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 제8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06.RNTC병영훈련 1년차 입소
신작수필 |
06. RNTC병영훈련 1년차 입소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RNTC(교육대학 하사관무관후보생)는 군 문제로 입단하고 말았다. 1971년까지만 하여도 대구는 기후까지 혹독하였다. 대학생활에서 3월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취생활로 얼룩졌다. 헐벗은 대학생활과 자취하면서 돈 들여가면서 군 훈병생활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학생인지, 군인인지 구분도 못하고 5개월 생활이 후딱 지나갔다.
7월 15일. 드디어 대학 1학기 종업식이다. 대학 종업식은 별것이 없다. 시험이 끝나면 그날이 종업식이다. 7월 5일(월)부터 15일(목)까지 장장 9일간 시험을 치렀다. 오전에는 대학 시험, 오후에는 군사과목 시험이었다.
아흐레 동안 밤낮으로 오전, 오후 연속 4시간씩 시험이었다. 시험을 그냥 치르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기 등을 병행하여 치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학에서 시험과목은 이론(60%)과 리포트(20%), 출석(20%)이다. 물론 실기는 실기로서 끝난다. 이제는 RNTC군사과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과목도 실기는 실기로 시험이 있고, 이론과 실기가 병행하는 과목이 많았다. 특히 1학년에서 발목 잡는 군사과목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독도법이란 과목이었다. 무조건 80%는 재시험이다. 나는 용케도 고교 때부터 지리과목을 좋아해서 독도법 1차 시험에 80점으로 통과되어 심적 부담을 덜었다. 어떤 학생은 독도법을 재시나 심지어 사시까지 쳤다고 한다.
학교 게시판에 안내가 붙어 있었다. RNTC 병영훈련이었다. 8월 4일(수)에 입소하여 25일(수)에 퇴소하는 3주간 병영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군에 훈련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했다. 3주간 군대 훈련을 들어간다고 말씀드리고 곧장 대구로 돌아오고 말았다. 8월 3일 자취방에 들러 준비를 완료하고 군 훈련에 입소하여야 했다. 개인별 위생도구(치약, 치솔 등), 편지지, 볼펜, 공책, 우표, 양말, 수건, 바늘, 실, 구두약, 비누 등을 준비하였다. 동대구 기차역에서 집합하여 충북 증평 37사단 포병사령부로 향하여 기차로 출발한다.
드디어 8월 4일 동대구역에 집합하여 전용기찻간으로 기차를 타고 출발을 하였다. 경부선으로 대구→구미→김천→대전→조치원을 연결하여 기차는 달린다. 이어서 조치원에서 충북선으로 환승하면서 오송→미호→정봉→서청주→청주→오근장→내수→증평 기차역으로 이어진다.
기차역 이름이 아름답다. 오송, 미호, 정봉, 서청주, 청주, 오근장, 내수 등 역 이름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역 광장에서 군사령부 군악대의 환영 팡파르가 울리고 우리는 준비된 군 트럭으로 구대별로 타고 군부대로 들어갔다. 캄캄한 밤이라서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게 앞사람 꽁무니를 따라 우리는 막사로 배치되었다.
우리 교육대학 학생만으로 “학생부대”가 편성되지 아니하고, 청주교대생들과 반반씩 섞이었다.
군대는 군대이었다. 사제품, 예를 들면 미숫가루라든가 약 중에 보약 등은 모두가 압수되었다. 우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학생대대장으로 현역 육군 중령출신이 있었고, 현역 교관(소령, 대위, 중위, 소위), 현역 조교(하사관), 기간병(병사)들이 우리를 기다리면서 긴장을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사제품 압수로부터 팬티, 내의, 바지, 웃옷, 혁대, 모자 철모 등을 새로이 지급 받고, 군인이 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총기배정으로 총기번호를 외어야 했다. 방독면, 수통, 명찰, 계급장, 학군단 표지, 군 숟가락 등 하나하나 차례대로 배급이 되었다. 특히 계급장(모자, 웃옷 가슴, 팔), 명찰(웃옷 2벌 모두 달아야함.)을 받아 바늘로 손수 달아야 했다. 심지어 웃옷과 철모에는 교번(151번)을 달아야 했다.
이것을 일반생활에서처럼 배정 받는 것이 아니라, 군대식으로 배정을 받으니 기합이 단단히 들어야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잘못되면 즉시 기합을 받거나 꾸중을 들어야 했다.
늦은 시각에 저녁을 먹었다. 식당 출입부터 하나하나 모두가 교육이었다. 모자를 쓰고 줄지어 식당 입구에 대기하면서 차례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배정 받고, “식사시작!”과 동시에 일제히 “감사히 먹겠습니다!”를 외쳐야 숟가락을 들 수가 있다. 늦은 저녁시간 내무반 동초와 입초까지 직접 서야 했다. 모든 일이 하루 저녁에 도착하여 일사불란하게 시계바늘이 돌아가듯 정확히 이루어졌다. 아침이면 중대 사전舍前에 집합할 줄을 아무도 모르고, 내무반 동초와 막사 밖에까지 경비를 서면서 잠이 들었다.
새벽 5시 30분! 기상나팔이 울었다. 우리는 남의 세상이듯 잠이 들어 있었다. 동초動哨 서던 동료가 탕탕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면서 우리 집이 아니라 군대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기상나팔 소리를 들은 사람이 몇이 안 되었다. 그저 부스스한 눈에 군복을 입고 철모 쓰고, 소총 들고 아직도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은 충북 증평 37사단에서 중대 사전에 서니 군인이라는 것을 새삼스러이 실감하게 되었다.
소대별로 집합하여 제일먼저 보고를 하여야 하고, 보고가 끝나고 단체로 구령연습을 하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4km 구보를 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한 사람의 병사로 탄생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이었다.
(푸른 숲/20100-20130531.)
▲ 1년차 입영훈련에서(1971년)