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21. 대자연에서
21. 대자연에서
이영백
어려서 네 번째 이사를 온 집에서 유년기를 질건 씹히도록 보내고 살았다. 나는 외딴마을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살았다. 아버지 모시고, 형님ㆍ누나와 함께 하늘이 낮다 생각하고 동요를 흥얼거리면서 자연 속에서 살았다. 누가 말하기에 나를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였다. 실제도 그랬다.
집에서는 짚신을 신고 소 풀 먹이러 새보 둑으로 나간다. 소와 송아지는 도랑 속으로 몰아넣고 나는 그 둑에 반듯이 드러누워서 둥근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이 하늘에다 궁궐을 그렸다가 어느새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했던지 높은 집을 그려댔다. 하늘은 마치 그림 그리는 이젤 같았다. 내가 생각한 대로 그려 주었다. 그러기에 혼자 흥얼거리며 세상을 아는 듯 떠들어대었다. 그렇게 세상이 뭔지도 모르면서 외딴 곳에 살았다.
둑에 자라는 자연 풀꽃 중에 시계풀이 있다. 시간만 나면 시계풀꽃 줄기를 뜯어 꽃시계를 만든다. 꽃시계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성에게 묶어 줄 예정이었다. 제일 많이 고생하는 엄마 팔에 꼭 묶어 드리려고 하였다. 시계풀꽃은 알고 보니 “토끼풀”혹은 “클로버 꽃”이라 하였다.
또 둑에서 가장 흔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잔디다. 잔디는 키 작고 가늘지만 줄기가 빳빳하고 야물게 생겼다. 자라고 있는 윗동만 보면 그렇지만 사실 잔디는 뿌리가 아주 튼튼하다. 사람이 돌아가시고 무덤 만들면 세찬 비가와도 허물어지지 말라고 잔디를 뿌리 채 캐다가 심지 않은가? 잔디는 가만히 윗동을 들여다보면 재미나다. 왜소하지만 빳빳한 줄기가 있어 끝부분에 씨를 맺는다. 그 씨앗은 익으면 까만색이다. 잔디 씨앗을 훑어다가 모종으로 키워도 훌륭한 쓰임에 활용할 수도 있다.
암소가 송아지와 부지런히 풀을 뜯어 먹는 도랑 물가에 하연 야생미나리가 꽃을 피어내었다. 야생 미나리는 그냥 베어다 반찬으로 해도 좋다. 소는 내가 베어내기도 전에 기다란 혓바닥으로 한꺼번에 냅다 그 미나리를 통째로 먹어 치워 버렸다. 아깝다. 진작 알았으면 좀 베어 둘 것을.
유년기 대자연 속에서 나는 도랑둑에서 자라던 시계풀꽃과 까만 대가리를 내밀던 잔디와 하얀 꽃을 피어내던 야생미나리가 함께 자라는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대자연은 인간에게 무한대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대자연이 나는 좋았다. 그래서 대자연의 아들로 자랐다.
유년기 고향에서 대자연에 휩쓸리며 나도 조그맣게 자라고 있었다. 하나같이 웅장한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키 작은 아이가 살았다.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