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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12)새보 초가삼간

신작수필

12. 새보 초가삼간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나의 안태본(安胎本)에서 네 번째로 이사 와서 내가 판 우물이 있는 집이 바로 그야말로 새보 초가삼간(草家三間)이었다. 그래도 부속 건물로 디딜방앗간이 있었고, 길쭉한 헛간이 있어서 참 편리하게 사용했던 것이 기억나고, 아울러 큰 채, 사랑 채 등으로 사대부 집은 아니지만 한 해 한 번 농사를 짓고 이엉을 엮어 올려 깨끗한 초가삼간이었다.

 요즘 들으면 마치 오랜 유행가 가사에나 나올법한 이름이지만 당시로서는 초가삼간 집이라도 마련되고, 일하면서 먹고 사는 가장 평범한 시골 촌사람으로서 가장 떳떳한 삶을 사는 사람 축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초가삼간에 덧붙여서 비록 천수답이지마는 일흔 마지기 논농사에 사천 평 밭뙈기와 약 구천평의 야산(野山)까지 있어 일하는 즐거움에 살아가는 것이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로 시대를 거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농촌 소시민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안빈락도(安貧樂道)의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을에 당시까지 전기도 없었으며, 모기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열한 마리의 소와, 서너 마리의 개와 이십여 마리의 닭들이 마당에 흩어진 곡식을 쪼아 먹는 정말 한가로운 초가삼간의 생활이었다. 게다가 줄줄이 아이를 낳아 방마다 가득가득 사람이 득실거리고, 이방인인 머슴방이 따로 있어 항상 시끌벅적한 초가삼간이었다.

 봄이 되면 먼 산에 큰 머슴이 셋째 형님과 물거리 시테바리를 간다. 그러면 중 머슴과 넷째 형님이 중간 산에 아찰이 나무를 하러 떠나간다. 큰 머슴, 중 머슴과 함께 하는 우리 형님들은 어머니께서 사 주시는 초백이 챙기기도 바쁘다. 초백이는 대나무 껍질로 엮어 만든 도시락 통이다. 그 곳에 밥 한 가득 담고 한쪽에 고추장 종지를 쿡 눌러 주고 초백이 뚜껑을 닫으면 되는 것이다. 혹시 쏟아질까 보아서 노끈으로 가운데를 한 번 질끈 묶어주는 마음 씀씀이는 그 누구도 못 따라 올 작품(?)이었다. 이제 자그마치 초백이 네 개를 한꺼번에 준비하여야 하는 어머니, 셋째 누이의 손길이 바빠진다.

 내가 서당에 다녀오는 10시 반 이후에 작은 머슴과 나는 가까운 우리 산으로 지게에 가마니와 갈퀴를 얹어 낙엽 끌러 간다. 우리는 가까운 곳이라 자주 들락거려서 여러 번 나무를 해 와야 한다.

 중 머슴이 먼저 집에 도착한다. 송기를 끊어 얹어왔다. 송기 하나 얻어먹는 것도 어렵다. 어머니가 보시면 그것을 벗겨 송기떡을 한다고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늦은 시간에 큰 머슴이 돌아온다. 큰 머슴은 나무를 많이 하여 온다. 게다가 내가 좋아 하는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서 꽃방망이를 만들어 나에게 준다. 초가삼간에 이렇게 즐거운 날이 없다. 한쪽에서는 송기 벗기고, 한쪽에서는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花煎) 붙이고 집안이 온통 왁자지껄하고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변한다.

 밤이면 큰 채 처마 밑에 남폿불을 달고서 마당 전체를 비추인다. 멍석을 깔고도 앉을 자리가 모자라면 아이들에게는 밀방석을 내어 놓는다. 어느새 어머니와 셋째 누이는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삶아낸다. 혹시 목이 메일까보아 오이냉채 국을 내거나 수정과를 낸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밀을 볶아서 수시로 주전부리를 한다. 한가한 시골 저녁시간이다.

우린 형제가 많지만 아버지께서는 백형과 둘째형님 모두 장가들여서 분가하였다. 그리고 큰 누이, 둘째 누이 모두 시집갔다.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면 어린 나라도 부려 먹어야 속이 시원하신 것이다.

“우물에 물들고 오너라!”

“쇠죽 다 끓였으면 좀 퍼 주어라!”

“날 어두워진다. 남폿불 켜라!”

“닭 올라간다. 홰 갖다 대어라!”

“강아지 밥 좀 줘라!”

“외양간에 마닥이 풀 넣어라!”

“모기 많다. 꾓재에 모깃불 놓아라!”

 어찌 초가삼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열 번째 막내 이 꼬맹이를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냐? 하나같이 나를 찾아 불러댄다. 그런데 막상 먹을 것 있을 때는 날 부르지 않는다. 넷째 형님이 쇠죽 끓이고 난 후 사랑채 부엌 잔불에 감자 구워 혼자 먹다가 나에게 들키면 미안해서 그 작은 감자 서너 개를 나에게 준다. 큰 채 부엌에서 먹고 남은 고추전이 있으면 셋째 누이 먹으려다가 꼬맹이 동생 나의 입에 넣어준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고욤 제어 둔 ‘고욤’을 한 숟갈 퍼서 내입에 넣어 준다. 셋째 형님 홍시 먹다가 나에게 들키면 한 입 베어 먹으라고 한다. 우리 초가삼간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다 좋아졌을까 매우 궁금하였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 때 그곳에 살았던 초가삼간의 생활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지금은 우리가 살았던 초가삼간이 헐리고 대형 우사(牛舍)가 들어 와서 부자가 되어 살고 있네. 기장댁 집은 경지정리로 흔적도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 종백씨(從伯氏) 집은 그 집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식으로 많이 수리되어 그 옛날의 돌 자갈밭 위에 아버지가 지어 드린 집이 아니다. 그래 세월이 많이 흘렀고, 오십오 년이 지난 세월이다. 초가삼간은 오십오 년 전에는 정말 내 마음에 드는 대궐이었다.

( 푸른 숲/20100-2012.10.13.)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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