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나의 어머니
이영백
나의 어머니는 남자 이름처럼 들린다. 경주최씨 두봉(崔斗鳳). 근세조선 고종 광무10년(1906)에 태어 나셨으니 여성으로서는 불행한 시대였다. 왜냐하면 4년 뒤에 나라 잃어 일제강점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근세조선 왕조시대에서 전근대 식민지시대를 거치며 살아온 불운의 여성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여성으로서 고달프고 대우받지 못한 그런 삶이었다.
나를 낳은 1949년은 6ㆍ25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이었다. 삶에서 전쟁을 겪는다는 것은 특히 여성으로서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낳아주었다. 다시금 나는 “부모은중경”을 펼쳐 보았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다섯 째 막내누나가 호부 세 살로 호열자(虎列刺, cholera) 앓아서 갔다. 그 자리를 메꾸려고 내가 태어났다. 게다가 마흔넷에 마마(媽媽)를 하여 차마 사람의 얼굴이 아니면서도 출산하였으니 어찌 혹독한 시련이 아니었겠는가. 마침내 나의 어머니는 마흔넷에 곰보가 되었다.
열아홉에 일곱 살 많은 노총각 아버지를 만나 서른여덟에 며느리를 보았으니 이 또한 대략난감 하였다. 아버지 괴팍한 성격에 제때 일이 잘 안되면 어머니만 몰아붙였다. 많은 자식에 집안 대소사를 큰집 제치고 일 년 열두 번 제사까지 모셨다. 내가 서당 다닐 때 겨우 종형 집으로 제사를 천이하여갔다. 둘째며느리가 큰집 역할을 톡톡히 맡아하였다.
남들은 부자라고 하였으나 모든 것을 아껴야 하였다. 남의 식구인 셋 머슴들의 철따라 옷 준비를 하였다. 베틀에 앉아서 베 짜서 옷까지 바느질하여 만들었다. 그 수고로움으로 어머니의 몫을 모두 해내었던 것이다.
첫째 딸 순흥안씨 대종손 집으로, 둘째 딸 경주최씨 해병대 하사관출신 부산에, 셋째 딸 달성서씨 초등학교 기능직으로 울산에, 넷째 딸 함창김씨 세무공무원에게 결혼 일 주일 만에 사표 던지고 장사하는 집 울산으로 보내었다. 많은 딸을 성혼시키는데 많은 희비쌍곡선이 있었으랴.
늦은 세월에는 편히 쉬시려고 하였으나 열 자식 출산에 신경통으로 늘 약 봉투를 만나 사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 만에 내가 결혼하니 그렇게 좋아 하셨다. 하숙하다 방 얻어 신접살이 준비하던 곳까지 찾아와서 함께하여 주셨다. 결혼하여 첫 손자 안겨 드리고, 둘째 손자 낳기 전에 아버지 돌아가신지 꼭 삼년 만에 가셨다. 부모 쌍분에 석비(石碑)하여 드렸다.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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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혹은 일본 통치시대 :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 > 늚이의 노래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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