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2) 66. 나
“40년 만에 다시 오른 마을뒷산 계룡산” |
66. 나
이영백
나는 나를 찾고 있다. 어디에라도 광고를 낼까? 내가 어디에 존재하는 나인가? 나는 스스로 고민에 빠져 이곳 야시골공원 정상 정자에서 오늘을 보낸다. 솔소리바람이 분다. 오늘이 나에게 찾아 왔다. 그 동안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녔는가? 그 대답도 듣기 전에 나는 내려오고 말았다.
나는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우리 조상은 가장 흔한 월성이씨의 시조를 비조(鼻祖)라고 부르니 분적종이다. 전설적 인물의 알평공(謁平公)으로부터 32세 사언(嗣彦)의 아들 둘 있어서 장자 기(岐)는 월성이씨로, 차자 위(渭)는 공이 있어서 차성군(車城君. 車城은 현재 부산 기장군 기장읍)에 봉해지고 그곳에서 살아오면서 “차성이씨”시조가 되었다. 바로 비조-시조-중조-파조-직계 조상들로부터 일직선으로 내가 생겨났다.
어렵사리 노력하여 가계도를 찾아 나서서 알게 되었다. 나도 정소(精巢,睾丸, testis)에서 정자와 난소에서 난자 사이에 이루어진 유성생식으로 태어난 것이다. 시골에서 열 번째 끝물로 태어났으니 몸피가 작고, 키도 적었다. 게다가 마음도 적었다. 생각도 적었다. 돈도 적었다. 보는 것도 적었다. 어려운 형편에 삶을 살았기에 어린 나날들은 자연 속에서 살았다.
초교입학 전부터 독습(獨習)으로 글자를 익혔다. 동네 서당에서 한자 낱자를 “천자문”에서 250자 배워서도 지식이 쑥쑥 자랐다. 1957년 4월 1일 학교를 처음 갔다. “국민 학교”라는 국가의 법령에 따라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6년을 채우고 배운 것이 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2년 동안 다시 서당 다니면서 신학문이 끊어지려는데 여차저차 노력으로 다시 잇기 시작하였다. 곧 “시래운도(時來運到)”였다.
아버지께서 “신학문 하지 말라”는 가법(家法)을 어기고 일탈하여 신학문 매료에 빠져 마침내 초교교사가 되었다. 일 년 벌어 결혼하고 총8년을 끝으로 교직도 던져 버리고 도시로 다시 공부하러 떠나왔다. 전문대학 행정7급으로 발령 받아 주근야독(晝勤夜讀)으로 학위 받고 30여년을 지내다 3급으로 퇴직하였다. 가정을 위해 돈 벌며 지냈다. 퇴직한 후 글쓰기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나를 수필가, 논픽션가로 형성하였다.
나는 나로 존재하며 내가 곧 나이기에 나를 밝힌다.
(20201119. 목. 아동학대예방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