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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5/또천달 형산강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44. 무너진 공굴다리

엽서수필 5 : 년의 빛 흐르는 형산강

44. 무너진 공굴 다리

이영백

 

 나는 곧잘 이런 이야기한다. “과거 왕조시대까지는 평지에 도로가 거의 없었다. 그것은 평지에 강이 흘러가니까 도로 만들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예전에는 다리라는 것이 거개가 나무다리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는 “복아! 공굴 다리에 가서 철사 좀 끊어 오이라.”하였다. 공굴? “공굴”이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공굴”은 콘크리이트(concrete)라고 나온다. 도대체 누가 “공굴”이라고 말하였는가? 일본사람들이 영어가 잘 안 되어 콘크리이트를 “공굴”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도 외래어로 굳어졌으니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도 엄연히 올라있다. 게다가 “‘공굴 다리’는 콘크리이트에 철근을 넣어 만든 다리.”라고 친절하게도 풀이까지 달아 놓았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근세조선 고종 광무 3년(1899년)생이라 왕조시대 사람이다. 시대적으로 나와는 먼 별시대의 관계다. 왕조시대, 일제침략기시대, 대동아전쟁, 대한민국 정부수립시대, 6ㆍ25전쟁, 5ㆍ16군사혁명시대, 유신헌법시대까지를 넘어 거쳐 살아오신 분이다.

 자연히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일본어 잔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심지어 창씨개명을 하여 성이 이가(李哥)인데도 “이암(李岩. 일본발음으로 이야모도라고 함)”이라고 하였단다.

 아버지는 목수였기에 목재로 만들다가 못을 쳐야 할 곳이 있으면 돈을 주고 못을 사다 쓰는 것이 아니라, 공굴 다리에 가서 철근으로 넣은 철사를 끊어 오라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벤치와 망치 들고 사용하지 않던 공굴 다리에 가서 철근을 끊어 와야만 하였다. 그것이 차마 못이 될 줄을….

 공굴 다리가 “콘크리이트와 철근 다리”인 줄은 참 최근에야 알았다는 것에 어찌 분노가 앞선다. 명색이 교사까지 한 사람으로 더욱 부끄러울 뿐이다. 이러한 글을 쓰지 아니하였다면 영원히 모르고 살 뿐이었다. 부모님이 그런 시대를 거쳐 오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들 머릿속으로 집어넣어 배웠던 언어가 이 시대까지 묻어 내려 왔다는 것에 참 분노 서러울 뿐이다.

 “공굴 다리”라는 용어 그 자체보다 정신적으로 물들어 오늘날에 까지 입으로 튀어 나오게끔 한 그 과정이 너무나 슬플 뿐이다.

 개인과 국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언어의 정신까지 빼앗겨서는 안 된다.

(20220609. 목. 구강보건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