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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이씨 시조/차성이씨 선원록

차성이씨 상계선원록

차성(車城)이씨 상계선원록

   -경주(慶州)이씨 상계     

차성이씨는

경주이씨 32세 사언(嗣彦)의 두째 아들 이위(李渭)가 계승한다.

 

차성이씨 상계 선원 

 

慶州 1 비조 경주이씨 이알평(鼻祖 慶州李氏 李 謁平)

 

신라인(자 : 天瑞, 호 : 瓢巖, 관직 : 楊山村長, 阿餐 후에 干伐餐), 기원전 177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東川洞)에 소재한 표암봉(瓢巖峰)에 강임하여 문란했던 부족들을 교화시키며, 통솔하여 오던 중 BC 108년에는 6부 중의 양산촌장〔楊山村長(君長)〕으로 추대되었고, BC 69년에는 다른 다섯 촌장과 더불어 회의를 하며『우리도 위로 임금을 모시고 나라를 세워 무질서한 사회를 바로 잡아 다스리자.』고 회의를 하던 중, 나정변(蘿井邊)에서 옥동자(玉童子)를 얻어 양육(養育)하여 BC 57년(新羅 13年) 되던 해에 박통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라 이름 붙여 왕(王)으로 추대하고 창국(創國)하였으며,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국방·경제 등을 담당하는 아찬〔阿餐(후에 干伐餐)〕으로서 나이 어린 왕을 막후에서 보필(輔弼)하였다.

배위(配位)는 마한(馬韓) 태조(太祖) 준(準)의 여식(女息)으로서 기씨(箕氏) 42世인 태화공주(泰華公主)이다.

536년 법흥왕(法興王)이 문선공(文宣公)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왕을 양육하여 무열왕(武烈王) 635년에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하고 배위는 성열왕비(聖烈王妃)로 봉작(封爵)하였다. 754년 경덕왕(景德王)이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를 보수할 때 지금의 표암제(瓢巖齋)자리에 묘우(廟宇)를 건립하고 대광보전(大光寶殿)이라 사액(賜額)하여 영원토록 경모(景慕)할 것을 당부하였다. 32년(儒理王 9) 양산촌장(楊山村長)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로 사성(賜姓) 받아 지명(地名)을 붙여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세계(世系)하며 분종(分宗)들이 많으나 고증(考證)이 확실한 분적종(分籍宗)으로는 차성(車城)·합천(陜川)·평창(平昌)·가평(加平)·아산(牙山)·재령(載寧)·우계(羽溪)·원주(原州)·진주(晋州) 등이 있고, 경주이씨 본종(本宗)으로 평리(評理), 이암(怡庵), 익재(益齋), 호군(護軍), 국당(菊堂), 상서(尙書), 사인(舍人), 판전(判典), 원성군(月城君), 시랑(侍郞) 등 11개 대파(大派)가 국내 각처에 집단거주하며 화벌(華閥)을 긍지로 신라, 고려, 조선조 말까지에 봉군(封君) 56人, 신라시대 행·음직(行·蔭職)의 상신급〔相臣級(分宗除外)〕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종계(宗系)에만 해도 36世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까지 49人에 이르며 거명 이후의 95人을 합하여 144人(長官級)에 달하고, 작고 후에 봉시자(封諡者) 수는 신라시대 20人, 고려와 조선조말까지의 41人을 합하면 61人에 이르며 청백리의 수도 10人에 이르고, 등과자(登科者) 수는 고려조에서 44人, 조선조에서 200人을 합하면 244人에 달하며 중시(重試), 연벽시(聯壁試), 7형제과(兄弟科), 7세과(世科), 사마시(司馬試), 7세양시(世兩試) 등 이색적인 등과상(登科象)을 볼 수 있다. 성진골(聖眞骨)이 아니면 등관(登官)할 수 없던 관직(官職)인 소판(蘇判) 벼슬로서 신라말기까지 내려 왔다는 것은 골품사회 계급의 귀족 화벌(貴族華閥)을 말하며 비조(鼻祖) 표암공(瓢巖公)의 용태(容態)를 살펴보면 신장(身長)은 9척(尺) 8촌(寸), 요대 (腰帶) 10위(圍)에 수수과슬(垂手過膝)하고, 용안봉비(龍顔鳳鼻), 용두호시(龍頭虎視), 유중화덕(有中和德)으로 위용(偉勇)과 덕망(德望)이 높았다는 것이며, 200歲 장수(長壽)하였다는 것이 구보(舊譜)에 전해 온다.(三國遺事, 三國史記 참조).

 

慶州 2 경주이씨 이유(慶州李氏 李侑)

 

신라인(자 : 智士, 호 : 四觀尊者, 시호 : 文和公, 관직 : 左內史 左軍主 ), 생이검달(生而儉達)하고 역학달도(力學達道)하여 나이 이십에 이르러 신장대풍(身長大風)하고 신화여용(神和麗勇)하니 역과인(力過人)으로 사관존자 (四觀尊者)라 호칭하였다.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에 내진사기문장(內辰思其文章) 하였다. 관직(官職)은 증좌내사 (贈左內史) 좌군주(左軍主)라 하였다.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라 하고, 자세한 것은 문집에 있다. 배위(配位)는 양씨(楊氏)로 사물국(史勿國) 양번(楊蕃)의 사위이다. 일남이녀 하였다.

 

慶州 3 경주이씨 이타(慶州李氏 李它)

 

신라인(자 : 庸伯, 호 : 瓢公先生, 시호 : 文成公, 관직 : 大輔成國功臣 太師 鷄林侯), 비조 알평공(謁平公)의 친손(親孫)으로 16세에 삼국 유학하여 학문으로 수도하니 효제충성(孝悌忠誠)으로 유명하였으며, 마한(馬韓)의 사신(使臣)으로서 국위선양에 대공(大功)을 세웠다. 진한(辰韓), 변한(弁韓), 낙랑(樂浪) 등의 외침전쟁에서 단독으로 전공을 세워 대성무장(大聖武將)으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현상(賢相)으로 관직에 대광승박사(大匡承博士), 농령도위령(農令都尉令) 상서사(尙書事), 좌우내사(左右內史) 시중(侍中), 태사공〔太史公(太史令)〕 등을 거쳐, 개국 건도(開國建都) 좌명공신(佐命功臣) 태보태사(太輔太史), 대사도(大司徒)의 행직(行職)에서 명관(名官)으로 대례선생(大禮先生)이라 칭송 받았다.

 

慶州 4 경주이씨 이중가(慶州李氏 李仲嘉)

신라인(자 : 子康, 시호 : 文簡公, 관직 : 太史令), 문장과 효제를 겸한 능사로서 유리왕(儒理王)조시 남해부사(南海府使)와 명조사관(名祖事官) 부령상서(副令尙書)로서 박혁거세(朴赫居世) 왕(王)의 사위가 되고 대보정국공신(大輔靖國功臣) 좌령승(左令丞) 내사시중(內史侍中) 태사령(太史令)으로 87세 장수하였다. 문간공(文簡公)의 매부(妹夫)에 남해왕(南解王)으로 휘(諱)는 민〔慜(朴氏)〕이며, 그 아들 유리왕(儒理王)은 박치리(朴治理)이고, 석탈해왕〔昔脫解王(脫解니사금)〕은 남해왕(南解王)의 사위요, 유리왕(儒理王)의 매부(妹夫)이다.(駙馬)

배위는 박씨(朴氏)로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딸이다.

 

慶州 4 경주이씨 여 이운제(慶州李氏 女 李雲梯)

 

신라인(女, 南解王妣), 신라 남해왕비(南解王妣)로서 자(子)에 신라 유리왕(儒理王)이 있다.

 

慶州 5 경주이씨 이석(慶州李氏 李奭)

 

신라인(관직 : 角干 左令丞), 소시부터 문장과 서예가 유명하여 유리왕(儒理王)조 때 중위도위(中尉都尉), 대사관박사(大司冠博士),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고, 탈해왕(脫解王) 때 좌보상등공신(左輔上等功臣) 각간(角干) 좌령승(左令丞) 등 직에서 현상(賢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대아찬(大阿餐)으로서 수천우두(授千牛頭)하여 진골(眞骨)로서 인화선정(人和善政)의 영상(領相)이었다.

 

慶州 6 경주이씨 이문상(慶州李氏 李文祥)

 

신라인(자 : 善長 , 호 : 朴軒, 시호 : 文莊公, 추증 : 鷄林侯, 관직 : 大阿餐 左令丞), 소시부터 문장과 무예가 뛰어나 파사왕(破娑王)조 때 등관하고, 중위박사(中尉博士)로서 대농승(大農丞), 좌내사(左內史) 영(令)으로 누차 천거되었으며, 대보상등정국공신(大輔上等定國功臣) 좌령승(左令丞) 대아찬(大阿餐)을 역임하였으며, 덕행문장(德行文章)에 탄복한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송헌선생(松軒先生)으로 호칭하였으며, 증직(贈職)으로 좌내사(左內史) 시중(侍中) 태위령(太尉令) 상서사(尙書事)로 받고, 법흥왕(法興王)은 문장공(文莊公)으로 시호(諡號)하고, 계림후(鷄林候)에 추봉(追封)하였다.

 

慶州 7 경주이씨 이방(慶州李氏 李昉)

신라인(자 : 斗建, 관직 : 御史大夫 內史侍中 太史令), 재능과 문장에 덕이 있어 지마왕(祗摩王)조 때에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집사전적(執事典籍) 하였고, 일성왕(逸聖王)조 때는 대소가야국(大小伽倻國)과 감문(甘文), 갈문(葛文) 두 나라에도 특사로서 지용과 아량으로 우호외교에 대공(大功)을 세우고, 아달라(阿達羅)왕조 때에는 대보상등공신(大輔上等功臣) 섭률도위령(攝律都尉令) 상서(尙書)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내사시중(內史侍中) 태사령(太史令) 등 40여 년간 관직에 몸 바쳐 명상대신(明相大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慶州 7 경주이씨 이구(慶州李氏 李昫)

 

신라인(관직 : 大阿餐 大農令副令), 문장지용(文章智勇),이 형인 이방(李昉)과 같아 세인의 칭송을 받으며, 누차 전공을 세워 관직에서 중랑장(中郞將), 평시랑 중령(平侍郞 中令), 대농령 부령(大農令 副令), 감철사(監鐵使)로 진골(眞骨)이며 대아찬(大阿餐) 벼슬을 역임하였다.

 

慶州 8 경주이씨 이수장(慶州李氏 李秀章)

 

신라인(자 : 僖淐 , 호 : 賢主, 관직 : 通政事 侍中, 太史大夫), 덕민(德敏)한 성품에 학문을 즐겨 일성왕(逸聖王)조 때 등관하여 내한직각(內翰直閣)으로 왕(王)의 무도함을 조리 있게 교화시켜서 왕도(王道)에 어긋남을 자책반성(自責反省)케 하니 선생을 칭송하여 호를 현주(賢主)라고 하였으며,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입조(立朝)이후 40여 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며, 도위령(都尉領) 상서사(尙書事)하였고, 좌우내사 농령(左右內史 農令) 통정사 시중(通政事 侍中) 태사대부(太史大夫) 등의 국정참여로 나라의 인물이라 세칭 되었다.

 

慶州 8 경주이씨 이수엽(慶州李氏 李秀曄)

 

신라인(관직 : 冢宰太尉 宗承令), 소시에도 문장이 능했고, 일성왕(逸聖王)의 사위로서 관이 태상시 박사(太常侍 博士), 간의대부(諫議大夫) 총재태위(冢宰太尉) 종승령(宗承令) 등을 역임하였다.(駙馬)

 

慶州 9 경주이씨 이수(慶州李氏 李綏)

 

신라인(자 : 文禹, 관직 : 大純事司 左右令), 아달라왕(阿達羅王)조 때 입조(入朝)하여 연일현령(延日縣令)으로, 벌휴왕(伐休王)조 때에는 보국한림좌판원정광(輔國翰林 左判院正匡)으로 있었고, 나해왕(奈解王)조 때에는 복사(僕射)·대각간(大角干)으로서 어명(御名)으로 골포(骨浦), 칠포(漆浦), 우포(右浦) 등 삼국을 무사장군(武士將軍)과 더불어 문무모사(文武謀士)로 진압하고 접찰어사(接察御使)로서 뿐만 아니라 많은 공적을 세우고 다시 입조(入朝)하여 대보상등공신(大輔上等功臣)에 대순사사(大純事司) 좌우령(左右令)으로 우천두(牛千頭)를 받는 아찬(阿餐)에 이르렀다.

 

慶州 10 경주이씨 이기정(慶州李氏 李起貞)

 

신라인(자 : 耶邦, 호 : 忠宣公, 관직 : 輔國大將軍 大阿餐 上柱國), 중화유지과인(重和裕智過人)하여 첨약지절구경문(瞻略志節九經文)으로 나해왕(奈解王)조 때 등조하여 태위문하(太尉門下) 진사(秦事) 정사당(政事堂) 대각간(大角干)에 오르고, 조분왕(助賁王)조 때는 모사장군(謀士將軍)으로 첨해왕(沾解王) 때에는 벌사국(伐沙國) 전시(戰時)에서 충의지장(忠義之將)인 모사장군(謀士將軍)의 면모를 세우고, 상등대보공신(上等大輔功臣)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거쳐 대아찬(大阿餐) 상주국(上柱國)으로서 수우천두(授牛千頭)하고 법흥왕(法興王) 때는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받았다.

 

慶州 11 경주이씨 이미선(慶州李氏 李美善)

 

신라인(자 : 自章, 호 : 雲悌先生, 시호 : 文敬公, 관직 : 光祿大夫 太史令), 학문과 도덕군자의 성관의력(性寬儀力)을 첨해왕(沾解王)이 전해 듣고 인덕(仁德)을 살피니 과연 그 의행(儀行)에 감복하여 국정참여를 명하고 친근(親近)하였다. 미추왕(味鄒王)조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 대광보국(大匡輔國) 상등정국공신(上等定國功臣) 좌우령승(左右令丞)과 진골(眞骨)로서 아찬(阿餐)벼슬에 대광태위(大光太尉)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 등 찬란한 관직을 노령(老齡)으로 은퇴하여 경치 좋은 금오산곡(金鰲山谷)에 들어가 생전에 좋아하던 문장으로 인덕(人德), 성선(性善), 충신(忠信), 효제(孝悌)와 송죽도리(松竹桃李)의 식수권학(植樹勸學) 등 수덕현행(修德賢行)으로 97세에 종신하니 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운제선생(雲悌先生)이라 하여 모두들 칭송하였으며 태종(太宗)은 여선기행(如仙其行)을 보령(報靈)의 뜻으로 문경공(文敬公)이라 시호하였다.

 

慶州 11 경주이씨 이지염(慶州李氏 李之廉)

 

신라인(관직 : 阿餐 上柱國), 미선(美善)의 제(弟)로서 문장과 학식이 유능하여 형제가 같이 등관하고 대보상등정국공신(大輔上等定國功臣)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대농령(大農令) 아찬(阿餐) 상주국(上柱國)으로 진골품계(眞骨品階)였다.

 

慶州 12 경주이씨 이성립(慶州李氏 李成立)

 

신라인(자 : 景行, 관직 : 大角干, 大輔上等 大阿餐), 청결강직(淸潔剛直)한 성품으로 학식이 풍부하여 유례왕(儒禮王)의 사위로서 입조하여 집사과충직천지(執事果忠直遷知) 진사시랑(秦事侍郞) 평안도(平安道)에서 도총관(都摠管), 정해군령(定海軍令)과 지금의 밀양(密陽)에서 좌내사(左內史) 통정사(通政事) 등을 마치고 대각간(大角干)으로서 진골(眞骨)의 대아찬(大阿餐)에 우천두(牛千頭)의 록을 받았던 기임왕(基臨王) 때의 현상(賢相)이다.(駙馬)

 

慶州 12 경주이씨 이원립(慶州李氏 李元立)

 

신라인(자 : 仁淑, 관직 : 吉餐), 성립(成立)의 아우로서 형제간에 문장이 좋아 유례왕(儒禮王)과 기임왕(基臨王) 등 두 조정에 등관하여 상등공신(上等功臣) 대보사마(大輔司馬) 길찬(吉餐) 등 진골계 관직을 역임했다.

 

慶州 13 경주이씨 이서(慶州李氏 李曙)

 

신라인(자 : 孟己, 관직 : 大阿餐 上柱國), 학문과 효제지도행(孝悌之道行)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으며 기임왕(基臨王)조에 등관되어 남기정(南畿停)의 도총관(都摠管) 정해군령(正海軍令)과 울주(蔚州)에서 여러 차례 아척간(阿尺干)에 천거(遷擧)되었고 대보상등공신(大輔上等功臣) 농승령(農丞令) 충공좌(忠恭坐) 정사당(政事堂) 성·진골 품계만이 가질 수 있는 대아찬(大阿餐) 상주국(上柱國)에 올랐다.

 

慶州 13 경주이씨 이요(慶州李氏 李曜)

 

신라인(淸白吏, 관직 : 大角干), 서(曙)의 아우로서 문학이 깊어 현사(賢士)로 유명하여, 박사(博士) 협률도위(協律都尉)로서 상서사(尙書事)를 거쳐 대각간(大角干)으로 상등(上等)에 진골품계(眞骨品階) 대아찬(大阿餐) 벼슬로서 유명한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였다.

 

慶州 14 경주이씨 이계훤(慶州李氏 李啓烜)

 

신라인(관직 : 角干 上柱國), 정능문학(正能文學)하여 기임왕(基臨王) 때 나마(奈麻)의 주사(主事)에 천거(遷擧)되어 북기정(北畿停)의 도독(都督)으로 있었고, 백제(百濟)와 상침시(相侵時)에는 도독원병(都督援兵)으로서 백제군(百濟軍)을 대파한 전공으로 등관(登官)되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등공신(上等功臣) 각간(角干) 아찬(阿餐) 상주국(上柱國)으로 흘해왕(訖解王)조, 기임왕(基臨王)조 등에서 명상(明相)임을 사기(史記)에서 볼 수 있다.

 

慶州 15 경주이씨 이걸(慶州李氏 李傑)

 

신라인(관직 : 光祿大夫 太史令), 소웅 위력(少雄偉力)하여 흘해왕(訖解王)조에 등관 연일현감(延日縣監)의 누차 천거(遷擧)로 낭중령(郞中令)에 오르고 나물왕(奈勿王)의 사위로서 박사령(博士令) 대보정국공신(大輔定國功臣) 복령(復令) 참예(參預) 통정사(通政事) 태위(太尉)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의 관직에 올랐다.(駙馬)

 

慶州 15 경주이씨 이돈(慶州李氏 李伅)

 

신라인(관직 : 大角干 司馬 大吉餐), 소능무예(少能武藝)의 지용과인(智勇過人)으로 흘해왕(訖解王)조 때에 집사과(執事果) 사직(思直)에 오르고, 나물왕(奈勿王) 때에는 상등공신(上等功臣)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대각간(大角干) 사마(司馬) 대길찬(大吉餐) 벼슬을 지냈다.

 

慶州 16 경주이씨 이선장(慶州李氏 李宣璋)

 

신라인(자 : 思壽, 시호 : 忠元公, 관직 : 七城縣令, 上大等 忠恭坐 政事堂 太尉), 문장이 수려하고 지략이 투철하니 나물왕(奈勿王)조에 등관(登官)하여 칠성현령(七城縣令)으로 있었고, 실성왕(實聖王)조에는 태상시(太常寺) 박사(博士) 시랑(侍郞)에 눌지왕(訥祗王)조에서는 상대등(上大等) 충공좌(忠恭坐) 정사당(政事堂) 태위(太尉) 정승(政丞)을 지내고 증직(贈職)에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에 충원공(忠元公)으로 시호 하였다.

 

慶州 16 경주이씨 이혁(慶州李氏 李赫)

 

신라인(자 : 公季, 시호 : 信忠公, 관직 : 贈 諫議大夫), 형 선장(宣璋)을 닮아 성격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선속전래(善屬傳來) 하여 도학(道學)을 연독(硏讀)하고 수많은 제자를 두었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청백한 부인도 의장(衣裝)에 극히 신경을 쓰니 새 옷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여도 항시 세탁하여 부군(夫君)의 위신에 손상이 없도록 하여 한 가지 옷에 백번이상이나 기워 드리니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소위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칭하며 도덕군자(道德君子)로 널리 알려져 법흥왕(法興王)께서도 백결선생(百結先生)의 절지(節志)를 칭송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증직하고 신충공(信忠公)에 시호하였음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밝혀져 있다.

 

慶州 17 경주이씨 이기첨(慶州李氏 李基瞻)

 

신라인(자 : 尊直, 시호 : 忠順公, 관직 : 大阿餐 上柱國), 관후한 성품과 유문재예(儒文才藝)에 효제덕행(孝悌德行)을 조정에서 전해 듣고 자비왕(慈悲王)의 부름으로 소지왕(炤知王)조를 거쳐 박사시(博士寺) 대농령승(大農令丞)으로 참예정사(參預政事)하고 충공왕(忠恭王) 때에는 재상(宰相)직인 총재태위(冢宰太尉) 대아찬(大阿餐) 상주국(上柱國)에 참여하니 시호(諡號)는 충순공(忠順公)이다.

 

慶州 18 경주이씨 이인흥(慶州李氏 李仁興)

 

신라인(자 : 和行, 호 : 道干 , 시호 : 文烈公, 관직 : 贈 太史令 光祿大夫 平林候), 문장수재(文章秀才)가 많다지만 시대적으로 당시 그의 능력을 당할 자가 없었다. 소시부터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깊은 산림 속으로 들어 수종(樹種)을 선종(選種)하여 치산(治山)하고 많은 수도 덕행(修道德行)의 학자를 배출하니 세칭 도천선생(道千先生)이라 하였고, 인덕수도학(仁德修道學)과 효제미속(孝悌美俗)으로 유명하여 지증왕(智證王)의 어명(御命)으로 입조하니 실력을 시험하고 과연 현자(賢者)라 칭송하며 내사(內史) 박사령(博士令) 진사(秦事)에 천거되어 협률도위(協律都尉)로 이제까지 시조(始祖) 이래 제정되었던 제반 관계칭호(官階稱號)와 신라 덕업일(新羅 德業日)의 호칭(呼稱) 또는 율법칭호(律法稱號) 율칙(律則) 등 제법국호(諸法國號) 및 연호칭(年號稱), 지방명칭(地方名稱), 자타관고칭(自他觀故稱), 국가제후칭(國家帝候稱), 왕칭(王稱), 존호등차칭(尊號等次稱), 신등정의칭(臣等定議稱), 신라시호(新羅諡號) 증법(贈法) 등 칭호제례(稱號制禮), 제상복칭(制喪服稱) 사방지의(四方之義), 신자(新字), 덕업 직위호칭(德業 職位稱號) 등을 제정하는데 수정 및 검토케 하는 풍부한 학식을 자량(自量)껏 활용하여 조정에 만전을 기하니 그이 고귀함이 세상에 드러났고, 이웃 삼한제국(三韓諸國)에서는 대구(大懼)하며 진실로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고 감탄하였다. 왕명(王命)으로 30여 년간 국가법조연구(國家法條硏究)에 갈력(喝力)하고 연로(年老)를 사유로 퇴임한 후에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바탕으로 삼강오륜법(三綱五倫法) 등 집필(執筆) 30여 권과 세보(世譜) 20여 권 등을 후세에 전래하였고, 73세로서 생을 마쳤다. 역대왕실과 조정의 중신들은 항시 선생에 감사하였으며, 법흥왕(法興王) 23년(536)에는 선생에게 증직(贈職)으로 태사령(太史令) 광록대부(光祿大夫) 평림후(平林候)에 추증(追贈)하고 문열공(文烈公)이라 시호하였다. 후에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장문(章文)혜택을 찬사(讚辭)하여 장혜왕(章惠王)이라 추봉(追封)하고 기충기충백세충(其忠其忠百歲忠)이며 인흥인흥만세흥(仁興仁興萬歲興)하리라고 선생의 은공(恩功)을 영원토록 상기하는데 칙서(勅書)를 내렸다.

 

慶州 19 경주이씨 이확(慶州李氏 李擴)

 

신라인(관직 : 御史大夫 大農令), 음덕(陰德)으로 선사적세(善事寂世)하여 법흥왕(法興王), 진흥왕(眞興王)조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좌내사(左內史) 평장사(平章事) 도위시중(都尉侍中) 박사령(博士令), 어사대부(御史大夫) 대농령(大農令)을 역임하였다.

 

慶州 19 경주이씨 이락(慶州李氏 李樂)

 

신라인(자 : 智良, 시호 : 文正公, 관직 : 尙書 左僕射, 贈 大阿餐), 성순후용의단정(性順厚容儀端正)하여 이십세에 삼한 각지를 배회(徘徊)하며 풍월(風月)을 읊어 문장을 뽐내며 유학(遊學)을 즐기고 등관(登官)을 피하며 산수유곡(山水幽谷)을 찾았으나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처사(處士)가 분명하여 삼한시인(三韓詩人)으로 널리 알려져 진흥왕(眞興王) 명으로 등관(登官)하여 중서문하(中書門下) 간의대부(諫議大夫) 상서(尙書) 좌복사(左僕射)를 지냈던바 진평왕(眞平王) 때에 대아찬〔大阿餐(聖·眞骨品階)〕에 증직(贈職)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慶州 20 경주이씨 이선정(慶州李氏 李善禎)

 

신라인(관직 : 兵部令, 內史 門下平章事), 역유재식(亦有才識)으로 진흥(眞興), 진지(眞智), 진평왕(眞平王) 등 삼조정(三朝庭)을 거치는 동안 진흥왕(眞興王) 때 낭중(郎中)으로서 고구려병(高句麗兵)이 침범(侵犯)했을 때 사마장군(司馬將軍)으로서 김칠부(金漆夫) 등과 더불어 적팔장(敵八將)을 대파(大破)하고 또한 가야국(伽倻國)과 싸워서도 크게 이겼으며 잠기현(岑旗縣) 봉전(峰戰)에서 4성(城)을 획득하는 등 누차에 거쳐 전공(戰功)을 세우니 백제(百濟)에서는 많은 총병장(摠兵將)들이 공(公)의 모사(謀士)에 대장군(大將軍)들과 합세하여 평정(平定)하는 대공(大功)을 세우고 다시 조정에 들어 병부령(兵部令) 내사(內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대보공신(大輔功臣) 태사태보(太史太輔) 태중대부(太中大夫) 상주국(上柱國) 등을 지내면서 명문(名門)을 이루었다.

 

慶州 20 경주이씨 이광옥(慶州李氏 李光沃)

 

신라인(관직 : 翰林學士), 진평왕(眞平王)조에 등관하였다.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딸의 이름이 예향(禮香)이며 그 아들은 조표용(曺鑣龍)이다.

 

慶州 20 경주이씨 이고지(慶州李氏 李誥之)

 

신라인(관직 : 內史侍 大夫府卿 從院令), 진흥왕(眞興王)조시 관직은 내사시(內史侍) 대부부경(大夫府卿)으로 명상(名相)이라 하였으며, 삼한유사(三韓遺史)에 실려 있다.

慶州 21 경주이씨 이체(慶州李氏 李棣)

 

신라인(관직 : 門下中書舍人 尙書令 大輔功臣 上柱國), 소시(少時)부터 재조(才操)가 뛰어나 문무지용(文武智勇)으로 투철한 인물로서 진평왕(眞平王)조 때에 충직(忠直) 지주사(知奏事) 시랑(侍郞)으로서 부친 선정(善禎)을 따라 김칠부(金漆夫)와 더불어 고구려군(高句麗軍)을 격퇴시키는데 누차 전공을 세웠고 가야국(伽倻國)과도 전승하니 많은 백제군(百濟軍)이 공(公)의 위력(偉力)에 투항하여 왔으며, 관직은 문하(門下) 중서사인(中書舍人) 상서령(尙書令) 대보공신(大輔功臣) 상주국(上柱國) 등을 역임하였다.

 

慶州 21 경주이씨 여 이예향(慶州李氏 女 李禮香)

 

신라인 (女, 夫君 : 曺繼龍) 광옥〔光沃(혹은 玉)〕은 정당문학(政堂文學) 확(擴)의 차자(次子)로서 병부령(兵部令) 선정(善禎)의 아우이며, 진평왕(眞平王)조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는데 딸의 이름이 예향(禮香)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服中)에 청용질(靑龍疾)을 얻어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이자 크게 염려하던 중 어느 노승(老僧)의 말에 화왕산(火旺山) 용담(龍潭)에 가서 목욕기도(沐浴祈禱)를 마치고 돌아 온 후 신기하게도 병은 완치되고, 태기(胎氣)가 있어,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옥대(玉帶)를 두른 한 남자(男子)가 나타나 이르기를 『이 아이의 부친(父親)은 동해용왕(東海龍王)의 아들이니 잘 기르라. 후에 후작(侯爵)이 될 것이며 자손(子孫)도 번영(繁榮)할 것이다.』하며,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후 10개월이 되어서 생남(生男)하는지라 자세히 살펴보니 겨드랑이 밑에『조(曺)』가 붉게 씌어져 있어 아버지인 광옥(光沃)은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진흥왕(眞興王)에게 알리니 왕께서도 신기하게 여겨 성(姓)을 조(曺)라 하고 이름을 계용(繼龍)이라 특사(特賜)하였으며 부마(駙馬)로 삼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封)해진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던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始祖)의 모친(母親)이다.

 

慶州 22 경주이씨 이태휘(慶州李氏 李泰暉)

 

신라인 (자 : 乃夏, 관직 : 諫議大夫 中書令), 문장(文章)이 대능(大能)하여 중원(中原)에 유학(遊學)을 하니 당(唐)나라 무덕왕(武德王)이 공(公)의 높은 식견(識見)을 듣고 유문정(劉文靜)을 비적(斐寂)하여 율법(律法)을 수정(修正)하라기에 수행(遂行)하니 극히 감복(感服)하였고, 국자(國子) 태학(太學) 감시(監試)를 사문생(四門生) 300여 인 중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及第)하니 당년 22세라 크게 치가(致嘉) 하며,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안마(鞍馬)까지를 사명(賜命)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예부(禮部) 시랑(侍郞)에 누차 천거 되었다. 30세에 천국(遷國) 하여(善德 3년) 당(唐)나라 풍습을 청학(請學)케 하고 진덕왕(眞德王) 2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서령(中書令) 등으로 참정(參政)하여 이름을 떨쳤다.

 

慶州 23 경주이씨 이우영(慶州李氏 李友榮)

 

신라인 (자 : 浩眞, 시호 : 文貞公, 관직 : 大阿餐 上柱國), 소독서문장(少讀書文章)하고, 진덕왕(眞德王) 2년(648) 왕명(王命)으로 당(唐)나라에 들어가 청병사신(請兵使臣) 특파(特派)되어 구현병(救顯兵)으로 하여금 백제(百濟)를 공벌(攻伐)케 하였다. 그의 학식(學識)이 능숙함을 전해들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그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케 하였던 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及第)하니 당태종(唐太宗)은 기뻐하며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세자시강(世子侍講)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9월에 청병특사(請兵特使)를 보내오자 선생의 간청으로 쾌히 승인하고 선생의 문장력을 칭송하였다. 환국(還國)하여 당(唐)의 구원병(救援兵)과 더불어 고구려(高句麗)를 쳐서 대공(大功)을 세우고 협률도위위사(協律都尉衛社) 치리공신(致理功臣) 내사문하(內史門下) 평장사(平章事) 태위(太尉) 상서좌복사(尙書 左僕射) 대보아찬(大輔阿餐) 상주국(上柱國)의 행직(行職)외에 증직(贈職)으로 대사광록대부(大師光綠大夫) 태위(太尉)와 문정공(文貞公)으로 시호(諡號) 받았다.

 

慶州 24 경주이씨 이준(慶州李氏 李駿)

 

신라인 (자 : 尙民, 시호 : 文良公, 관직 : 內史 侍中), 재식(才識)이 풍유(豊有)하여 문무(文武)·신문왕(神文王) 양조(兩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내사시중(內史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이르고,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김춘추(金春秋) 무열왕(武烈王)의 부마(駙馬)이다. 배(配)는 승창부인 김씨(承昌夫人 金氏)로 태종 무열왕 휘춘추(諱春秋)의 여(女)이다.

 

慶州 25 경주이씨 이소(慶州李氏 李紹)

 

신라인 (자 : 子順, 시호 : 忠孝公, 관직 : 大阿餐 太傅), 학예유재(學藝有才)하여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행실이 투철하고 효소왕(孝昭王) 때 등관(登官)하여 내사시랑(內史侍郞) 대각간(大角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수태위시중(守太尉侍中)과 성진골품계(聖眞骨品階)에서 받는 대아찬(大阿餐)에 태부(太傅)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시호는 충효공(忠孝公)에 효표려(孝表閭)를 나라에서 세워 평소 그의 효성(孝誠)을 본받도록 하였다.

 

慶州 26 경주이씨 이경지(慶州李氏 李敬智)

 

신라인 (자 : 進餘, 시호 : 忠莊公, 관직 : 侍中 上柱國), 유능재식(有能才識)하여 성덕왕(聖德王)조에서 충신좌명공신(忠信佐命功臣) 정광력(正匡歷)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농도위령(大農都尉令) 상서사(尙書事), 사도통정사(司徒通政事) 시중(侍中)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였다. 증직(贈職)에 태사 은청광록대부(太史 銀靑光祿大夫)로 국가 대공(大功)에 보답하여 충장공(忠莊公)으로 시호(諡號) 하였다.

 

慶州 27 경주이씨 이욱(慶州李氏 李頊)

 

신라인 (자 : 定世, 호 : 明巖, 시호 : 忠定公, 관직 : 大角干 上柱國), 소능역학(少能力學)하고 효제유애(孝悌有愛)로 유명한 가문(家門)에 효성(孝誠)이 투철하여 성덕왕(聖德王)이 조정으로 불러들여 충효행실(忠孝行實)의 특강을 특별전담(特別全擔)하게 하고 한림시랑(翰林侍郞)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직책을 다하였고, 효성왕(孝成王)의 잠저(潛邸)에서 신충공신(信忠功臣)의 특강을 하였고, 경덕왕(景德王)조에서는 협모보리(協謀輔理)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門下侍郞) 동(同) 중서(中書)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대각간(大角干) 도위령(都尉領) 상서사(尙書事) 시중(侍中) 판어사대(判御史臺) 상주국(上柱國) 등의 관직에서 충효사실의 교화(敎化)와 사대부 집안의 표본인(標本人)이 되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慶州 27 경주이씨 이준(慶州李氏 李俊)

 

신라인 (자 : 尙民, 법명 : 孔宏, 관직 : 左內史), 효성왕(孝成王) 잠저(潛邸)에서 한림현사(翰林賢士)로서 신충공신(信忠功臣)의 교시(敎示)로 좌내사(左內史)에 있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상의직장(尙衣直長) 동정(同正)으로 일찍이 왕(王)과 친했으나 자신의 단명(短命)함을 영화로운 직책에서 떠나 입산수도(入山修道)할 것을 결심하고 창불사(刱佛寺)에 들어 수신(修身)하다가 748년 무자(戊子)에 친시(親試)에 급제(及第)하여 50세의 노장(老壯)으로서 문장을 과시하였다. 조정(朝庭)에서는 그의 입조(入朝)를 누차 권유(勤諭)하였으나 그 괴로움을 피하여 삭발(削髮)하고 기속사(祈俗寺)에 들어가 공굉(孔宏)이라는 법명을 받고 노련한 승려(僧侶)로서 도덕수행(道德修行)에 전념(專念)하기를 20년으로, 단명(短命)했던 자신을 70여 세까지 연장(延長)하던 처세책(處世策)으로 사치와 영예를 초월한 위인정신(偉人精神)을 높이 평가한 원성왕(元聖王)은 기간(其間) 보국공적(報國功績)을 칭송하며 그를 본(本)받으라 권하고, 조정이 어지럽거나 국사가 고르지 않을 때는 그의 영전(靈前)에 친히 분향(焚香)하며, 자위(自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慶州 28 경주이씨 이원장(慶州李氏 李元長)

 

신라인 (자 : 宗甫, 시호 : 文宣公, 관직 : 門下 平章事), 문무지용(文武智勇)이 과인(過人)하여 경덕왕(景德王) 때 진양도독부(晋陽都督府) 도총관(都摠管) 정해군(正海軍)에 등관(登官)하여 좌내사(左內史) 태위랑(太尉郞) 중령(中令)에 누천(累遷)되었고, 혜공왕(惠恭王)조에서 내사시랑(內史侍郞) 문하(門下) 평장사(平章事) 상주국(上柱國)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시호(諡號)는 문선공(文宣公)이다.

 

慶州 29 경주이씨 이한로(慶州李氏 李漢老)

 

신라인 (자 : 玄如, 시호 : 文純公, 관직 : 內史侍中),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할 때 보조치리공신(輔助致理功臣)으로 등관(登官)하여 태사태보(太師太保) 협률도위(協律都尉) 대농박사령(大農博士令)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내사시중(內史侍中) 상주국(上柱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국가(國家)에 헌신(獻身)하니 후에 문순공(文純公)으로 시호(諡號)하여 영혼(靈魂)에 보은(報恩)하였다.

 

慶州 30 경주이씨 이계양(慶州李氏 李季陽)

 

신라인 (자 : 順知, 관직 : 門下侍中 上柱國 太師), 애장왕(哀莊王) 3년에 등제(登第)하고 헌덕왕(憲德王) 등 양조(兩朝)에서 춘방한림학사(春榜翰林學士) 내사(內史) 중서사인(中書舍人) 시중(侍中)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상서(尙書) 좌복사(左僕射)에서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태사은청광록대부(太史銀靑光祿大夫)에 승진하였다.

 

慶州 31 경주이씨 이도(慶州李氏 李陶)

 

신라인 (자 : 常夫, 호 : 茅溪, 시호 : 文肅公, 관직 : 尙書), 815년 을미(乙未)에 등제(登第)하고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에도 중시(重試)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 승선관(承宣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수태위(守太尉) 평장사(平章事)하고, 희강왕(僖康王) 원년(元年) 836년에는 협률모위사(協律謀衛社) 치리공신(致理功臣) 도위령(都尉令) 시통정(侍通政) 상서사(尙書事)에 이르고, 그의 능수능란(能秀能爛)한 별호(別號)가 모계선생(茅溪先生)이라 불리 우고 시호(諡號)는 문숙공(文肅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慶州 32 경주이씨 이사언(慶州李氏 李嗣彦)

 

신라인 (자 : 重仁, 호 : 松溪, 시호 : 文義公, 관직 : 太史令), 희강왕(僖康王) 때 등제(登第)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백성의 편에서 선정(善政)하니 흉역(凶逆) 김명소(金明所)로부터 피습(被襲)을 당하여 크게 상처를 입자 세인(世人)들에는 선생(先生)의 억울함을 통탄(痛嘆)하였다. 신무왕(神武王)이 시행(施行)하던 중시과거(重試科擧)에 최문창〔崔文昌 (文昌候 崔致遠)〕과 같이 급제(及第)하여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로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직위(職位)를 하고 후에 왕명(王命)으로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위촉(委囑)되자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직책(職責)을 완수(完遂)하니 과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왕실(王室)의 평판(評判)을 받았다. 기후(其後)에도 문하시중(門下侍中) 태사령(太史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서 국정(國政)에 참여하니 세인(世人)들은 송계선생(松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의공(文義公)으로 증시(贈諡) 되었다.

 

慶州 33 경주이씨 이기(慶州李氏 李岐)

 

신라인 (자 : 孔淑, 관직 : 尙書 左僕射), 문성왕(文聖王) 때 등제(登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서시랑(中書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내사(內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상서(尙書) 좌복사(左僕射)의 관직으로 참정(參政) 하였다.

 

慶州 33 경주이씨 이위(慶州李氏 李渭)

 

신라인 (자 : 涇之, 호 : 釣隱, 시호 : 忠肅公, 증봉(贈封) : 車城君, 관직 : 城主將軍, 증 : 工曹典書 後壁上功臣 輔國上大將軍, 분적 : 慶州李氏에서 首分籍 - 車城李氏 始祖), 문무지용과인(文武智勇過人)하여 헌안왕(憲安王)조 원년(元年) 무과(武科)에 18세로 급제(及第)하고, 아버지 경주이씨(慶州李氏) 32세(世) 중서사인(中書舍人) 휘사언(諱嗣彦)과 함께 흉적(凶賊) 김명소(金明所)에게 피습(被襲)당해 상처(傷處)를 입자 차성〔車城(機張縣의 古號)〕에 피해서 그 고통을 받다가 이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경문왕(景文王) 14년에 국란평정공신(國亂平定功臣)으로 차성군(車城君)에 봉(封)해 지면서 아울러 관직(官職)이 성주장군(城主將軍)에 오르고 록상서사(錄尙書事) 하였다. 연로(年老)하여 직을 물러나서도 해간학사(海間學士)에 임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훈도하며 나무를 심고, 바다에 고기를 놓아기르며 은거(隱居)하였다고 하여, 호(號)를 조은(釣隱)으로 얻었다. 마침내 신덕왕(神德王) 4년에 돌아가시매 국가에서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아울러 무덤을 차성군릉(車城君陵)이라 명명(命名)하고 그 무덤은 기장현(機張縣, 古號 車城) 만화리(萬化里) 뒷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2년에 공조전서(工曹典書) 후벽상공신(後壁上功臣) 보국상(輔國上) 대장군(大將軍)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으로 내렸다. 이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차성이씨(車城李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배위(配位)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월성김씨(月城金氏)로 문성왕(文聖王)조 정양공(貞兩公)의 여(女)이다. 묘소(墓所)는 삽량주(歃良州) 양주군〔良州郡(현 梁山郡 鐵馬面)〕고촌리(古村里) 북등(北登) 간좌(艮坐)에 있다.

 

慶州 34 경주이씨 이희두(慶州李氏 李禧斗)

 

신라인 (관직 : 門下侍中 上柱國), 헌안왕(憲安王) 때 중제(仲弟) 진두(辰斗)와 같이 중원(中元)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니 중국(中國)에서는 형제(兄弟)의 문장 솜씨를 높이 받들어 한림원(翰林院)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직무 하다가 3년 만에 환국(還國)하여 경문왕(景文王) 2년(862)에 별설(別設)한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또 형제(兄弟)가 꼭 같이 급제(及第)하니 세인(世人)들은 과연 명문가(名文家)의 귀족(貴族)이라고 칭찬이 드높았으며 등관(登官)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상서(尙書) 평장사(平章事)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직위하고 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追贈) 되었다.

 

慶州 34 경주이씨 이진두(慶州李氏 李辰斗)

 

신라인 (관직 : 兵部令), 형 희두(禧斗)와 문장이 유능하여 형제가 헌안왕(憲安王) 때 중국(中國)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한림원(翰林院)에 드니 한림형제(翰林兄弟)라고 명성이 높았다. 3년 후에 형과 같이 귀국(歸國)하여 경문왕(景文王) 2년에 시행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중시(重試)에 형제가 급제(及第)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내서사인(內書舍人) 상서(尙書) 병부령(兵部令) 등을 역임했다.

 

慶州 34 경주이씨 이환(慶州李氏 李桓)

 

신라인 (자 : 正甫 , 관직 : 九重奈麻), 차성군(車城君) 위(渭)의 친자(親子)로서 유문장겸무용(有文章兼武勇)하여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아가 외관(外官) 대나마(大奈麻)에 이르고, 마침내 구중나마(九重奈麻)가 되었다. 묘는 기장현(機張縣) 만화리(萬化里) 후산(後山)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 아찬(阿餐) 충열(忠烈)의 여(女)이다.

 

慶州 35 경주이씨 이성(慶州李氏 李誠)

 

신라인 (자 : 仲渭, 호 : 法軒, 시호 : 文懿公, 관직 : 侍中), 문장이 좋아 재식(才識)이 정민(精敏)하고 예서(隸書)에 능(能)하여 역대 필사로서 유명하였다. 헌강왕(憲康王)조 때 급제(及第)하고 등관(登官)하여 한림원(翰林院)의 태학사(太學士)로서 중서간의대부(中書諫議大夫) 내사성평장사(內史省平章事) 내사상서(內史尙書)로서 정사(政事)에 참여하다가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임해(臨海)에 퇴거(退去)했다. 총명(聰明)한 학사(學士)들에게 훈도권학(訓導勸學)하고 근식목수(勤植木樹)하며 양어방생(養魚放生)하는 것으로 자연을 애호하며 20여 권의 필적문집(筆蹟文集)과 30여 권의 세보문집(世譜文集)을 전가(傳家)하고 훌륭한 문하생(門下生)들을 많이 배출(輩出)하여 나라의 장래 인재(人才)를 육영(育瑛)하며 일생(일생)을 국가를 위하여 몸 바치니 정강왕(定康王)이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시중령(侍中領)에 사봉(賜封)하고 법헌선생(法軒先生)이라 받들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의공(文懿公)에 추증(追贈)되었다.

 

慶州 35 경주이씨 이백전(慶州李氏 李白全)

 

신라인 (관직 : 內史侍中 大府卿), 병부령(兵部令) 진두(辰斗)의 장남(長男)으로 관직이 내사시중(內史侍中) 대부경(大府卿)이다.

 

慶州 35 경주이씨 이전지(慶州李氏 李詮之)

 

신라인 (관직 : 內史省屬 內史大夫), 병부령(兵部令) 진두(辰斗)의 차남(次男)으로 문무용암(文武勇巖)하여 내성사 시중(內省事 侍中) 상등대장군(上等大將軍)에 등관(登官)되었다가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내사성속(內史省屬)의 내사대부(內史大夫)를 지내며 국정(國政)에 참여하였다.

 

慶州 35 경주이씨 이오연(慶州李氏 李䫨然)

 

신라인 (자 : 豊原, 호 : 遠海, 관직 : 外官 及伏干), 차성군(車城君) 위(渭)의 친손(親孫)으로 관직은 외관(外官) 급복간(及伏干)에 올랐다. 묘는 기장현(機張縣) 만화리(萬化里) 북등(北嶝) 축좌(丑坐)에 있고, 배위(配位)는 월성손씨(月城孫氏) 아찬(阿餐) 양복(陽馥)의 여(女)이다.

 

慶州 36 경주이씨 이거명(慶州李氏 李居明)

 

신라인 (관직 : 蘇判), 소판(蘇判)이라는 관직(官職)은 신라시대(新羅時代) 골품제도(骨品制度)의 성진골품(聖眞骨品)만이 천거(薦擧)되던 관직으로 신라 사회계급(社會階級)의 귀족(貴族)만이 봉작(封爵)될 수 있었고,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왕(王)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서부터 혜공왕(惠恭王) 때까지는 진골계(眞骨系)에서 왕위(王位)에 올랐던 골품계급사회(骨品階級社會)였음을 알 수 있다. 혁거세(赫居世)를 양육(養育)하여 다른 5촌장(村長)과 더불어 왕(王)으로 추대(推戴)하며 신라(新羅)를 창업(創業)한 양산촌장(楊山村長)이고,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된 비조(鼻祖) 알평(謁平)의 36세손으로서 전란(戰亂)으로 일시(一時) 실보시(失譜時) 보첩기록(譜牒記錄)에 원대손(遠代孫)으로 1세(世)라 표기(標記)하였으나 이제 세계(世界)가 분명(分明)하게 되었다. (舊譜 遠代孫)

 

慶州 36 경주이씨 이공(慶州李氏 李恭)

 

신라인 (관직 : 輔國上 大將軍 尙書事), 백전(白全)의 장자(長子)로서 보국상(輔國上) 대장군(大將軍) 상서사(尙書事) 하였다.

 

慶州 36 경주이씨 이한(慶州李氏 李翰)

 

신라인 (관직 : 司空), 백전(白全)의 차자(次子)로서 문장력(文章力)이 탁월(卓越)하고 덕망(德望)이 높아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상서사(尙書事) 어사(御史) 중승상(中丞相) 상주국(上柱國)의 찬란한 관직에 올랐고 후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고 대대로 등관되었으며 배위(配位)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11세손으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여(女)이며, 완산파〔完山派(=全州)〕로 분파(分派)하였다.

 

慶州 36 경주이씨 이원(慶州李氏 李元)

 

신라인 (관직 : 中書侍郞), 판원(判院) 상주국(上柱國) 중서시랑(中書侍郞)의 관직(官職)에서 신덕왕(神德王)을 호종(扈從)하고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입국(入國)했다가 927년 국내에서는 견훤란(甄萱亂)이 일어나자 진압(鎭壓)되기를 기다리던 중 신덕왕(神德王)이 노환(老患)으로 작고(作故)하자 같은 해 63세(歲)로 끝내 환국(還國)치 못하고 그 곳에서 별세(別世)하였다.

 

慶州 36 경주이씨 이승(慶州李氏 李塍)

 

신라인 (자 : 伯華, 호 : 淵泉, 관직 : 仕臣), 차성군(車城君) 위(渭)의 4세손(世孫)으로 관직은 신라(新羅) 외관(外官) 주보(州補)를 거쳐, 금관경(金官京) 사신(仕臣)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월성손씨(月城孫氏)로서 아찬(阿餐) 치우공(致祐公)의 여(女)이다.

 

慶州 37 경주이씨 이금현(慶州李氏 李金現)

 

신라인 (관직 : 角干, 宰相),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친자(親子)로서 문무식재(文武識才)가 탁월(卓越)하여 병부령(兵部令) 대아찬(大阿餐) 각간(角干)으로서 재상(宰相)을 겸직(兼職)하던 명상(名相)이다.

 

慶州 37 경주이씨 이자연(慶州李氏 李自延)

 

신라인 (관직 : 門下侍中 上柱國)

 

慶州 37 경주이씨 이령장(慶州李氏 李令長)

 

신라인 (관직 : 內史侍中)

 

慶州 37 경주이씨 이용(慶州李氏 李鏞)

 

신라/고려인 (자 : 尹善, 호 : 松石, 관직 : 侍郞), 차성군(車城君) 위(渭)의 5세손(世孫)으로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원년(元年) 무과(武科) 급제(及第), 원외랑(員外郞)과 랑중(郞中)을 거쳐 시랑(侍郞)에 역임하였다. 증(贈) 장군(將軍)을 하사(下賜) 받았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 사찬(沙餐) 우벽공(友璧公)의 여(女)이다.

 

慶州 38 경주이씨 이금서(慶州李氏 李金書)

 

신라/고려인 (관직 : 郞中), 신라(新羅) 골품계급사회(骨品階級社會)의 귀족(貴族)으로서 중국 중원(中國 中原)에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태수(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의 관직(官職)에 있다가 신라(新羅)가 패망(敗亡)하여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에 양위(讓位)하고 입조(立朝)한 후 환국(還國)하였고, 배위(配位)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서 경순왕〔敬順王(諱傅)〕의 3녀(女)이다.(駙馬)

 

慶州 38 경주이씨 이천상(慶州李氏 李天祥)

 

신라말 (관직 : 尙書 左僕射)

 

慶州 38 경주이씨 이사(慶州李氏 李思)

 

신라말 (관직 : 淸道 太守)

 

慶州 38 경주이씨 이원준(慶州李氏 李願浚)

 

고려인 (자 : 而峰, 호 : 守謙, 관직 : 高麗 監門衛將軍), 차성군(車城君) 6세손(世孫)으로서 고려(高麗) 별장(別將)이 되어 중랑장(中郞將)에 승진(陞進)되고, 이어 감문위장군(監門衛將軍)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로서 엽(燁)의 여(女)이다.

 

慶州 39 경주이씨 이윤홍(慶州李氏 李潤弘)

 

려말인 (관직 : 兵部令 兵正 宰相)

 

慶州 39 경주이씨 이광희(慶州李氏 李光禧)

 

려말인 (관직 : 阿尺干)

 

慶州 39 경주이씨 이개(慶州李氏 李開)

 

려말인 (시호 : 文忠公 , 관직 : 戶長), 경주이씨(慶州李氏)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39세(世)로서 진두(辰斗)의 6세손(世孫) 휘개(諱開)는 강양〔江陽(陜川의 古號)〕군(君)으로 합천(陜川)에 거주(居住)하면서 호장(戶長)이 되었기 때문에 본관(本官)을 합천(陜川)으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며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시조(始祖)로서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명문호족(名門豪族)의 긍지(矜持)로 번성(繁盛)하여 가고 있다.

 

慶州 39 경주이씨 이윤장(慶州李氏 李潤張)

 

려말인 (자 : 天佑, 호 : 白烏, 시호 : 文成公, 관직 : 大司馬 大將軍),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사위이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39세손(世孫)으로 금서(金書)의 2남(男)이요, 윤홍(潤弘)의 제(弟)로서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백오〔白烏(平昌의 古號)〕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官)을 평창(平昌)으로 삼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慶州 39 경주이씨 이윤원(慶州李氏 李潤遠)

 

려말인 (자 : 春桂(춘계), 시호 : 忠翊公, 관직 : 兵馬節度使),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39세손(世孫)으로 호부랑중(戶部郞中) 이금서(李金書)의 3남(男)으로서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증손(曾孫)인데 중형(仲兄) 백오(白烏)는 평창이씨(平昌李氏)로 분적(分籍)하고, 공(公)은 판도판서(版圖判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있다가 가평군(加平君)에 봉(封)해지면서 본관(本官)을 가평(加平)으로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 하였다.

 

慶州 39 경주이씨 이주호(慶州李氏 李柱顥)

 

고려인 (자 : 應吉, 호 : 守巖, 관직 : 衛尉寺 判事), 차성군(車城君) 7세손(世孫)으로서 고려(高麗)에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소경(少卿), 위위사(衛尉寺) 판사(判事)로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개성왕씨(開城王氏) 대장군(大將軍) 순언공(純彦公)의 여(女)이다.

 

慶州 40 경주이씨 이승훈(慶州李氏 李承訓)

 

고려인 (관직 : 侍郞), 정종(定宗) 때 내사시랑(內史侍郞),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등관(登官)하였다.

 

慶州 40 경주이씨 이승겸(慶州李氏 李承謙)

 

고려인 (관직 : 判禮部事), 벼슬은 판례부사(判禮部事)를 지냈다.

 

慶州 40 경주이씨 이입전(慶州李氏 李立全)

 

고려인 (관직 : 大司徒 三重大匡), 벼슬은 대사도 삼중대광(大司徒 三重大匡)를 지냈다.

 

慶州 40 경주이씨 이강영(慶州李氏 李顜煐)

 

고려인 (자 : 芝園, 호 : 秋齋, 관직 : 提學), 차성군(車城君) 8세손(世孫)으로서 고려(高麗)에 응교(應敎), 직제학(直提學)에서 제학(提學)에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판사(判事) 기연공(基淵公)의 여(女)이다.

 

慶州 41 경주이씨 이주복(慶州李氏 李周復)

 

고려인 (관직 : 左司諫), 벼슬은 좌사간(左司諫)을 지냈다.

 

慶州 41 경주이씨 이재정(慶州李氏 李齋廷)

 

고려인 (관직 : 侍郞), 벼슬은 시랑(侍郞)을 지냈다.

 

慶州 41 경주이씨 이주좌(慶州李氏 李周佐)

 

고려인 (관직 : 尙書), 소판공(蘇判公)의 7세손(世孫)이요, 알평공(謁平公)의 41세(世), 주복(周復)의 아우로서 형부상서(刑部尙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사공(司空)에 추증(追贈)되었고, 아들 서(舒)는 고려(高麗) 때 밀성부사(密城副使)로 공(功)이 있어 군기감(軍器監)이 되었으며 1268년 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 벽상공신(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아산백(牙山伯)에 봉封()해져 그의 후손(後孫)들은 옹〔邕(門下侍中)〕의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아산이씨(牙山李氏)로 분종(分宗)하였다.

 

慶州 41 경주이씨 이진(慶州李氏 李鎭)

 

고려인 (자 : 叔一, 호 : 菊初, 관직 : 鄕職 三重大匡 太師), 차성군(車城) 의 9세손(世孫)으로서 고려(高麗)에 정종(靖宗)조에 정보(正甫)를 시작으로 대상(大相)이 되고, 이어서 대승대광(大丞大匡)에서 향직(鄕職)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가 되었다. 배위(配位)는 개성왕씨(開城王氏) 판사(判事) 명중공(明仲公)의 여(女)이다.

 

慶州 42 경주이씨 이칭(慶州李氏 李偁)

 

고려인 (관직 : 門下侍中 補祚功臣),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慶州 42 경주이씨 이우칭(慶州李氏 李禹偁)

 

고려인 (관직 : 門下侍中), 알평공(謁平公)의 42세손(世孫)으로 칭(偁)의 아우이며, 보조공신(補祚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재령군(載寧君)에 봉(封)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본관(本貫)을 재령(載寧)으로 하고,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제령이씨(載寧李氏)로 분적(分籍)하였다.

 

慶州 42 경주이씨 이시발(慶州李氏 李時發)

 

고려인 (자 : 五福, 호 : 數一, 관직 : 門下省 門下侍中), 차성군(車城)의 10세손(世孫)으로서 고려(高麗) 문종(文宗)조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 博士)를 시작으로 직강(直講)이 되고 이어 사예(司藝)에서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문하성(門下省)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운기공(耘岐公)의 여(女)이다.

 

慶州 42 경주이씨 이시봉(慶州李氏 李時逢)

 

고려인 (자 : 五逢, 호 : 數百, 관직 : 平章事), 차성군(車城)의 10세손(世孫)으로 시발(時發)의 아우로 벼슬이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로 경순공(景淳公)의 여(女)이다.

 

慶州 43 경주이씨 이치련(慶州李氏 李侈連)

 

고려인 (관직 : 門下侍中), 벼슬은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하였다.

 

慶州 43 경주이씨 이수경(慶州李氏 李守敬)

 

고려인 (자 : 安世, 호 : 南谷, 관직 : 叅知政事 中書門下省 內史令), 차성군(車城)의 11세손(世孫)으로 선종(宣宗)조에 급제(及第)하여 문하록사(門下錄事)를 시작으로 기거주(起居注),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서 좌상시(左常侍)에 오르고 마침내 참지정사(叅知政事)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내사령(內史令)을 역임(歷任)하였다. 아울러 저서(著書)로 남곡참위(南谷讖緯) 삼권(三卷)을 남겼다. 묘(墓)는 양산현(梁山縣) 양산면(梁山面) 후산(後山) 간좌(艮坐)에 있고,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밀양박씨(密陽朴氏) 문하시랑(門下侍郞) 세중공(世中公)의 여(女)로 묘는 합폄(合窆)하였다.

 

慶州 43 경주이씨 이중기(慶州李氏 李仲氣)

 

고려인 (자 : 安鎰, 호 : 雲谷, 관직 : 知門下省事), 차성군(車城)의 11세손(世孫) 수경(守敬)의 아우로 선종(宣宗)조에 급제(及第)하여 중서주서(中書注書)로 시작하여 우보간(右補諫),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직문하(直門下), 우상시(右常侍)에 오르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용공(涌公)의 여(女)이다.

 

慶州 44 경주이씨 이총섬(慶州李氏 李寵暹)

 

고려인 (관직 : 門下侍中), 998년 오인유(吳仁裕), 남궁원청(南宮元淸), 이윤관(李允寬) 등 제공(諸公)과 더불어 진(秦)나라에 청원(請願)하여 고려(高麗)에도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을 건립(建立)했으며, 국자감(國子監) 시험제도설립(試驗制度設立)을 청원(請願)하여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립(設立)하게 하였으니, 문명국가(文明國家)들로서의 체면(體面)을 세우고 면학(勉學)의 열성(熱性)을 고취(鼓吹)시켰다.

 

慶州 44 경주이씨 이교퇴(慶州李氏 李敎退)

 

고려인 (자 : 直弼, 호 : 忘軒, 관직 : 兵部尙書), 차성군(車城)의 12세손(世孫)으로 인종(仁宗)조에 급제(及第)하여 도사(都事)를 시작으로 우사랑중(右司郞中), 좌승(左丞), 우복사(右僕射)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월성정씨(月城鄭氏) 영후(榮後)의 여(女)이다.

 

慶州 45 경주이씨 이춘정(慶州李氏 李春貞)

 

고려인 (관직 : 府使), 벼슬은 부사(府使)하였다.

 

慶州 45 경주이씨 이춘림(慶州李氏 李春林)

 

고려인 (관직 : 門下侍郞), 벼슬은 문하시랑(門下侍郞)하였다.

 

慶州 45 경주이씨 이정언(慶州李氏 李晶彦)

 

고려인 (자 : 好善, 호 : 東山, 관직 : 銀靑光祿大夫), 차성군(車城)의 13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조에 급제(及第)하여 선의랑(宣議郞), 조산대부(朝散大夫), 광록대부(光祿大夫)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고종(高宗)시 문헌공(文獻公)으로 증시(贈諡)하였고, 아울러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著書)에 동산 고려예의집(東山 高麗禮義集)이 있다. 묘(墓)는 기장현(機張縣) 교동(校洞) 후산(後山) 자좌(子坐)에 있고, 배위(配位)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복흥(復興)의 여(女)이며 묘(墓)는 합폄(合窆)하였다.

 

慶州 45 경주이씨 이주복(慶州李氏 李株福)

 

고려인 (자 : 好事, 호 : 北山, 관직 : 通禮門 判事), 차성군(車城)의 13세손(世孫) 정언(晶彦)의 아우로 명종(明宗)조에 급제(及第)하여 통사사인(通事舍人)으로 시작하여 합문부사(閤門副使), 인진부사(引進副使)에서 승진(陞進)하여 통례문 판사(通禮門 判事)를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월성최씨(月城崔氏)로 유엄공(有渰公)의 여(女)이다.

 

慶州 46 경주이씨 이현복(慶州李氏 李玄福)

 

고려인 (관직 : 左僕射), 거년(去年)에 신설(新設)된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우수(優秀)한 성적(成績)으로 급제(及第)하고 국자감(國子監)에서 부(賦), 시(詩), 경의(經義) 등을 시강(施講)하였고, 문하성(門下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좌복사(左僕射)를 역임(歷任)했다.

 

慶州 46 경주이씨 이녹천(慶州李氏 李錄千)

 

고려인 (관직 : 吏部尙書), 1135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서경(西京)에 남아 있는 조광(趙匡) 등의 무리들을 토벌(討伐)하여 평정(平政)하였음이 고려사(高麗史)에 빛나고 있다.

 

慶州 46 경주이씨 이재인(慶州李氏 李在荵)

 

고려인 (자 : 叔英, 호 : 簫隱(소은), 관직 : 中書平章事), 차성군(車城)의 14세손(世孫)으로서 신종(神宗)조에 중서주서(中書注書)로 출발하여 좌정언(左正言), 기거함(起居含), 중서함인(中書含人), 우상시(右常侍)에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역임(歷任)하였다. 묘(墓)는 양산현(梁山縣) 철마면(鐵馬面) 고촌리(古村里) 안산(案山) 경좌(庚坐)이고, 배위(配位)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완철(完喆)의 여(女)이다.

 

慶州 47 경주이씨 이선용(慶州李氏 李宣用)

 

고려인 (관직 : 軍尹), 벼슬은 군윤(軍尹)을 하였다.

 

慶州 47 경주이씨 이신우(慶州李氏 李申佑)

 

고려인 (관직 : 兵部侍郞 慶興君), 알평공(謁平公)의 47세(世)요,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12세손(世孫)이다. 고려(高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유공(有功)하여 경흥군(慶興君)에 봉(封)해지고 원주백(原州伯)에 봉(封)하자 후손(後孫)들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분관(分貫)하였으나 공(公)의 10세손(世孫)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尙書右僕射)〕는 본종(本宗)으로 잉관(仍貫)하여 11개 대파(大派) 중의 월성군공파조(月城君公派祖)로 세계(世系)하여 경흥군(慶興君)의 12세손(世孫) 반계(攀桂)께서는 이부시랑(吏部侍郞) 지연(之衍)의 친손(親孫)으로 태종(太宗)의 사부(師傅)로 있다가 경원〔慶原(原州의 古號)〕군(君)에 봉(封)하자 아우인 을계〔乙桂(上護軍)〕와 함께 원주(原州)를 본관(本貫)삼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니 사실상(事實上)의 원주이씨(原州李氏) 득관(得貫)은 이때부터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중국(中國) 절서성(浙西省)에서 거주(居住)하다가 병란(兵亂)을 피(避)하여 진한(辰韓) 땅으로 내도(來渡)하여 원주(原州)에 안착(安着)한 춘계(春桂)를 시조(始祖)로 한 구(舊) 원주이씨(原州李氏)는 분적종(分籍宗)이 아님을 밝혀 둔다.

 

慶州 47 경주이씨 이준억(慶州李氏 李俊億)

 

고려인 (관직 : 都衛尉丞), 벼슬은 도위위승(都衛尉丞)을 하다.

 

慶州 47 경주이씨 이대근(慶州李氏 李大根)

 

고려인 (자 : 弘相, 호 : 東埜(동야), 관직 : 兵部尙書), 차성군(車城)의 15세손(世孫)으로서 고종(高宗)조에 급제(及第)하여 도사(都事)로 출발하여 우사랑중(右司郞中), 우승(右丞), 지성사(知省事), 우복사(右僕射)를 거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歷任)하였다. 저서(著書)에 동야병서(東埜兵書)가 전(傳)한다. 배위(配位)는 월성최씨(月城崔氏)로 원일(元一)의 여(女)이다.

 

慶州 48 경주이씨 이승고(慶州李氏 李升高)

 

고려인 (관직 : 甫尹), 벼슬은 보윤(甫尹)을 하였다.

 

慶州 48 경주이씨 이양식(慶州李氏 李陽植)

 

고려인 (관직 : 左僕射), 문하성(門下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상서도성(尙書都城)의 좌복야(左僕射)를 역임(歷任)하였고, 아들 순우(純祐)는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를 지냈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江陵 屬縣)〕로 이거(移居)한 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세계(世系)하고 있다.(玄福의 孫)

 

慶州 48 경주이씨 이작양(慶州李氏 李作良)

 

고려인 (관직 : 千戶長), 벼슬은 천호장(千戶長)을 하였다.

 

慶州 48 경주이씨 이중화(慶州李氏 李仲和)

 

고려인 (관직 : 호군 상서), 벼슬은 호군 상서(護軍 尙書)를 하였다.

 

慶州 48 경주이씨 이민윤(慶州李氏 李玟允)

 

고려인 (자 : 震昇, 호 : 潭樵(담초), 관직 : 右僕射), 차성군(車城)의 16세손(世孫)으로서 원종(元宗)조에 급제(及第)하여 도사(都事)가 되고, 좌사랑중(左司郞中)에서 우복사(右僕射)를 역임(歷任)하였다. 저서(著書)에 담초집(潭樵集) 삼권(三卷)이 전(傳)한다. 상서령(尙書令)에 추봉(追封)되었다.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으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며 한상(漢相)의 여(女)이다.

 

慶州 49 경주이씨 이득견(慶州李氏 李得堅)

 

고려인 (관직 : 直長), 벼슬은 직장(直長)을 하였다.

 

慶州 49 경주이씨 이선경(慶州李氏 李善景)

 

고려인 (관직 : 司諫), 벼슬은 사건(司諫)을 하였다.

 

慶州 49 경주이씨 이정핵(慶州李氏 李廷翮)

 

고려인 (관직 : 御史 中丞), 벼슬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을 하였다.

 

慶州 49 경주이씨 이희태(慶州李氏 李熙泰)

 

고려인 (자 : 從厚, 호 : 寒泉, 관직 : 中郞將, 추봉 金吾衛將軍), 차성군(車城)의 17세손(世孫)으로서 충렬왕(忠烈王)조에 대정(隊正)에 임무를 받아 낭장(郞將)에서 중랑장(中郞將)에 올랐다. 추봉(追封)으로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을 받았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월성배씨(月城裵氏) 용원(鎔元)의 여(女)이다.

 

慶州 50 경주이씨 이핵(慶州李氏 李翮)

 

고려인 (자 : 萬里, 호 : 悅軒, 관직 : 증직 尙書 左僕射), 초휘(初諱)는 타(佗)이며, 배위(配位)인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인정(仁挺), 진(瑱), 세기(世基) 등 아들 3형제에게 서책(書冊)을 직접 교육시켜 모두 수석(首席) 장원(壯元)케 육영(育英)하니 세상 사람들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고 모두들 부러워하였으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의 문신학자(文臣學者) 묵헌(黙軒) 민지선생(閔漬先生)은 『꽃송이 같은 세 아들 다섯 손자가 괴장원(魁壯元)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李太白)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헌공(悅軒公)은 평소에 적선(積善)을 하여 온 세상(世上)에 알려져 적(敵)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연년(年年)이 경사(慶事)를 보는구나.』(華萼(악)三家五榜魁(괴), 人言皆是謫仙才, 知公積善 眞無敵, 獨見年年慶席開)라고 칭송하였고, 충선왕(忠宣王) 때 문신(文臣)으로 유명한 검교첨의평의(檢校僉議評議)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歷任)한 문양공(文良公) 조간(趙簡)은 열헌공(悅軒公)에 감탄시(感歎詩)로『양친(兩親)을 모시고 제학(提學)과 문형(文衡)에 오름은 보고 듣기 드문 일이요, 어진 이름을 얻기란 옛적의 용문등극(龍門登極)과 같은 일이라.』비유(比喩)하였으니, 이와 같은 열헌(悅軒) 집안의 기쁨은 형언하기 어려우며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수석장원자(首席壯元者)가 이 집에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具慶提衡 罕(한)見得, 得賢還勝舊龍門, 悅軒喜氣那容說, 人道新添(첨)甲科孫)라고 부러워하였다. 증직(贈職)으로 상서 좌복사(尙書左僕射)에 봉직(封職) 되었다.

 

慶州 50 경주이씨 이편(慶州李氏 李翩)

 

고려인 (관직 : ),

 

慶州 50 경주이씨 이선정(慶州李氏 李先廷)

 

고려인 (관직 : 郞將), 벼슬은 낭장(郞將)을 하였다.

 

慶州 50 경주이씨 이방렬(慶州李氏 李方烈)

 

고려인 (관직 : 大將軍), 벼슬은 대장군(大將軍)을 하였다.

 

慶州 50 경주이씨 이진(慶州李氏 李眞)

 

고려인 (자 : 時讓, 호 : 荷棲(하서), 관직 : 門下侍郞), 차성군(車城)의 18세손(世孫)으로서 충렬왕(忠烈王)조에 좌정언(左正言)을 시작으로 기거함(起居含), 중서함인(中書含人),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좌상시(左常侍),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서 승진(陞進)하여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고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歷任)하였다. 우왕(禑王)시 문평공(文平公)으로 시호(諡號)였다. 저서(著書)로는 하서집(荷棲集)과 시양예의집성(時讓禮義集成)이 전(傳)하고 아울러 차성연원고(車城淵源考)가 있다. 묘(墓)는 기장현(機張縣) 교동(校洞) 안산(案山) 술좌(戌座)에 있고, 배위(配位)는 정경부인(政敬夫人)으로 파평윤씨(坡平尹氏) 중서령(中書令) 두병(斗柄)의 여(女)이며 묘(墓)는 합폄(合窆)하였다.

 

慶州 50 경주이씨 이숙진(慶州李氏 李淑眞)

 

고려인 (관직 : 尙書), 1270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낭장(郞將) 윤길보(尹吉甫)와 무리들을 토벌(討伐)하여 공(功)이 많아 안렴사(按廉使)에 오르고 진도(珍島)에서 방보(方甫)와 계년(桂年) 등의 적속(賊屬)을 토벌(討伐)하여 평정(平定)하니 이 일들이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 있다.

 

慶州 50 경주이씨 이종보(慶州李氏 李從俌)

 

고려인 (자 : 順長, 호 : 無安, 관직 : 通義大夫), 차성군(車城)의 19세손(世孫)으로서 공민왕(恭愍王)조에 통사랑(通事郞)으로 시작하여 승사랑(承仕郞), 수직랑(修職郞), 조봉랑(朝奉郞), 조의랑(朝議郞), 조산대부(朝散大夫), 중산대부(中散大夫)를 거쳐 통의대부(通義大夫)에 역임(歷任)하였다. 묘(墓)는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후산(後山)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방촌(尨村) 황희(黃喜)의 후예(後裔)로 선(善)의 여(女)이며 묘(墓)는 합폄(合窆)하였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인정(慶州李氏 李仁挺)

 

고려인 (호 : 誠庵, 관직 : 門下評理), 열헌공(悅軒公)의 장남(長男)으로 문과(文科)에 수석장원(首席壯元)하여 광주판관(廣州判官)에 오르고,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러 환산무리들이 수종(首從)한 공(功)으로 벼슬길을 허락코자 할 때 국법(國法)을 문란(紊亂)하게 될 우려가 커서 고신장(告身壯)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니 왕(王)이 크게 노(怒)하여 관직(官職)을 못하게 했다는 것이 사기(史記)에 있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진(慶州李氏 李瑱)

 

고려인 (자 : 溫古, 호 : 東庵, 시호 : 文定公, 관직 : 檢校政丞), 1280년(忠烈王8)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광주사록(廣州司祿)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기용(起用), 그 후 기거중사인(起居中舍人),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군부총랑(軍簿摠郞)에 전임(轉任)되었다. 1297년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대사성(大司成), 밀직승지(密直丞旨), 전법판서(典法判書), 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 등을 역임(歷任)하고 권수밀직부사(權授密直副使)가 되어 적폐(積弊)를 일소할 것을 상소(上疏)·채택(採擇)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130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지병마사(知兵曹事)·사림학사(詞林學士)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13년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封)해 졌으며, 1315년 과거(科擧)를 맡아 보았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能通)했고, 시문(時文)에 뛰어났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세기(慶州李氏 李世基)

 

고려인 (호 : 松巖, 시호 : 文僖公, 관직 : 檢校政丞), 1279년(忠烈王 5)에 성균시(成均試)에서 수석장원(首席壯元)하고 1280년 친시(親試)에서 중형(仲兄) 동암(東庵)은 을과(乙科)에 공(公)은 병과(丙科)에 각기 동방(同榜) 수석장원(首席壯元)하니 충열왕(忠烈王)은 크게 칭찬하고 천장급제(天場及第)라 하였으며 황패(黃牌)를 하사(下賜)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하였다. 정승(政丞) 문인공(文仁公) 민지선생(閔漬先生)과 찬성사(贊成事) 문양공(文良公) 조간선생(趙簡先生)은 열헌공(悅軒公)을 부러워하던 시문(時文)을 보내어 경하(慶賀)하였다. 관직(官職)은 비서성(秘書省) 비서교서(秘書校書)에 오르고 이어 비서감(秘書監)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제학(大提學), 검교정승(檢校政丞) 등을 역임(歷任)하는 동안 씨족적(氏族的)인 성격으로 청렴(淸廉)한 기질(氣質)을 인증(認證)하여 문장(文章)으로서 보국(報國)한 능재(能才)로 시호(諡號)는 문희공(文僖公)에 증봉(贈封)하였다. 월성(月城) 이문(里門)안에 소재(所在)한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봉안(奉安)하였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임간(慶州李氏 李林幹)

 

고려인 (일명 : 直幹, 관직 : 政丞), 양산촌장(楊山村長)이요,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된 이알평(李謁平)의 51세손(世孫)으로 충선왕(忠宣王) 때 정승〔政丞(尙書兵部 判事)〕에 있었으며, 장천〔長川(長水의 古號)〕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지자 후손(後孫)들이 장수(長水)를 본관(本貫) 삼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장수이씨(長水李氏)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유신(慶州李氏 李裕臣)

 

고려인 (관직 : 禮儀判書),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임하였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예(慶州李氏 李芮)

 

고려인 (관직 : 監察糾正), 벼슬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을 하였다.

 

慶州 51 경주이씨 이정억(慶州李氏 李廷億)

 

고려인 (자 : 汝方, 호 : 三好, 관직 : 正議大夫卿), 차성군(車城)의 20세손(世孫)으로서 우왕(禑王)조에 급제(及第)하여 수직랑(修職郞)에 오르고 조정랑(朝靖郞), 조의랑(朝議郞), 조열대부(朝烈大夫), 대중대부(大中大夫)에서 정의대부경(正議大夫卿)에 역임(歷任)하였다. 묘(墓)는 양산현(梁山縣) 철마면(鐵馬面) 양평리(良坪里) 후산(後山) 묘좌(卯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 윤묵(允黙)의 여(女)로 묘(墓)는 합폄(合窆)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부(慶州李氏 李榑)

 

고려인 (관직 : 內書舍人), 벼슬은 내서사인(內書舍人)을 역임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규(慶州李氏 李樛)

 

고려인 〔일휘(一諱) : 朝隱, 관직 : 右獻納〕,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경인년(庚寅年) 성균시(成均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고, 벼슬이 우헌납(右獻納)에 역임하였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충숙왕(忠肅王) 갑인(甲寅)에 상왕(上王)이 우헌납(右獻納) 이조은(李朝隱)을 유배(流配)시킨 것은 총승(寵僧) 경린(景獜)과 경총(景聰)의 제직고신(除職告身)에 서명(署名)하지 않은 까닭이라 하였고, 여말(麗末)에 방목(榜目)을 보면 충렬왕(忠烈王) 36년에 최함(崔咸)이 일방(一榜)이요, 제7은 우탁(禹倬)이요, 제17은 국학진사(國學進士) 이규(李樛)라 하였으니 조은(朝隱)은 급제(及第) 후에 개명(改名)한 듯하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관(慶州李氏 李琯)

 

고려인 (관직 : 駕洛君), 벼슬은 가락군(駕洛君)을 역임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천(慶州李氏 李蒨)

 

고려인 (자 : 君實, 호 : 菊堂, 시호 : 文孝公, 관직 : 內史侍郞 平章事 大提學), 1299년(忠烈王 25)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수석장원(首席壯元)하여 한림사인(翰林舍人)으로 등관(登官), 이부랑중(吏部郞中) 등을 거쳐 충숙왕 (忠肅王) 때는 우사보(右思補)가 되었다. 1343년(忠惠王 復位4)에는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에 승진(昇進),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했다. 이에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1345년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낸 뒤 추성보리공신(推誠補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검교정승(檢校政丞)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封)했다. 원재(元宰)의 명(命)으로 열두 살에 왕위(王位)에 오른 충정왕(忠定王)의 외척(外戚) 윤시우(尹時遇)와 충목왕(忠穆王)의 모후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총신(寵臣)무리인 배전(裵佺) 등이 권세를 부리며 정치를 문란(紊亂)케 하고 강요하는 무자격한 특채인(特採人)의 사령장(辭令狀)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니 섬(島)으로 유배(流配)하고 공(公)의 저서(著書)를 몰수(沒收)하여 소각(燒却)케 하니 나라꼴을 염려하며 심화(心火)로 중병(重病)이 되어 환강(歡康)의 한(恨)을 안고 졸(卒)하였다. 후에 조정(朝庭)에서는 공(公)의 능문(能文)과 청렴강직(淸廉强直)한 충효성(忠孝性)에 시호(諡號)를 문효공(文孝公)으로 보수(報授)하였다.〔文獻〕高麗史, 高麗史節要.

 

慶州 52 경주이씨 이제현(慶州李氏 李齊賢)

 

고려인 (자 : 仲思, 호 : 益齋, 시호 : 文忠公, 관직 : 門下侍中),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壯元),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1303년 권무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 判官) 등을 거쳐 1310년(忠宣王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사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312년 서해도안염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락정(成均樂正)·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1314년(忠肅王 1) 백이정(白頤正)의 문하(門下)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이 해 원(元)나라에 있던 충선왕(忠宣王)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學者)인 요?(姚山+發)·조맹?(趙孟北頁) 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 다음해 선부전서(選部典書)로 원(元)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생일(生日)을 축하했다. 1319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강남(江南)을 유람,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이 해 원(元)나라에 갔다가 충선왕(忠宣王)이 빠이앤투그스〔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유배(流配)되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했다. 다음 해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 1325년 추성량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封)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에 오르고, 번왕(藩王) 고(暠)의 역모사건(逆謀事件)으로 충숙왕(忠肅王)이 잡혀가자 연경(燕京)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하였다. 1343년(忠惠王 復位 4) 원(元)나라 사신이 왕(王)을 잡아가자 글을 올려 사면(赦免)을 요청하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복직(復職),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 충목왕(忠穆王)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元)나라에 가서 충정왕(忠定王)의 승습(承襲)을 청(請)했고,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辭職)했다가 다음해 우정승(右政丞)에 재임(再任)하였다.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王)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封)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王命)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하였다. 당대(當代)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高麗歌謠) 연구(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공민왕조정(恭愍王朝庭)에 배향(配享), 경주(慶州)의 구강서원(龜岡書院), 김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著書 : 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 孝行錄, 西征錄, 史略 등〕

 

慶州 52 경주이씨 이지정(慶州李氏 李之正)

 

고려인 (관직 : 大護軍), 벼슬은 대호군(大護軍)을 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매(慶州李氏 李邁)

 

고려인 (관직 : 副正), 벼슬은 부정(副正)을 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과(慶州李氏 李過)

 

고려인 (관직 : 尙書), 벼슬은 상서(尙書)를 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수(慶州李氏 李蓨)

 

고려인 (호 : 舍人, 개명 : 훤(萱) 관직 : 中書舍人), 문희공(文僖公) 세기(世基)의 사자(四子)로 충숙왕(忠肅王) 을축년(乙丑年)에 생(生)하고, 1345년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매장원(魅壯元)하여 문하성(門下省) 기거랑(起居郞)에 등관(登官)되었다가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참정(參政)하였으나 국정(國政)이 쇠퇴(衰退)하여 민심(民心)이 소란(騷亂)해지자 1392년 임신년(壬申年) 음력 7월 16일에 이성계(李成桂)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하는 방원파(芳遠派)가 득세(得勢)하니 고려조정(高麗朝庭)을 지켜오던 관인(官人)들은‘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정신(精神)으로 불조현(不朝峴)에 관복(官服)을 벗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 순절(殉節), 항절(抗節), 정절(靖節) 등 절사제현(節士諸賢)의 일인(一人)으로서 지조(志操)를 지켜 항거(抗拒)하니 1393년 강화도(江華島)로 유배(流配)되었다가 끝내 조선조(朝鮮朝)에 불복(不服)하므로 다시 평안도(平安道) 곽산(郭山)으로 유배(流配)당했다. 청렴강직(淸廉强直)한 공(公)을 따라 모여든 많은 문하(門下)들과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준걸(俊傑)한 일생(一生)을 마쳤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원무(慶州李氏 李元茂)

 

고려인 (관직 : 中郞將), 벼슬은 중랑장(中郞將)을 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극량(慶州李氏 李克良)

 

고려인 (관직 : 司成), 벼슬은 사성(司成)을 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손보(慶州李氏 李孫寶)

 

고려인 (관직 : 監察御使), 벼슬은 감찰어사(監察御使)을 하였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원주(慶州李氏 李元)

 

조선인 (자 : 士白, 호 : 思菴, 관직 : 利川 府使), 차성군(車城)의 21세손(世孫)으로서 조선(朝鮮) 태종(太宗) 17년 정유년(丁酉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이천 부사(利川府使)에 이르고 이천(利川) 송곡(松谷)에서 내내 살았다. 묘(墓)는 경기도(京畿道) 이천군(利川郡) 대유면(大酉面) 송곡(松谷) 후록(後麓) 자좌(子坐)에 있으며 후(後)에 차성이씨(車城李氏) 부사공파조(府使公派祖)가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의녕남씨(宜寧南氏)이다. 묘(墓)는 부좌(祔左) 쌍분(雙墳)으로 상석(床石)이 있다.

 

慶州 52 경주이씨 이형주(慶州李氏 李亨周)

 

조선인 (자 : 士英, 호 : 碧菴, 관직 : 吏曹 正郞), 차성군(車城)의 21세손(世孫)으로서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 기해년(己亥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좌랑(佐郞)을 거쳐 전리문부공훈(典理文部功勳)에 봉작(封爵)되었다. 이어서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후(後)에 차성이씨(車城李氏) 정랑공파조(正郞公派祖)가 되었다. 묘(墓)는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내동면(內東面) 시래리(時來里) 개남산(介南山) 축좌(丑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월성김씨(月城金氏) 덕제공(德躋公)의 여(女)이다. 묘(墓)는 합폄(合窆)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