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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30)흰 눈과 무

신작수필

30. 흰 눈과 무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내가 어렸을 때는 경주(慶州)에도 눈이 많이도 내렸다. 눈이 많이 오면 제일 곤란한 것이 우물과 나무를 가지러 가는 일이다. 눈길을 터 주어야 한다. 눈이 많이 올 때는 7∼50Cm나 되어서 어린 우리들은 학교는커녕 꼼짝도 못하고 방안에서만 있어야 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간혹 눈이 몰려오기도 한다. 바람이 몰아치고 흰 눈이 나리면 우리는 큰 방에서 바지게를 내어서 빨래 방망이에 밧줄을 묶고 큰 방으로 가져다 놓고, 마당 저 멀리 눈 온 자리를 쓸어버리고 그 곳에 흰 쌀을 뿌려서 바지게를 설치하면 영락없는 새잡는 기구가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방문에 유리를 붙인 구멍으로 내다보면서 바깥마당에 참새들이 들어 와서 쌀을 먹기를 기다린다. 이때다. 드디어 참새가 쌀을 발견하고 바지게 밑으로 들어간다. 드리워 놓은 밧줄을 힘껏 당기면서 갑자기 큰 방 문을 열어젖히고 바로 뛰어나가서 바지게를 발로 밟는다. 그러면 참새가 먹이를 먹으러 들어갔다가 그만 잡히고 만다. 이렇게도 참새를 잡는다. 참 새 잡기가 참 쉽다.

 흰 눈이 바깥에서는 펑펑 내리고 방마다 짚공예는 절정에 이르고 있다. 큰 채, 사랑 채, 방앗간, 헛간 지붕에도 흰 눈은 다 내리고 있다. 가마니 새끼는 가는 새끼로 꼬아야하고, 밧줄이나 지붕을 이는 데 사용하는 새끼는 굵은 새끼를 꼬아야 한다. 그리고 한 팀은 벌써 가마니 치는 것에 익숙하여 한 장을 빼내고 있었다. 나이 어린 나는 가마니치기에 붙어서 짚을 먹이는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물레에다가 목화로 실을 잣고 있다. 형수는 무명씨를 골라낸다고 씨아를 돌리고, 누이는 치마를 걷어서 흰 다리를 내 놓고서 삼을 삼는다. 큰 머슴, 중 머슴은 밧줄 만들려고 나무틀에다 대고 돌리고 있다. 모두가 한겨울에 농사철 준비를 하고 있다.

벌써 이경(二更)이 지나고 저녁 먹은 것은 간 곳이 없고 배가 고파온다. 그렇다고 요즘 같으면 라면이라도 삶아 먹지. 그 때 그 시절에는 참으로 별 따로 먹을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졌다.

“막내는 중 머슴과 무구덩이에서 무 빼 오너라.”

“예.”

 그래서 쇠스랑과 소쿠리를 들고 무 구덩이 무 빼러 간다. 그런데 문을 열자 마당에는 새 하얀 하늘 쌀가루가 우리 집 마당에 소복이 내려다 놓았다. 발이 푹 푹 빠진다. 정말 그 때는 눈이 오면 많이도 왔다. 당시 라디오 뉴스로 울릉도에 눈이 1.5M나 왔다고 전한다.

 눈이 오면 춥지 않다. 그리고 천지가 새 하얗다. 밭 가운데 눈이 온 것을 파헤치고 무 구덩이를 찾는다. 무는 얼지 않도록 밭에다가 땅을 파고 깊이 묻어 두었다. 이제 그 무 구덩이 문을 찾았다. 이미 문 가까이는 파내어 무를 벌써 많이도 먹어 버렸다. 이제는 한참 깊이로 쇠스랑을 집어넣어 무를 찍어 찾아내어야 한다. 쿡 찍어서 무를 찾고, 또 쿡 찍어서 무를 찾아낸다. 한 소쿠리를 끄집어내려면 나는 오돌 오돌 떨고 기다려야 한다.

 한 소쿠리 무도 식구가 많으니 이것도 잠시면 모두 먹을 것이다. 이제 소쿠리의 무를 들고 큰 부엌으로 간다. 우선 무에 묻은 흙을 떨어 버리고 사랑채로 들고 간다. 부엌칼과 무를 내어 놓으면 알아서들 잘도 무를 깎아 먹는다.

아버지께서는 말씀 하신다.

“이 겨울에 먹는 무는 최고 약이다. 특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약이다. 그러니 무를 많이 깎아 먹어 두어라!”

 우리 아버지의 만병통치약이 또 나오게 될 것인가? 정말인가?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아셨을까? 무에는 디아스타제, 아밀라제 등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까?

 무는 니코틴을 중화하는 해독작용이 있어 담배 피우는 사람들에게 좋다고 한다. 무 생즙은 오장을 이롭게 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살결이 고와진다고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나와 있다. 삶아서 물을 마시면 기침, 인후통(咽喉痛)에 좋다. 감기 기침, 목 아플 때는 아이들에게 항생제를 주지 말고 무 조청이 약효가 된다. 또 무즙을 내서 가제로 걸러 나온 액을 무릎이나 아픈 곳에 발라주면 시원해지는 파스 효과를 낼 수가 있다고 한다.

 시골 겨울에는 흰 눈이 내리면서 겨울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약이 되는 생 무를 내어서 깎아 먹고 겨울을 지낸다.

( 푸른 숲/20100-2012.10.31.)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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