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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59. 그해, 봄의 연명

59. 그해, 봄의 연명

 

이영백

 

 인간으로 태어났다. 1949 4월 열이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경상북도 경주군 내동면 시래리 330번지에서 오후 세시 반에 고고성을 지르며 찾아 나왔다. 그러나 산모인 엄마는 천연두 마마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내가 태어난 것을 묘사할 수 없기에 나는 겨우 이렇게밖에 기록할 뿐이다.

 그래 꼭이 625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그 때는 사람살이에 너무 어려운 한 해였던 것이 분명하였다. 날이 가물어 사람들이 기근을 면치 못하고 목구멍에 풀칠할 것조차 없던 시절에 열 번째로 나는 태어난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마마로 인하여 목숨조차 연명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난 아기로 큰형수의 젖을 얻어먹고 살았단다. 큰조카는 나보다 다섯 해가 빨랐으며, 마침 둘째 조카가 두 해 빨랐기에 큰형수의 젖을 얻어먹고 살 수 있었다고 마을 촌로들이 나 들으라고 어깃장을 자꾸 놓는다.

 조금 자라면서 큰형수 젓 물림이 어려워지자 누나들이 흰죽 끓여 나에게 먹였다. 그것도 5년 내리닫이 가뭄에 시달려 쌀알이 없던 시절에 흰죽 끓이기는 쉬웠을까? 난 아직도 아기였기에 세상천지 그런 말을 믿지 못하고 어렵게 병치레하면서 자랐다. 다만 사실인지는 이렇게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쉬이 죽으라는 법이 아니기에 사람의 목숨일 붙어 연명하는 것이다. 그냥 세상의 사람아들로 생명을 연장하여 그냥 살아남았다.

아직 얼마 되지 않는 나이이지만 벌써 세 번의 죽을 목숨을 연장하여 오늘날까지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 아닌가?

 첫 번째 죽음을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남의 집에서 날 오징어무침 회를 먹고 얹혀서 두 눈이 똑바로 정지되었다. 지나가던 촌로가 인진(茵蔯)쑥 즙을 내어 먹고 나의 막힌 숨을 소통시켜 주었다. 깔딱 넘어가다가 살았는데 살고 보니, 그렇게도 시원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고2학년 때 입주 가정교사 하다가 11월말에 연탄가스를 먹고 천장이 내 목까지 올 때는 깔딱 죽는 줄 알았다. 마침 여주인이 문을 열어 환기하여 살았기 망정이지 아니면 바로 황천 행이었다.

 세 번째는 의성에 새조개 주우러 갔다. 여름밤 물속 깊이 들어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물 먹고 퍼덕거리다가 누가 던져준 막대 잡고 살았다.

 아직도 삶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모진 삶을 연명(延命)함이다. 그래. 사람의 목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은 수필마저 쓰려고 연명한다.

 나는 그해, 봄에 연명하였기에 아직도 살아 있을 뿐이다.

(20200530. 윤사월 초여드레. 코로나19 때문에 본사월 초파일을 오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