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12)연오랑과 세오녀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12.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신라(新羅)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丁酉)년에 서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는 젊은 남자 연오랑(延烏郞)과 그의 아내 세오녀(細烏女)가 농사짓는 한편 고기잡이로 넉넉하지는 못하나마 금실 좋게 그날그날을 행복스럽게 살고 있었다.

 연오랑이 고기잡이를 가면 세오녀는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김매고 거두어 저녁때가 되면 바다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아 그 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이 그들의 둘도 없는 즐거운 일이었다.

 때로는 둘이서 바다로 가서 고기잡이하는 남편을 도와 그물도 잡아 주고 혹은 밭에 나란히 나가 힘든 일을 남편이 거들어 주기도 하였다.

 때는 가을 공기 좋고 일기 좋은 청명한 날 아내가 밭으로 곡식을 거두러 나가고 남편은 낚싯대를 가지고 바다로 갔다.

 그러나 오늘만은 웬일인지 도무지 고기가 물리지 않아서 황혼이 저문 석양에 연오랑은 짜증과 슬며시 화가 나는지라 돌팔매질을 치며 일어서서 바다를 바라다보니 난데없는 커다란 바위가 둥실둥실 자기 앞으로 떠내려 왔다. 하도 괴상하여 그 바위에 올라 보았다. 그랬더니 그 바위는 파도를 따라 점점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 때서야 겁이 나서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외치며 헤엄도 쳐 보았으나 이미 늦어 하는 수없이 바위에 올라타고 집동 같은 파도와 싸우며 구원을 소리높이 질렀으나 파도소리와 끼∼끼 하는 갈매기 소리만이 외롭게 들릴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기진맥진하여 나중에는 잠이 들고 말았다. 이 바위는 흘러, 흘러 어언간 일본(日本) 어떤 땅에 닿았다. 이 땅 사람들은 바위를 타고 온 이라며, 이는 반드시 하늘이 보내신 신인(神人)이 틀림없으니 우리의 국왕(國王)으로 모시자고 하여 곧 그곳 왕위(王位)에 오르게 되었다.

 세오녀는 그날 저녁밥을 지어 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비참한 심사와 험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떨어지지 않아서 문득 미친 듯 바닷가로 뛰어 나갔다.

 이곳, 저곳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밤은 깊어 가고 추야월(秋夜月)은 교교히 낮같이 밝고 사방은 고요 적적하여 사람은 없고 단지 자기 그림자만 있을 뿐이었다. 어지러운 마음 어찌할 바 몰라 심중이 교란할 때 문득 바위가 보이는데 그 바위에는 자기 남편의 신발이 분명히 보였다.

 아아! 이 일이 웬일이오? 그러면 물에 빠져 죽었단 말인가? 설마 그러한 불길한 일이 오지 않으리라 했으나 신발이 눈앞에 똑똑히 있지 않느냐! 어지러운 생각에 잠길 때, 무심한 갈매기는 떠돌고 밀려오는 파도소리만 세오녀를 비웃는 듯 철석∼ 철석∼ 모래 물에 부딪친다.

세오녀는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생각으로 바위 위에 냉큼 올라서니 넘실거리는 바다를 저주하면서 물 위에 둥둥 떠서 어딘지도 모르게 간다.

 하도 이상하여 낭군이 없이 살고 싶지 않다는 생(生)의 의식을 떠난 몸 정신없이 바위에 걸터앉았더니 바위는 바다 가운데로 떠내려갔다.

얼마를 떠내려 간 후 새롭게 무섭고, 괴이하고 차차 허기가 져서 기운 없이 슬픈 생각에 잠긴 채 그 바위 위에서 그만 잠이 들었다.

 날이 환하게 샐 무렵 어느 곳에 다다르니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天使)라 하여 국왕에게 상소(上疏)하였다.

그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는 일본 땅에서 반가이 만나게 되어 일본의 국왕이 되고, 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생긴 후 신라(新羅)에서는 큰 변(變)이 일어났다. 이 두 사람이 신라를 떠난 후 온 천지가 암흑세계(暗黑世界)로 변하고 만 것이다.

 신라왕은 곧 일관(日官)을 불러 물어 본즉 일관이 점(占)쳐서 말하되,

“신라의 동해(東海) 안에 있는 일월신(日月神) 부부(夫婦)가 일본으로 가신 탓이올시다.”

라고 하였으므로 신라국(新羅國)에서는 곧 사신(使臣)을 일본 땅에 보내게 되었다.

 사신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연오랑에게 이 말을 하니,

“대단히 미안하오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가르치심이라. 어찌 내 자유(自由)로 돌아갈 수 있으랴. 나와 내 아내가 짠 비단 한 필을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면 그 재변(災變)을 면(免)할 수 있으리라.”

하고 말 하였다.

 사신은 그 말대로 그 비단을 가지고 신라에 오서 복명(復命)하였다. 신라에서는 그의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과연 일월(日月)이 다시 밝아지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하게 되었다. 이 비단을 창고에 두어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제사를 지낸 곳은 포항에서 멀지 않은 해변 지금의 포항시 오천읍 도구동(浦項市 烏川邑 都邱洞)인데, 이곳에서 일월(日月)을 모시고 왔다 해서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도 하였다.

 이 귀중한 비단을 보관한 곳이 지금의 포항시 대송면 일월동(浦項市 大松面 日月洞)이다.

 

참고 자료

○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위키백과.

 연오랑과 세오녀는 박인량이 지은『수이전』에 나오는 설화이다. 『수이전』은 전하지 않으나 이 설화는『삼국유사』와『필원잡기』에 실려 전해졌다.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즉위 4년(157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미역을 따러 올라섰다 바위(귀신고래라는 설이 있다)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그를 신이 보냈다 여겨 왕으로 섬겼다. 세오녀는 남편을 찾다가 마찬가지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신라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고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말에 따라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청했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며 돌아 갈 수 없다 하고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다시 해와 달이 빛났다.

 이때 제사를 지낸 곳이 영일현(迎日縣 : 지금의 영일만)이다.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陽烏傳說)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일월지(日月池)의 전설과 자취는 지금도 영일만에 남아 있다.

참고 자료

Ⅰ.연오랑 세오녀 사료 : 연오랑 세오녀 신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와『영일읍지』 ‘세계동(世界洞)’의 내용이다.

1.《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 - 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 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이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三國遺事》권1, 紀異, 원문생략)

2.《영일읍지》의 ‘세계동’

 예로부터 세곡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누을(또는 혜곡)이라고 불렀다. 세 구역(원신흥·중흥·세계)을 합하여 세계동이라고 했다. 신라 아달라왕 때 영오랑·세오녀가 세계동의 못 둑 위의 들판에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나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남쪽에는 춘덕보가 있어 일월지로 통하고, 동쪽에는 순제가 있어 앞들에 물을 대고, 북쪽에는 옥령이 있고, 서쪽에는 도덕곡이 있다.(金鎔濟,《迎日邑誌》권1 ‘世界洞’ 원문생략)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延烏郞)이라 했으나『영일읍지』는 연(延)자를 영(迎영)자로 써서 영오랑(迎烏郞)이라 다르게 표기했다. 그러나 ‘연(延)’과 ‘영(迎)’은 음과 훈이 흡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영일현(迎日縣)과 연일현(延日縣)을 혼용해 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같은 명칭이다.

『영일읍지』‘세계동’에서는 영오랑 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던 세계동 마을과 주위의 못·재·골짜기 등 구체적인 지형적 환경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월지와 제천지(祭天地) 및 연오랑세오녀 거처를 비정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 부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세계동〉의 마을명과 주변의 못·재·골짜기의 명칭이 지금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의「일월지 못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일월신화의 발생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동해 바닷가에 사는 해와 달의 정(精)인 연오랑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도일(渡日) 건국 사실이 자연환경의 지역성과 고대 신라왕국 성립기의 역사성을 토대로 상징화된 것이다. 즉, 당시 전개되었던 근기국(勤耆國)의 신라로의 편입, 선진문화의 일본전파 및 신라와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단된다.

 특히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탄생지를 에워싼 여러 지명들과 이 지역의 가장 빠른 연중 일출시각 등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포항지역만이 일월신화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

(푸른 숲. 2012.11.30.)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