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4

(엽서수필 4) 수그사이 환희 제4부 형제-자매의 환희 31. 큰형 한시백일장 장원하다

청림수필작가 2021. 11. 7. 00:18
엽서수필 4 : 수필과 그림사이, 그 환희

4부 형제자매의 환희

31. 큰형 한시백일장 장원하다

이영백

 

 큰형은 일제침략기시대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문이 흥하려면 장자가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큰형은 어린 나이 때부터 서당에 다녔다. 낱글자 익히고 한문문장을 배웠다. 한문문장도 짓기 시작하였다.

 열여섯 살에는 2년제 간이학교를 입학하였다. 일본어를 잘 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일본어 배우는데 능통하게 되자 18세에 졸업과 동시 교장은 일본유학을 권하려고 찾아왔다. 아버지의 생각과는 배치되었다.

 고조 때부터 살림이 빈한하여 가례에 늘 남의 글을 빌리러 가야 하였다. 아버지 당대에는 글을 못 익혔기에 한문을 배워야 축문, 혼서, 제문 등을 쓸 때 벼루에 먹 갈아 붓 들고 쓱쓱 써대는 큰형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갑자기 일본어 배우고부터 외국유학 간다니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아버지는 큰형이 간이학교 졸업하자말자 같은 동네처자를 선보고 바로 결혼시켜 버렸던 것이다. 큰형은 그때부터 농사짓고, 글 써는 것만 하였다. , 동생들이 많아서 큰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이 가득 쌓여 갔다.

 해방되고 민주 선거가 여럿 있었다. 그 중에 동네 이장선거에 출마해서 차점자로 낙천하고 말았다. 농사짓는 것을 탈피하려고 큰형은 큰형대로 고민하다가 부산 어시장 경매장에서 경매입찰하는 것을 배워서 어 판장을 차려 오 일 장날마다 찾아다니면서 장사하였다. 그것은 오로지 아버지를 떠날 수 없는 장남의 몫 때문에 불만 해소책의 한 가지 방편이었다.

 그래도 한문배운 실력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안동에서 개최된 한시백일장에 참가하여 당당하게 장원하여 상금과 상장을 받아 걸어두었다. 집에 가면 상 받은 자랑을 하였다. 내가 한 가지 실수한 것은 큰형이 장원한 그 문장을 받아두지 않았기에 여기에 싣지 못함이 글로 서러워 할 뿐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런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큰형만치 삶에 고민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아버지의 엄명으로 가문을 돌보라는 무서운 명령은 곧 가문의 법이 되었다. 아버지는 왕조시대(근조 말 1899)에 태어나신 생각으로 바꾸기 어려웠다.

 오 형제 중에 세 형과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나설 수 있었지만 큰형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꼼짝 없이 가문을 지켰다.

 한시장원을 아버지께 보여드리지 못한 큰형이지만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20211107. . 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