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수필작가 2020. 4. 17. 15:31

16. 금모래


이영백


 태어나고 자란 그곳은 지금도 눈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형산강 상류 시래천이 보인다. 비록 강의 발원지는 아니지만 토함산 높은 곳에서 물 먹은 지표를 거쳐 골짜기마다 물소리를 돌돌 만들어 큰 물소리로 만든다.

 고향에는 형산강 남천 중의 시래천인 하천이 있다. 산골짜기를 돌아서 노래하다 지쳐서도 이미 이곳까지 도착한 모래다. 높은 산 바윗돌이 어그러지고, 깨어지고 홍수로 물살에 떠밀려 내려와서 부딪히고 닳고 닳아서 된 모래이다. 고운 모래가 하천바닥에 지천으로 쌓여서 우리들 놀이터가 된다. 요즘 도시에서는 어린이용 사장(砂場)이 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는 아무도 만들지 않은 자연사장이 저절로 만들어져 흔한 것이 강바닥의 금모래이었다.
 모포초교에 발령받았다. 고향 오는 길목에 양포항구 - 그곳에 군함이 정박하였다. 당시 대통령 명으로 베트남에 모래를 보내기 위해 정박하였다. 전쟁이 끝나갈 때 빈 배로 갈 수 없어 건축용 모래라도 실어가야 올 때 포항종합제철에 쓰일 고철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포철에서 만들어진 강철로 수출하는 자동차가 만들어진 그 깊은 뜻을 누가 알겠는가?
 고향 하천바닥에 늘린 게 모래였다. 모래도 알고 보니 건축용이 있고, 산업용이 있다. 건축용 모래는 그냥 “모래”라 하고, 산업용 모래는 규사(일명 “백모래”)라고 하는데 SiO2 규사가 96%이상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베트남에 왜 우리 모래가 필요하였을까? 베트남에도 모래가 천지로 많이 있을 텐데. 그 답은 빌딩을 짓는데 우리나라 모래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바다모래는 건축용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염분과 조개껍질 같은 불순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인 소월은 “엄마야 누나에서”에서 “금모래 빛”을 노래하였다. 난 어쩔 수 없이 나의 고향 하천의 모래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어려서 놀 때라고는 동사무소 마당이 전부였고, 길이라고 해도 리어카도 못 다니는 예부터 있었던 고작(古作)밖에 없었다. 물론 큰 길로 나오면 신작로(新作路)가 오늘날 국도로 있었다. 자연히 우리들이 놀 수 있는 곳은 하천바닥에서 반짝이게 모인 금모래, 은모래가 천지인 사장뿐일 것이다.
 그 하천 금모래를 가지고 모래성과 모래집을 짓고 어린 날을 보내었다. 형산강 남천의 지류인 시래하천 금모래벌이다. 하천에서 오래도록 놀다보면 소변이 마려워 즉석에서 값비싼 금모래 위에다 버리고 말았다.
(2020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