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4) 수그사이 환희 제9부 도회지의 환희 76. 반야월 서호동 살다
엽서수필 4 : 수필과 그림사이, 그 환희 |
제9부 도회지의 환희
76. 반야월 서호동 살다
이영백
삶이 참 묘하다. 고향 큰집 가까이 가족이 살다 도저히 맞지 아니하였다. 대학교에 야간공부 마치고 아침시간을 줄인다는 생각에 대구 반야월의 서호동에 집을 얻었다. 이 또한 오산이다. 대구시내에서 공부마치고 서호동까지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리니 매일 12시 반에 집에 도착한다. 리포트 쓰고, 세 시에 자면 다섯 시 반에 첫차 시외버스 타기에 지쳐갔다.
반야월 서호동에 살다. 1981년 3월 중순에 고향 불국사에서 대구 주변도시인 반야월 서호동으로 이사하였다. 이사를 자주하니 귀찮아서 웬만큼 모아 둔 책을 박스째 모두 버렸다. 책장도 버렸다. 캐비닛도 두 개 버렸다.
1981년 3월은 봄이 시작되지만 바쁜 사람으로 변하였다. 아침시간부터 비포장도로를 세 시간씩 타고, 산골 오지학교로 출근하여야 한다. 그것도 6학년이라 주34시간을 가르쳐야 한다. 잡무에, 학부형 상대, 동료교사들의 지원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도저히 내 건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주시내 출장을 나갔다. 동기생을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편입하고부터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고 하자 매일신문에 “전문대학 행정직 모집”이 있더라고 귀띔하여 주었다. 처가에 들러 매일신문을 모두 찾으니 “영남공업전문대학”에서 직원을 모집 중이다. 자격은 초대 졸업이상이며, 주 업무는 “교무업무”이었다. 나에게 행정은 안성맞춤이다.
2명 뽑는데 134명이 지원하였다. 기가 찼다. 그러나 시험은 치르고 결과를 보아야 알 것이다. 1차 논술시험에서 합격자로 들었다. 예비후보 합격에 5명이다. 경대 졸 1명, 영대 졸 3명, 초대 졸이 나였다. 내가 제일 불리한 것인가? 2차는 면접, 3차는 한자쓰기 시험이다. 서른셋에 웬 대학생처럼 전직시험을 치고 있는가? 사람 평생 살아가는데 무슨 경험을 안 하고 살 것인가? 3차 시험치고 소식만 기다리고 초교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최종합격통지서가 전보로 서호동에 날아왔다. 내자와 장모님이 산골 오지학교까지 직접 찾아왔다. 그날이 1981년 4월 25일 토요일 오전이다. 즉시 교장에게 사표를 쓰고 나왔다. “얼씨구나 한× 쫓아냈다”는 식으로 교육청에 쪼르르 택시타고 달려가서 “의원면직”서를 재깍 받아왔다.
교직이 싫어서가 아니다. 동료교사들이 질투하고, 비협조에 스스로 반기를 올렸다. 7년 11개월 25일 만에 초교 교사직을 그렇게“의원면직”냈다.
(20220125.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