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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24)물외

신작수필

24. 물외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어머니는 우물의 물을 자주 퍼 오셨다. 자식이 건강하고 잘 되라는 뜻으로 초하루 보름되기 전 날 저녁에 촛불 켜서 우물에 내려놓았다가 첫 새벽에 정안수*로 떠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어려서도 그런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여자로서는 약하였지만, 어머니로서는 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경주에서는 오이를 ‘물외〔무뢰〕’라고 하였다. 그것도 한 여름에 싯누렇고 먹음직스런 물외를 보면 저절로 그 물외 냉채국이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몰래 뿌려주는 곳이 있었다. 바로 사립문 왼편에 어머니만 두고두고 물을 갖다 주는 곳이다. 어머니의 물외 밭이었다. 놀기 삼아 댓 포기를 심어서 계속 물을 주고 키워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씨를 터뜨리고 올라온 모종은 무엇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시골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그것이 물외의 모종인 줄 단박에 알았다. 그 다섯 포기의 물외 씨앗은 한 포기도 실수 없이 어머니께서 돌보는 대로 잘 자라 주었다. 어느새 아래 떡잎이 나고, 본 잎이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줄기가 자라서 솟아오른다. 밤새도 줄기는 자꾸 튼튼히 자란다. 본줄기가 자라면서 줄기 사이에 또 눈이 트고, 잎이 달리고 한 발 가량이나 자라자 나뭇가지를 세우고 사방으로 원두막처럼 지어 주었다. 물외가 자라 기는줄기가 나면서 이제는 작은 줄기가 마치 사람 손처럼 오그라져서 나무를 붙들고 자란다. 밤낮으로 자란다. 물외를 맺혀서 주인에게 드리고 싶은가 보다.

 어머니 몰래 나도 일찍 일어나서 물도 주고, 밤새 자란 줄기를 따라 세워 둔 나뭇가지에 올려서 잘 자라도록 도왔다. 마치 나에게 ‘잘 자랄게요.’말이라도 하듯이 물외 줄기는 자꾸 벋어 나간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줄기를 만들어 이제는 자연지붕처럼 자라주어 쳐다보면 물외지붕이 되고 말았다. 물외의 노란 꽃이 소복이 피었다. 날이 맑아 벌, 나비들이 그 물외 꽃에 날아들어 수정을 하여 주는가 보다.

“아니 이것이 무엇이든가?”

뒷집 기장댁 할머니도 오셔서 어머니가 키워 둔 오이를 들여다보면서 신기해하였다.

“예. 그저 심심해서 여름에 물외 냉채나 하려고 하는 데 얼마나 많이 달리는 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하지요.”

“그래. 이렇게 지극정성인데 물외 지라도 정성을 보일게야.”

“그라면 좋지요. 여름 내내 물외 냉채를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우리 식구들 전체가 어머니께서 몰래 만드신 물외 밭을 자주 관심 있게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서로서로 물을 길어다 주고는 모두가 마음으로 빌었다. 제발 예쁜 물외가 어머니 소원대로 많이 달려 달라고.

 시간은 밤낮으로 흘러 노란 물외 꽃에도 자연수정이 되어서 털이 뽀송뽀송 난 물외, 작은 물외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달린 것이 아니라 떼 꽃처럼 과분하게 물외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어디에서 배웠는지 셋째 형께서 물외 줄기에 너무 많이 달리면 잘 굵지 않는다고 적당이 떼어 내었다. 적과를 한 셈이다. 하루가 다르게 싱싱하게 성숙한 물외로 변하고 있다.

모내기도 끝났고, 농사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은 중에 논매기 철이 시작 되는 것이다. 김을 매려면 힘이 많이 든다. 자연히 밥맛이 줄어들고, 기운이 빠진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들이 뭔가 기운을 돋울 반찬이 필요했다.

 어머니께서 기다리시던 물외가 반찬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 밥반찬으로 하기 위해 싯누런 물외를 사정없이 땄다. 닳은 숟가락으로 껍데기를 벗기고 물외를 엇비슷하게 채 썰었다. 여름이면 더 차가워지는 우물물을 길어다 조선간장을 섞어 물외냉채가 만들었다. 그리고 밥상에 올랐다.

 모두가 기대를 하고 밥상마다 물외 냉채와 물외 무침을 반찬으로 내어 놓았다. 논매고 땀 흘려서 밥을 먹는데 색다른 반찬이 나왔으니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입 속으로 넘어가 버렸다. 아삭아삭하게 약간 시들은 것처럼 해도 오히려 그 맛은 몇 백배 싱싱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물외로 반찬을 만들려고 소쩍새는 밤마다 그렇게 울었는가 보다. 정말 그 물외의 냉채국은 당시 밥상에서 맛보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그런 반찬이 되었다. 물외는 우리 밥상에서 훌륭한 반찬으로 변하였다. 어머니의 정성과 땀이 반찬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지금도 깊이 생각하고 산다.󰃁

(푸른 숲/20100-201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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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수 : 정화수(井華水)의 경주 사투리.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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