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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16)차성이씨 양세 정려각

신작수필

16. 차성이씨 양세 정려각(兩世旌閭閣)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열행(烈行)과 효행(孝行)로 다져진 나라이다. 그러나 이를 지키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차성이씨 양세 정려각(兩世旌閭閣)은 열이나 효행 중 한 분야에만 뛰어나도 그 정려(旌閭, 예전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이르던 말)를 세워 국민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여왔다.

 그러나 차성이씨(車城李氏) 호군공파(護軍公派) 37세(世) 이경기(李慶記, 혹은 慶重)의 처 최씨의 열행과 그 자부 손씨의 효행으로 열과 효를 동시에 얻어 이를 기리기 위해 근세조선 순종 2년(戊申, 1908년)에 국민의 귀감을 삼고자 관급자재를 내려 양세 정려각을 건축하게 하였다.

 한편, 차성이씨는 경주이씨에서 수분적〔首分籍, 33세 차성(車城), 39세 합천(陜川), 41세 아산(牙山), 42세 재령(載寧), 48세 우계(羽溪), 52세 장수(長洙), 53세 진주(晋州), 58세 원주(原州)이씨 등〕하여 차성이씨로 계대하였으며, 이곳 경주 불국사 지역에는 호군공파가 200여 년 전부터 세거하여 왔다.

 불국사 고장 주요기념물로 지정된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경기의 부인(婦人) 경주손씨(孫氏)·자부(子婦) 경주최씨(崔氏) 양세 정려각(兩世旌閭閣)이다. 바로 불국사공설시장 입구에 있다.

나는 어려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정려각을 아버지께서는 꼭 “열녀각”이라 부르셨다. 사실 내가 공부를 하고 알아보니 “정려각”인데 말이다. 정려각 곁에 관리사(管理舍)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우리 왕고모님이 그 곳에 살고 계셨다. 왕고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추석에 성묘하고 왕고모댁에 우리 모두가 들렸다. 왕고모님이 돌아가시고서는 왕고종형님이 계셔서 그래도 출입을 하였다. 정려각 안에 들려서 풀도 뽑고 흘러내린 기왓장도 고치고, 잘 모르는 한문(漢文) 글자만 있는 비(碑)도 닦았다.

 경주시청 문화관광국에서 입간판도 세우고 하니 자연히 유치원, 초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무엇보다, 왕고종형님을 통하여 청소도 자주 하도록 하여서 간혹 관에서 확인 차로 나오는데 대비도 하였다.

 또, “대한민국충의효열록(大韓民國忠義孝烈錄)”발간위원회에서 원고청탁이 와서 감히 내가 내용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현대화된 책으로 시청에서 세워 준 입간판 내용으로 게재하였다. 발간된 그 책을 받았을 때는 훌륭한 나의 조상, 그 높으신 효와 열(孝, 烈)의 뜻에 깊은 감사를 올렸다.

 족보 내용을 알고 보니 부인(婦人) 손씨(孫氏, 1848∼1908)는 나에게 재종조모님이 되셨고, 자부(子婦) 최씨(崔氏, 1863∼1926)는 재종숙모님이셨다. 사실상 관계는 더 가까웠는데 우리 집안에 나의 증조부(=慶淵公)님이 양자로 오셨기에 인척 관계가 이렇게 멀어진 것 뿐 이었다. 생가(生家)로는 바로 종조모요, 종숙모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 그 입간판에 번역된 내용으로 보면 다음과 같았다.

정 려 각(旌閭閣)

 이 각은 차성(車城) 이경기(李慶記)의 처 손씨의 열행과 그 자부 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손씨는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부덕을 겸비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왔다. 출가 후 시부모와 남편 봉양에 정성을 다하든 중 남편이 병상에 눕게 되자 정성을 다해 병을 간호하였으며 의원의 말에 따라 가물치가 특효라 하였으나 엄동설한이라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웃 못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얼음을 치며 통곡하니 깨어진 얼음 구멍에서 많은 가물치가 뛰어나와 이를 약으로 쓰니 효험이 있어 연명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식음을 전폐하매 죽음에 이르렀다. 이 때 손씨 부인은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생혈을 입에 넣었으나 끝내는 운명하였다. 이를 당한 손씨 부인은 놀라움과 괴로움을 못 이겨 애를 태운 끝에 기절하였다. 이를 본 그 자부 최씨 부인은 위급한 시어머님을 구하기 위해 역시 손가락을 잘라 생혈을 시어머님의 입에 드리워 회생케 하였으나 결국 병상에 눕게 되어 운명을 하게 되니 예(禮)를 다하여 장례를 지냈을 뿐 아니라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머리에 빗을 대지 아니했다. 이러한 고부간의 열(烈)과 효(孝)는 순종(純宗) 2년에 지방을 순시하던 암행어사에 의해 조정에서 알게 되어 국민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건축 자재를 관급으로 건립하였다.

 이제 고향에 갈 때마다 양세 정려각을 들여다본다. 경주시청에서도 돌보아 주지를 않고, 입간판 글씨도 터 갈라져 글씨도 못 알아보고, 왕고종형도 돌아가시고 그저 양세 정려각 문은 자물쇠로 깊게 잠겨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줄 것인가?

( 푸른 숲/20100-2012.10.17.)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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