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43. 슬픈 모정의 세월

청림수필작가 2020. 5. 14. 06:43

43. 슬픈 모정의 세월

이영백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세월을 알고 태어났더냐? 이 무슨 해괴한 화두에서 나의 슬픈 모정의 세월을 읽힌다. 세월이란 대형 함정에 오르고 보니 그 속에서는 온갖 규율과 법치와 조정에서 휘둘리고 남은 것은 갈대의 흰 마지막 수염처럼 생긴 것뿐이랴. 한 줌의 세월에서 나를 놓았다 잡았다 하니 이 또한 슬픈 모정의 세월이 아니겠는가?
 누구는 그렇게 세월을 막 살고 싶어서 살았겠는가? 등 떠밀리어 세상에 나오다보니 부족한 것, 없는 것 등 가슴에 안고 태어난 어설픈 나의 인생이 아니더냐? 째깍거리면서 돌아가는 시계바늘침도 세월이 좋아서 돌리겠는가? 모두가 저마다 프로그래밍이 되어 그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세월이 푸르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본디부터 그렇게 세월은 가게 생겼다.
 세월은 무궁한 권한을 가진 것이다. 세월은 사람의 나잇살을 돋운다. 하룻밤 풋사랑에도, 짧은 순간의 행복일지라도 1/N을 갉아 먹었다. 누구는 소설을 쓰면서 “세상의 5분간”에서 하고 많은 세상 주인공들을 동원하여 별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세월의 껍데기다.
 사람들에게 가장 얄미운 놈이 세월로 한탄(恨歎)을 불러 오게 만든다. 잘 되던 일도 안 되게 흐트러져서 사단을 불러 온다. 그런가 하면 또 안 되던 일도 로또 당첨되듯 되는 게 세월이란다. 세월의 권한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항우장사나 고관대작이라도 마가 끼어 망하고 말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시 주어진 세월이 고장 없이 가는 세월로 흐름이 정상이다. 어찌 세월이 고장 날 수가 있을까? 매일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도 세월과 마찬가지지 싶다. 누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것과 태양이 아침마다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세월은 고장 없이 흐르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싫어도 그렇게 정해진 순서로 흐르는 것이고, 나타나는 것이 일상에서 말하고 있는 세월이다.
 흔히 인간이 제 멋대로 되지 않는다고, 겁도 없이 세월을 뒤집는다고 큰소리친다. 어디 그렇게 큰소리 쳐 보라 결코 세월은 뒤집어지지 않음이요, 뒤집을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세월은 그냥 흐르는 대로 두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세월은 정확하게 하나도 거짓이 없이 지나가리라.
 모두가 바라고 싶은 세월은 있다. 정확하게 세월이 흐르듯, 태양이 골고루 빛을 비추듯 하는 순수 세월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일지라도 무사 공평하게 혜택을 받는 것이 세월이다. 다만 슬픈 모정의 세월일 게다.
(202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