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31. 고향에는 달맞이꽃대만

청림수필작가 2020. 5. 2. 15:47

31. 고향에는 달맞이꽃대만

이영백

 과꽃 피는 7월이 오면 내 고향 남도 이백 리 길을 멀다않고 찾겠다. 그 옛날 초가지붕 위에 하얀 박들이 뒹굴고 어둠이 내리면 박꽃이 나를 반겨 주었던 곳이다. 이제 그 아련한 풍정은 사라지고 없다. 은어(銀魚)처럼 귀소성 때문에 반겨 주는 이 없어도 고향 자주 찾는 습관이 있다.

 내 고향은 초등학교만 졸업하여도 전 국민이 다 알 수 있는 불국사 사하촌 시래동이다. 글을 써다가도, 멍 때리기 하다가도 조요(照耀)한 나의 고향이 아리도록 그립다. 차라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시골 미루나무 정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이 그런가. 그것이 자꾸 다가온다.
 화려한 도회지 조명 속에서 간혹 고향을 생각하며 꿈을 꾼다. 비록 초가지붕 있는 집에 살았어도 대소가 취객들이 모두 모여 밤낮으로 화전놀이하고, 꽹과리 울리며 장구로 장단 맞춘다. 둘째형 가장 잘하는 남도잡가 “성주풀이”가 구수한 곡조로 조그만 고향에 울려 퍼졌다. 두루 모여 어울려 놀면 이웃집 할머니들이 덩달아 구경 나들이로 찾아오신다. 동동주 잔 가득 부어 드리니 인심도 좋다. 우리 집 충견 복실이도 그날따라 컹컹 짖어 주어서 많이도 후하다. 안 그러면 집 앞에 얼씬도 못하게 짖는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금자, 봉화, 삭부리, 애자 등 소녀, 소년들의 이름이 정겹다. 언제나 후한 얼굴의 금자도 이제는 나이가 많겠지. 앵앵거리던 봉화도 어디로 시집가서 잘 살겠지. 사라호 태풍으로 집이 통째로 홍수 속에 떠내려갔던 삭불이 친구도 저네 큰형 현역 대위로 부산에서 찾아와 떠나가 버리고는 이제껏 소식도 모른다. 언제나 몸이 약했던 가녀린 애자도 어디로 시집을 가서 잘 살겠지. 그리고 보니 그 옛날 나의 글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계집애, 머슴아들이여 무척 그립구나. 이제라도 보고 싶구나.
 그리운 어린 나날들이 보인다. 낮이 긴 날 봄이면 가장 먼저 참꽃 따 먹고, 그래도 배고프면 찔레 순 꺾어다 허기진 배 채웠다. 여름이 오면 오디 따고 가지 따다 먹고 굶주림을 이겨내었다. 가을이 오면 온통 감나무 위로 올라가 홍시 털어먹던 그날의 맛이 새로이 밝다. 겨울이 오면 초가지붕 밑에 플래시 비춰 참새 잡아 한밤에 여럿이 옴 밥 해 먹었다.
 어찌 이제 고향 찾은 늚이는 나그네가 되었는가. 내가 유치한 고등학교에서는 풋풋한 여학생들이 왁자지껄한 운동장을 독차지하고 공놀이 한다.
 고향, 고향을 찾았지만 남천 시래 거랑에 사행천으로 굽이굽이 물 흐르면서 달맞이꽃대만 올라온다. 밤이 오기를 기다려 달맞이하고나 갈까.
(2020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