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4

(엽서수필 4) 수그사이 환희 4. 풀치기 하다

청림수필작가 2021. 9. 21. 00:29
엽서수필 4 : 수필과 그림사이, 그 환희

4. 풀치기 하다

이영백

  1950년대 말 소년기였던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짓는 데 도움 주는 일과 소 풀 베기였다. 소에게 먹일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도랑가, 길가에 돋아나는 풀을 베어다 먹여야 한다. 새벽길은 어제 낮에 풀을 베어두었기에 걸어도 괜찮았다. 그렇게 어린 날은 소 풀 베고 살았다.

 소 풀 베러 가기 전에 사용할 낫은 내가 직접 간다. 낫은 오래 사용하고 보면 날이 무뎌지고 잘 베어지지를 않는다. 숫돌 곧추세워 발 딛고 낫을 간다. 조선낫은 한 번 갈아 두면 오래 사용하나 양철 낫은 금방 무뎌진다. 낫은 오른손잡이 낫이 대다수인데 왼손잡이도 간혹 있다. 평 낫은 옥아진 반대편을 갈다가 옥아진 부분에서 날을 조금 갈아주어야 한다.

 지게 위에 낫 얹어 짊어지고 들판으로 나간다. 소가 먹어도 되는 풀은 잘 알고 벤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나와서 베니까 풀이 잘 없다. 자연히 천변으로 이동한다. 가득 실은 풀지게 받쳐둔 것을 보고 꾀를 낸다. 풀치기 하잔다. 풀은 귀하고 베기도 힘드니까 풀치기로 빼앗으려는 속셈이다.

 풀치기는 어떻게 할까? 풀밭에서 여러 가지 풀을 종류별로 모으다가 겨루는 놀이다. 제각기 흩어져서 갖가지 풀잎, 꽃, 나뭇잎 따위를 뜯어 모은 다음 땅바닥에 모여 앉아서 한 가지씩 가운데에 내어 놓는다. 내어놓지 못한 수가 많은 아이가 진다. 많이 낸 아이가 승자로 한 아름의 풀이 상이다. 미리 지게에서 풀 내려 무더기 만들어놓고 시작한다. 자꾸 놀이하다 보면 풀을 모두 빼앗기고 빈 바지게만 남으면 다시 풀 베러 가야한다.

 즐겁게 놀다보면 시간은 사라졌고, 마음은 급해 온다. 한 눈 팔고 낫질하다보면 꼭 손가락을 다친다. 피는 흐르는 것을 보고 흙 뿌리다가 셔츠라도 쭉 찢어 손가락을 처맨다. 부지런한 친구가 피를 보면 쑥 뜯어 짓이겨 처매라고 위로한다. 풀치기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놀다보면 그것이 안 지켜진다. 그 이튿날에도 잊어버리고 또 풀치기를 하고 있다.

 이런 놀이는 아이들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청년들이 하고 놀았기에 무의식중에 배운 것이다. 한 짐 풀을 모두 빼앗기고 나면 성인도 허탈하다. 하물며 조무래기들이야 속병 앓을 일이다.

 생각도 못한 놀이에 빠져 풀 벨 일을 잊어버리고, 놀이에 집착하게 된다. 무서운 결과를 한 번 맛보기한 소년시절이다. 이것도 인생사는 방법이다.

(20210921. 화. 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