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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란?/차성이씨 QNA

[스크랩] 경주이씨 씨족사

경주이씨 씨족史

시조 이알평(李謁平) 이후의 실전세계(失傳世系)에 대하여는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28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했고, 또 광무 연간의 '갑진보(甲辰譜)'에서도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하였는데,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 등이 분명치 않아 신빙할 수 없다는 점이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본관(本貫)한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협천 이씨(陜川 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 이씨(車城 李氏)가 갈라졌다.
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 이씨(平昌 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 이씨(加平 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 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 이씨(載寧 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 李氏)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의 후손이 진주 이씨(晉州 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 이씨(原州 李氏)로 갈려 나갔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7~21세조의 조상을 파조(派祖)로 하여 14개 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인 이규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동생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

15세조인 이강(李康羽 )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21세조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조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개의 소파(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8별(鼈)집>, 그리고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조선조에 <백사(白沙)집>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에는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이 소판(蘇判)이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판(蘇判)이나 병부령(兵部令)은 신라시대에 진골(眞骨)만이 할 수 있는 관등(官等)ㆍ관직(官職)이었다.
3세조인 이금서(李金書)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하는데, 4세조, 5세조는 각각 병정(兵正)ㆍ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냈다 한다.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正朝)는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품(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4세조, 5세조가 경주(慶州)나 혹은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향리출신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6세조 이주복(李周復)이후는 중앙관직을 띤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12세조 이선용(李宣用),
13세조 이승고(李升高)의 경우에는 고려 향직(鄕職)인 군윤(軍尹)ㆍ보윤(甫尹)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진은 충렬왕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제 2등으로 붙었는데 동생 이세기(李世基)는 제 3등으로 붙었다.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충선왕이 즉위한 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숙왕 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이세기(李世基)는 밀직부사(密直副使)ㆍ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ㆍ문장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년~1367년)이다.
그는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에게서 배웠다.
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기맹부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을 따라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자 원(元)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고(暠)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했다.
충혜왕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 복위가 반복될 때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王)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공민왕묘정에 배향되었다.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高麗歌謠)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외에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이 있다.
그가 만권당(萬卷堂)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충선왕이 중국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다.

“닭울음소리는 흡사 문 앞 버들가지 같구나(계성흡사문전류(鷄聲恰似門前柳))”라는 한 구절을 충선왕이 읊자 중국 학사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충선왕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이제현(李齊賢)이 선뜻 응대하기를 “우리 나라(고려)의 시에 집 머리 동트는 날 닭울음소리 수양버들 휘늘어져 한들거리듯(미두초일금계창(尾頭初日金鷄唱) 흡사수양요요장)”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가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 뜻을 취하심이요, 또 한퇴지(韓退之)의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부운유서무근체)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동인시화(東人詩話))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그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元)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아버지의 스승인 백이정의 사위가 됐다 충숙왕 때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28세로 요절했다.

국당(菊堂) 이천은 충렬왕 25년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ㆍ밀직사사(密直司事)ㆍ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고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고려조 인물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칭ㆍ이치연(李侈連)ㆍ이총섬(李寵暹)과 이핵(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ㆍ이강(李康羽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ㆍ이인정(李仁挺)(문하평리(門下評理))ㆍ이보림(李寶林)(정당문학(政堂文學))ㆍ이존오(李存吾)(우정언(右正言))ㆍ이달충(李達衷)(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이 두드러져 각각 분관 또는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는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한(史翰)에 발탁,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王)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변호로 극형(極刑)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뒤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대사성(大司成)에 추증되었다.

이달충(李達衷)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좨주(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ㆍ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했다. 1359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가 팔관회(八關會) 때 왕(王)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에게 주색(酒色)을 삼가라고 공석(公席)에서 직언(直言)하다가 파면, 1371년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고, 1395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조선초기에 현직에 오른 이래(李來)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다.
아버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로 죽은 후 이어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록사(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우왕 9년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 간관(諫官)에 등용,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파인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의 주살(誅殺)을 건의했으며, 뒤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에 유배, 곧 풀려나 공주(公州)에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 정종 1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도고 이듬해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제 2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평정,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발탁되고,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2등(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1407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1408년 지의정부사겸판경승부사(知議政府事兼判敬承府事))에 이르렀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 3명의 대제학, 1백 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조선조에서 이씨(李氏)들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유명한 <8별집>은 이익재(李益齋)의 후손으로 그의 7대손되는 이공린(李公麟)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장가든 첫날 방 그는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형제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공린(李公麟)은 신부와 함께 자라의 새끼를 들어다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李公麟)은 박(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다.
오(鰲)ㆍ구(龜)ㆍ원ㆍ타ㆍ별(鼈)ㆍ벽ㆍ경(鯨)ㆍ곤(鯤)이라고 거북 구(龜) 아니면 고기 어(魚)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혔다.

그런데 셋째 원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 죽음으로써 첫날 밤 자라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17대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온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장인인 박팽년(朴彭年)이 죽은 후 그 죄에 연좌되어 30여년을 금고당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 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을 받음으로써 그 자식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성종 13년 무과를 거쳐 현령(縣令)이 외었으나 셋째아들 원이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죽자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고 청주(淸州)에 거주하다가 죽었다.

이구(李龜)는 성종 23년 문과에 급제,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동생 원의 화(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어 교리(校理)ㆍ승지(承旨)ㆍ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이원은 성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연산군 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봉상사(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주자고 건의(建議)한 일로 곽산(郭山)에 장류(杖流), 4년 후에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이사균(李思鈞)은 중종조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산군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재직하던 중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복위(復位)를 반대하다가 보은(報恩)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교리(校理)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을묘사화(乙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공조참판(工曹參判)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몽량(李夢亮)은 명종 즉위 후 위사공신3등(衛社功臣三等)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대사간(大司諫)ㆍ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557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1559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다음 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1562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후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후 정승에 올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전력한 그는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선조 1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158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평난공신3등(平難功臣三等)이 되었다. 도승지(都承旨)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왕(王)을 호종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전국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다.
선조 31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左議政), 다음 해 우의정(右議政)으로 전임,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겸직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했다.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2년 뒤 호성공신1등(扈聖功臣一等)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죽은 그 해에 바로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영조 때의 좌의정(左議政) 이태좌(李台佐), 소론(少論)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李敬一) 등이 모두 백사(白沙)의 후손이다.

이광좌(李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 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이광좌(李光佐)의 8촌 형인 이태좌(李台佐) 또한 소론(少論)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러쓴ㄴ데, 이 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 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효종ㆍ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군산(群山)을 삭평턴들 동정호(洞定湖) 넓을랏다.”하는 시조 한 수가 <뜻을 두고도 못 이룬> 한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조선조에서 무인(武人)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7명 뿐이다.
국당공(菊堂公)의 파조인 국당공(菊堂公) 이천은 아들이 4형제(경중(敬中)ㆍ배중(培中)ㆍ달충(達衷)ㆍ성중(誠中))였는데 그 중 성중(誠中)이 조선원종개국공신이 되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완(李浣)이다.

이완(李浣)은 인조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인조 21년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하였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효종 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되고, 다음 해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신무기(新武器)의 제조(製造), 성곽(城郭)의 개수(改修)ㆍ신축(新築)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北伐)계획이 중지되었다.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과 함께 서울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고려ㆍ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ㆍ이정형(李廷馨)(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형제가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장헌세자(莊獻世子))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ㆍ도승지(都承旨)ㆍ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영조 28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당했다가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浦)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 등 저술을 남겼다.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에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지목되는 이벽(李檗)이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상면(江上面) 앵자봉(鶯子峰)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ㆍ정약용(丁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薰) 등 10여 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무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서교(西敎)(천주교(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 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년 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방(현 명동(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당시 사학(邪學)으로 배척되던 서학(西學)을 공부하던 이들응 사회적으로 큰 제재를 받게됐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 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근세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인물로는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李相卨)과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수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있다.

이상설(李相卨)은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904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자결(自決)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儁)ㆍ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헤이그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력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이시영(李始榮)은 백사(白沙)의 11세손이며 이종성(李宗城)의 5대손으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다 28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日帝)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滿洲)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ㆍ재무총장(財務總長)을 역임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피선(被選),
193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겸법무위원(國務委員兼法務委員)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委員長)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알라 1951년 물러났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용(李相龍)은 한일합방 직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 2세 교포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행하였고, 1912년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이 되어 교포 계몽에 힘썼다. 3ㆍ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포들의 자치활동(自治活動)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 독판(督辦)이 되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근년 작고한 애산(愛山) 이인(李仁)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제(日帝)하 변호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한글학회)사건 때는 회원으로 그 자신이 붙들려 가 4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제헌국회의원, 대법원장 직무대리, 검찰총장, 법무부장환, 반민특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다.
60년 참의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애산(愛山)은 몇 해 전 돌아가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다.
애산(愛山)과 함께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이 근년까지 <유일한 생존자>로 독립운동의 표상이 되어오다 81년 돌아갔다.
출처 : 가라골
글쓴이 : 솔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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