(車城)이씨 양세 정려각(兩世旌閭閣) 바로 뒤가 당시 내가 세 들어 살던 집(골기와)이었다. 자전거 세 대를 모두 우리 집에다 세워놓고, 이제부터 나를 따라 걸어가자고 하였다.
“저녁부터 먹을까요? 오늘 모처럼 내자도 없이 해방되었고, 술도 한 잔 하였으면 좋겠는데 무엇부터 할까요?”
“술부터 먹으러 갑시다!”
역시 그 동안 얼마나 술이 고팠으면 J주사의 일성이 술이 먼저였다. 그런데 우리 L주사는 술을 잘 못하였다.
“L주사는요?”
“예. 저는 그저 안주나 먹지요.”
“그러면 저녁 먹기 전에 술 한 잔부터 하러 갑시다.”
3인이 일치하여 합의를 보고, 불국사 역전에 있는 술집으로 갔다. 아니 아가씨가 있는 술집으로 갔다. 바로 이곳은 내가 B초등학교 다닐 적부터 하던 바로 그 술집이었다. 1950∼60년대만 하여도 관광지 입구인 이곳 불국역전에는 시장(市場)이 있었고, 관광객과 더불어 장날에는 흥청망청하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그 술집에 언제라도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제 성인이 되어서 드디어 그 술집에 들러본 것이다. 용케도 그때까지도 술집에 아가씨를 두고 있었다.
어둠사리 치는 술집에 건장한(?) 남자 셋이, 아니 봉(?) 셋이 들어서니 아가씨 둘이서 호들갑을 떨며 오늘날 마치 로토처럼 땡 잡았다고 치맛바람으로 쫓아 나온다. 하하하 바로 이것이었다. 감포에는 거의 매일 술집을 다녔었는데 G2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지난 1년 동안 숨도 한 번 제대로 못 쉬고 매달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우선 술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막걸리든 맥주든 모두 내가 삽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안주도 많이 드시고, 술도 낫게 잡수시기 바랍니다.”
“아니, 무슨 날입니까?”
“무슨 날은? 그 동안 J주사와 L주사에게 고맙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무슨? 여하튼 그렇게 해 주신다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어디 누가 우리 사람 취급이나 합디까?”
“아, 그래서 오늘 모두 사죄도 하고, 내가 모두 두 어른(?)께 술도 삽니다. 마음 놓고 잡수시고, 아가씨도 마침 둘이네. 오늘 모처럼 객고를 푸셔도 됩니다.”
“예에?”
“놀라시기는 언제 아가씨 집에 술 드셔 보셨습니까?”
“아니, 참!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렇게 해 볼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요? 오늘은 제가 모두 책임집니다. 자! 한 잔 합시다!”
드디어 맥주를 들여다 놓고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이제까지는 학교 앞에서 막걸리 받아다 두고, 김치조각으로 안주 하던 것이었는데 오늘은 아가씨가 곁에서 술을 따라 주고, 고기나 마른안주에 맥주를 곁들이고 술집에 앉았다.
J주사는 술을 아닌 맥주를 잘 마셔 댔다. 정말로 이렇게 술맛을 아는 분이 그 놈의 돈 때문에 그렇게 참고 살아야 하였는가 보다.
L주사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고 식초공장을 차렸다. 맥주 한 잔에, 아니 컵에 모셔 두고 넘기지도 못하고 부은 맥주 구경만 하고 있었다. 자연히 맥주의 거품은 다 사라지고 노랑 맹물만 남아있다. 술맛 없겠다.
술을 마시고,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마시고 그것도 아가씨를 곁에 두고 술을 마시니 술맛이 꿀맛(?)이었다. 두 분도 남자인지라 곁에 둔 아가씨를 가만히 둘 턱이 없었다. 점점 도가 지나치니 19금이 되었다.
맥주는 술이 약간 오르면 화장실에 들락거리면서 또 새로이 먹게 되는 것이 맥주다. 아마도 여덟시에 술집에 왔나 싶은데 벌써 어느덧 열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꾸 붉은 색 술병의 수는 늘어만 가는데 이 술집 아가씨는 확실히 우리가 봉이었다.
겁도 없이 비싼 맥주를 자꾸 마시고 또 마시고 안주도 시키고, 또 시키고 자꾸 빈 그릇만 늘어갔다. J주사도 이제 보니 술꾼(?)이었다. 정말 술친구로는 제격이었다. J주사는 어찌 보면 덩치가 큰 분이었다. 술을 마시고선 화장실을 갔다 오고, 그렇게 자꾸 술통을 놓아가고 있었다. 마시자! 오늘 마시자! 하루를 술로서 친구하고, 술로서 속마음을 털어 놓고, 남자대 남자로서 서로의 이야기를 꽃 피워가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 이 술집에서 아가씨들이 줄을 잇고 술꾼들이 아가씨를 만나보려고 서로 술을 청하는 그런 시대이었던 것을 회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오늘과는 많이 풍경이 다르지만 그래도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 본 장면과 곧 어울리다 사라진다.
내가 오래 전에 두 분께 술을 샀어야 하는데 정말 시간을 얻지 못해서, 시간을 찾지 못해서 그렇게 1년 반이나 지나 왔던 것이었다. 모두가 내가 미련(?)하여서 고마움을 표시하지도 못하고 그저 일만 자꾸 시켰으니 얼마나 원망을 하였을까?
사람은 모두가 똑같다. 아니 평등하다. 특히 먹는 음식으로서 구분 지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동안 J주사와 L주사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지간히 술도 오르는데 갑시다.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주무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벌서 시간도 많이 됐는데 혹시 교장 선생님께서 찾으실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아이고! 밤인데 뭘. 오늘 하루만이라도 잊고 사이소.”
그렇게 그날 J주사·L주사와 함께 나의 고향 근교에서 술자리를 동행하였던 것이다.
(푸른 숲/20100-20130421.)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 > 청림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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