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3) 미늘 10. 죽음 앞에서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
10. 죽음 앞에서
이영백
사람은 왜 사는가? 극단적으로 “사람은 죽기위해 산다.”고 할 것이다. 참 그 이상의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결코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모두 죽음에 이를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썼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죽음에 이른다.
문학에서는 사랑을 러브(love)라 하지 않고 “에로스(eros)”라 하며, 죽음을 데스(death)라 하지 않고 “타나톱시스(thanatopsis)”라고 한다. 분명 문학적 표현에서 죽음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한 것일 게다.
우리들 삶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심장 및 호흡기능과 뇌 반사의 영구적인 소실”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도 제한적 시간은 24시간이 지나야 법적으로 겨우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다.
죽음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죽음의 필연성이다. 인간이면 반드시 죽는다. 둘째, 죽음의 가변성이다.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지 아무도 모른다. 셋째, 죽음의 예측불가능성이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넷째, 죽음의 편재성이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데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아집과 욕심, 그 편견과 과욕 등으로 얼굴에 덮어쓰고 자신을 속이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일찍 중국사람 조식(曺植)은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지만 떠남은 마치 아침이슬 말라버리는 것 같구나.(人生處一世 去若朝露晞)」라고 탄하였다. 이러한 명문장으로 표현해 두었는데도 제만큼만 오래 살 것이고, 제 혼자만 영원히 살 것처럼 주장한다. 아침 일찍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을 관찰해 보라. 이슬방울 속으로 투영되는 맑고 속살이 비치이듯 하는 그 모습이 차마 몇 초 동안 존재할 것인가? 붉은 태양이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그 영롱한 이슬방울은 언제 있었느냐 듯 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는 말로 대변할 뿐이다.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에 소풍 나왔다.”하고, 이태백은 “유배지에 왔다.”고 하였다. 소풍이나 유배도 일회성뿐이지 결코 영원하지는 않다.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무엇을 거짓으로 말할 것이며, 무엇으로 욕심을 부릴 것인가? 그렇다. 죽음 앞에서 피할 수 없는 막장을 만들지 말자.
(20210307.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