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수필 |
14. 감꽃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나는 어려서 정말 행복하였다. 감나무를 많이 심어 둔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감꽃이 떨어지면 새벽 일찍 일어 나, 남보다 먼저 감꽃을 줍는다.
감나무만큼이나 형님·누이도 많았고, 큰 집, 작은 집, 고모, 왕고모 등 친·인척 관계어(關係語)와 호칭(呼稱)을 고루고루 알고 살았다. 물론 외할머님, 이모님 두 분, 이모부님 두 분 등이나 계셨다. 어머님이 둘째 따님이셨다. 어려서부터 관계어와 호칭을 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언어의 공간감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 자연 속에서 자랐다.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에 묻혀서 자연 속에 어울렸다.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봄 산에 가면 진달래가 피어서 온통 붉은 기가 감도는데 그 진달래를 따와서 화전(花煎)도 부치지만, 생으로 먹어도 되었다. 산에는 도라지꽃이 피고, 더덕이 자연 향을 마음대로 뿜어 댄다. 여름이면 들판에서 삥끼와 꼼밥, 찔레를 꺾어 먹었고 뽕나무의 오디는 별미 중에 별미이었다. 가을이면 붉은 감과 홍시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겨울이면 땅 속에 묻어 둔 무를 깎아 먹는 것이다. 겨울 단지 속의 홍시는 그 하나만 먹어도 요기가 되었다.
모두가 내가 태어 난 고향에서 먹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극성으로 나는 새벽 네 시면 꼭 교회 종소리를 듣고, 동해남부선 부산가는 첫 기차의 기적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세수 대야를 들고 도랑에 물을 퍼서 세수하고, 나의 큰 바위 얼굴 마석산(磨石山)을 치어다보고 매일 소원을 빌었다.
“부디 평생(平生)토록 높은 감나무만큼 공부 많이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왜냐하면 일단 공부를 많이 하여두면 아무도 훔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나를 놀려도 높은 감나무만큼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도 최고 학부인 대학교를 가게 하여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매일 새벽에 깨어나서 먼저 소죽을 끓이고, 닭장에 홰를 놓아 주고, 윗마을까지 개똥을 주워 오고, 형수, 누이가 아침밥을 지을 수 있도록 땔감을 부엌에 갖다 놓고, 이른 아침 마당비로 간밤에 불어오던 바람으로 몰린 쓰레기를 쓸어 내고 이런 자잘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짧은 시간이라도 있다면 나의 취미가 감꽃 줍기이다. 감꽃은 우리 집 둘레에도 많았다. 아랫집으로 가는 오른 쪽 4골목 길에도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어서 제일 먼저 감꽃을 줍는다.
감꽃이 떨어질 때쯤이면 시골에서는 보릿고개가 시작한다. 감꽃을 주워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운다. 감꽃이 피면 내 어린 시절 뒷집, 같은 또래 자야가 생각난다. 감빛 고운 얼굴에 붉은 댕기머리 소녀, 감꽃이 피면 감꽃향기 그윽한 감나무 아래에서 그 소녀 가슴에 닿을 만큼 명주실에 가득 꿰어 목에 걸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감꽃은 네 잎이 바깥으로 오그라들어 감꽃 밑동을 유지하는 통으로 되어 있다. 밑동이 약간 노르스름하다 못해 희고 만다. 감꽃 속은 텅 비어 있다. 바로 그곳에 감인 열매를 맺어 주고 이제 자기역할이 다한 감꽃만 떨어졌기 때문이다.
흔히 감꽃을 눈으로 살피기만 하지만, 나는 사진을 찍고 만다. 왜 그렇게 찍느냐고 하지만 어릴 때는 하도 좋아서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다. 마치 하와이에 들리면 ‘알로하오에’를 걸어 주듯이 말이다.
저 높은 곳에 옹알옹알 붙어 있는 감꽃을 좀 보아라. 내가 태어난 기념으로 이 감나무를 심으셨다고 한다. 그새 이렇게 자라서 성목(成木)이 되지 않았든가? 비켜라! 이놈아! 감꽃 나가신다. 담장에도 길에도 노랗게 영국신사 모자처럼 가지런히 떨어져 우리 집 앞길을 장식하고 있지 않느냐?
이제 우리는 감꽃이 시들기 전에 빨리 주워 모은다. 감꽃 하나에 꿈이 가득 들어 있고, 씨감자 심고 남은 고구마를 구어서 감나무 밑에서 소꿉놀이 도 한다. 한여름에 꽃망울을 터뜨린다.
감이 익어 가면서 빛바랜 감꽃이 눈발 날리듯 바람결에 따라 떨어지고 만다. 철따라 같은 감꽃이 피고 지지만 도톰한 잎사귀 뒤로 숨어서 피는 감꽃이기에 수줍음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푸른 숲/20100-201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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