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3/미늘

(엽서수필 3) 미늘 제5부 청년의 변명 52. 서당 다시 가다

청림수필작가 2021. 5. 20. 01:09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제5부 청년의 변명

52. 서당에 다시 가다

이영백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녔던 서당을 초교 졸업한 이튿날부터 우리 집 뒷집인 향촌“물봉(勿峯)서당”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초교 졸업하고 처음 배우는 학동에게 알 맞는 한문책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시장난전에서 벌써 사다 놓았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아버지의 역할은 너무나 충실하였다. 신학문보다는 참다운 인간이 되는 서당공부가 좋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이해가 안 된다.

 초라한 시골서당 방바닥에 굻어 앉아 앞뒤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문문장을 낭독하였다. 그것도 우선 낱글자 익히고, 토 다는 것을 배운다. 한문문장을 소리 내어 고개 흔들며 읽고, 이제는 그 문장을 해석하였다. 그때는 한문문법(文法)이라는 것도 없이 마냥 훈장이 하는 대로만 따라 하여야 하였다. 한문문법 용어도 몰랐다. “주어+동사+목적어”라든가 한정어, 수식어, 접속어 등도 몰랐다. 그냥 스스로 터득하여 알아가야 문리(文理)가 틘다고 하였다. 문리 틔려면 10년~20년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1962년도 사회는 어수선했지만 정부에서 새마을사업, 화폐개혁, 여수정유공장, 충주비료공장, 강원도 삼척에 삼화제철소, 울산정유공장, 울산화학공업단지, 울산중공업단지 등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거하여 새로운 경공업ㆍ중공업단지가 착착 설치되던 시기였다. 돈 버는 곳이 많이 생겼다.

 그렇게 동네 서당에 줄곧 다녔다. 동기들이 교복 입고 중학교 다닐 때, 홑바지에 베적삼 걸치고 지게에 보자기로 동몽선습, 벼루, 붓, 먹, 연습종이 등을 함께 싸서 얹고 서당으로 가야하였다.

 서당공부는 초간단하였다. 딱 15분이 걸리었다. 서당공부는 그것으로 일일공부 끝이었다.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었다. 서당에서 한문 배운 것을 밤에 암송하였다. 집에서도 먹 갈아 개발새발로 써보는 것이 전부였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아니하는 초교졸업 소년으로 서당에 다시 간 것이 후회스럽다. 나이 많은 아버지는 자식들 효자노릇 하도록 직ㆍ간접적으로 압력만 넣었다. 낮에 서당 다니도록 허락한 일은 십남매 막내이기에 큰 혜택(?)과 배려를 주신 줄 알았는데 속내는 세대교체의 책임부여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서당으로 일상이 단조로운 서당공부를 매일 하였다.

(20210520.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