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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4

(엽서수필 4) 수그사이 환희 57. 흩어진 형제-자매

엽서수필 4 : 수필과 그림사이, 그 환희

57. 흩어진 형제ㆍ자매

이영백

 

 아버지는 “오 형제, 다섯 자매”자식을 얻다. 고조가 무후여서 증조를 먼 척간에서 양으로 들이었다. 자녀를 많이 두어야 한다는 전근대사고방식으로 아버지는 권식을 불렸다. 아버지 동항렬 척간에 스물여덟 집안이니 차성이씨 호군공파 39世 소문중을 이어가야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많은 가족이라고 하지만 큰형과 열 번째 막내인 나와 두 띠 차이로 24년의 공간이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은 성장하여 결혼하면 5~6년 집에 일하다가 살림 내어 주는 것을 원칙으로 정한 모양이다.

 큰형은 본동에서 경주최씨 집안에 출입으로 가장 먼저 결혼시켜 살림났다. 둘째형은 6ㆍ25전쟁 발발로 피난지에 살다가 그곳에서 경주최씨 집안에 결혼시켜 살게 하였다. 셋째형은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7년 군대생활을 하고 귀가하여 경주최씨 집안에 결혼시켜 살림 나갔다.

 큰누나 순흥안씨네 출가하여 4km 떨어진 동방에서 살았다. 둘째누나 경주최씨네 시집가서 부산에 가 살았다. 셋째누나 달성서씨네 시집가서 외동면 녹동(나중에 언양)에 살았다. 넷째누나 함창김씨네 시집가서 울산에 살았다. 다섯째누나는 세 살에 죽었으니 가장 먼저 헤어졌다.

 넷째형은 군 제대 후 고창오씨 집안에 출입하여 울산에 기거하였다. 열 번째 막내인 나는 1973년 5월에 초교교사로 취직하였다. 그해 아버지 결혼 하라는 것을 뿌리치고, 중등준교사 국어공부 한다고 결혼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12월 20일에 아버지 돌아가셨다. 어머니 많이 섭섭해 하였다. 다음해 김해김씨 가문에 출입하여 대학행정직으로 옮기면서 대구에 산다.

 많은 형제ㆍ자매가 결코 한꺼번에 모여 살았던 것이 아니고, 나이 터울에 따라 순차적으로 결혼하니 많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집안 대소사 있을 때마다 함께 모인다.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 많은 형제ㆍ자매들이 있었는데 복잡해서 어찌 살았느냐고? 지나고 보니 나이 터울 2~3살 차이로 아버지는 자녀 관리를 잘 해 주어 복작거릴 일이 명절 아니면 없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자손 많은 것을 매우 흡족해하였다. 증조께서 양으로 와서 많은 자손을 얻게 되어 감사하였다. 사실 그랬다. 비록 많은 자식들에게 입고, 먹고, 결혼시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사람 사는 일이었다.

 지나고 보니 자식배려를 깊은 혜안으로 정리하였음에 감사할 뿐이다.

(20211223.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