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4) 수그사이 환희 68. 아버지와의 담판
엽서수필 4 : 수필과 그림사이, 그 환희 |
68. 아버지와의 담판
이영백
아버지와의 담판은 초교 졸업하던 1963년 2월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고, 아버지(1899~1973)는 “신학문 배우면 타인을 이기고자 모함과 권모술수를 부린다.”고 하여 못 가도록 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맞겠다.”고 생각하고 진학을 포기하였다.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어린이의 판단이다. 사회분위기도 부모가 하는 말은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나의 초교졸업에 파격적인 명령을 내린다. 초교입학 전 한 달 동안 배웠던 “물봉(勿峰)서당으로 다시 나가 한문을 배우고 집안일 도우라”고 하였다. 큰형을 제외하고 세 분 형님들보다는 대단히 훌륭한 명령이다. 가문에 이어 집안대소사의 글쓰기를 위해 서당 다녀야 하는 조건이다. 그땐 아버지의 명령이니까 그렇게 하고 살아야하는 줄 알았다.
막상 서당 다니는 동안 공부도 잘 못하던 초교동기가 교복입고 찾아와서 야간학교라도 다니자고 꼬드겼다. 은근히 친구가 부러워 몰래 시내에 나가 견습(見習)하였다. 시계방에서는 눈에다 커다란 확대경을 끼고 작은 바늘 침 갈아야 한다. 인쇄소에서는 하루 종일 바쁜 일을 끝없이 뒤치다꺼리 하여야 한다. 그 일들을 가만히 보니 매우 힘들어 보여 그만 포기하였다.
초교모교와 침례교회에서 야학을 시작하고부터 신학문에 푹 빠졌다. 그마져도 계속하지 못하였다. 서당 다니며 집안일하고 밤에 신학문을 강의록으로 독습(獨習)하였다. 도저히 통신강의록으로 만족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출사표 쓰고 “아버지의 집”을 탈출하여 몰래 돈벌어가며 공부하였다.
3개월 지나고 집으로 갔다가 아버지의 신학문 거부(책가방과 교복을 부엌에다 집어넣어서 어머니가 재 떨어주어 가방 들고 집나옴)로 다시 큰누나 집에서 한 학기 마치고, 여름방학 시작할 때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학교는 계속 다니면서 집안일 도우며 토ㆍ일요일에는 머슴과 같이 일하겠습니다.”고 담판 아닌 반쯤 항복하여 학교에 다녔다. “궁즉통(窮卽通)”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줄곧 아르바이트로 돈 벌어 교육대학까지 졸업하였다. 물론 코피도 흘리고, 방학동안 군대훈련도 받았다.
1973년 교육대 졸업 때부터 발령을 제때 받지 못하였다. 나를 앉혀 놓고 아버지는 “미안하구나.”하였다.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발령 8개월 만에 아버지는 내가 결혼 전에 12월 20일에 돌아가셨다.
(20220111.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